꿈꾸는 노마드 12/배서리와 보복 서리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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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배서리와 보복 서리
시골에서는 한때 서리라는 이름으로 남의 집 참외, 수박 때로는 간을 키워 남의 집 횃대의 씨암탉까지도 잡아다가 닭볶음탕을 해 먹기도 했다. 저녁 먹고 동네 마실로 사랑방에 모이면 긴긴밤 할 일이 많지 않아 이집 저집 솥뚜껑을 열어 남은 밥을 훔쳐다가 큰 양은그릇에 던져 넣어 비벼 먹곤 했다.
그 시절 소년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아랫마을 과수원으로 배서리에 나섰다가 이후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서툰 도둑이 첫날밤에 걸린다고 딱 그 격이었다. 아랫동네 배 밭은 오래되기도 했거니와 규모도 커 인근에서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간 서리꾼들도 꽤 많았을 터여서 주인 입장으로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소년과 그 일행 서리꾼들은 검은 옷에 얼굴까지 검정 숯으로 위장한 채 밤이 이슥하길 기다려 과수원으로 진입했다. 위장까지 한 걸 보면 서리라기보다는 배 도둑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배를 훔쳐다 팔려는 전문 도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소년 일행이 과수원 울타리를 넘는 순간 손전등 불빛이 소년 일행 얼굴을 환하게 비쳐왔다. 배 밭주인은 마침 소년이 다녔던 국민학교 육성회장을 겸하고 있었고 소년 역시 나름 인근에 알려진 얼굴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쳤지만 헛수고였다. 배 한 개 따먹어 보지도 못한 채 소년은 이후 배 밭주인으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배 값을 보상하라면서 소년 집으로 내용 증명을 등기로 보내온 건 시작에 불과했다. 소년 아버지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생전 처음 이런 일을 겪는 소년으로서는 이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축 처진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이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겨우 들어온 것이다.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꾸중할 것을 소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 심란한 마음. 그러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년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소년은 아버지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소년이 일을 저질렀거나 말을 안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꾸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튿날 학교에 가서도 소년은 마음이 온통 엊저녁 일에만 신경이 쓰여,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따라 선생님은 뭘 그리 열심히 씨부렁거린담.‘
다음날 배 밭주인, 윤 씨의 조카가 소년 패거리를 모아왔다. 윤씨가 오란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소년과 순용은 무조건 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소년과 순용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열흘의 기한을 줄 테니까 한 사람 앞에 돈 2천 원씩 가져와! 잘 됐지 뭐야. 작년부터 잃어버린 거, 너희들이 다 물어야 해. 너희들이 다 훔쳐 간 것이지.”
윤 씨의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소년은 울먹이며 계속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소년은 피로하고, 괴롭고, 우울했다. 동네에 소년에 대한 소문이 이상하게 떠돌고 있는 모양이고 하소골 윤 씨는 소년을 망신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10대이고 학생이다. 그리고 이웃 동네 사람이다. 소년은 윤 씨가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소년은 도둑인 것이다. 배 따 먹은 도둑이란 말이다. 배 한 개도 먹지 못하고 거금 2천 원을 물어야 할 딱 한 처지다. 배를 하나도 먹지 못했건 먹었건 어쨌든 그쪽에서 소년을 도둑으로 생각한다면 도둑이고, 장난으로 생각한다면 장난이다. 그러나 그쪽에선 소년을 도둑으로 생각한다.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소년 일행이 가서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그쪽에서 너무 냉정하게 나오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2천 원이란 거금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돈을 물게 된다면 소년은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무슨 꼴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온단 말인가. 그러나 거금 2천 원을 3일 후까지 갖다 바쳐야 한다. 안 가져오면 고소하겠단다. 무서운 소리, 억울한 소리, 얄궂은 소리다.
시월 들어서면서 소년은 부쩍 는 휴일과 함께 생활했다. 그렇지만 소년 마음은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하소골 윤 씨는 또 올라와서 벌금 2천 원을 준비해 오라고 한다. 해오지 않으면 경찰에 알려서 소년을 감화원에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무섭고 두려운 말이다. 돈은 나올 구멍이 없다.
더욱이 배 따 먹은 소식이 학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장학생인 소년으로서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소년은 여름 방학 40일의 피날레를 두 가지 사건으로 장식했다. 그 하나는 방학 마지막 날 저녁의 산토끼 구이였고 나머지는 보복 배서리였다.
산토끼는 콩밭에 놓은 올가미에 걸린 것을 정교가 감추어 두었다가 앞 냇가 모래톱에 모닥불을 놓아 구워 먹었다. 달빛도 교교히 비치고 옆에서 물도 흘러 퍽 낭만적인 일이었으나, 토끼가 그리 크지 못한 게 아쉽다면 아쉽다고나 할까?
토끼를 구워 먹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다. 재수와 재봉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병태, 정교, 동균이가 소년과 함께 남았다. 배서리는, 낮부터 소년과 병태 사이에 계획되어있었다. 소년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던 배서리 사건으로 인한 소년과 그 일행의 상처는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과 그 일행은 모래톱에서 달이 지도록 누워 있다가, 자정을 넘겼을 때 배 밭을 향했다. 이 일은 벌써 언제였던가. 그러니까 여러 해 전에 배 한 개도 먹어보지 못하고 배서리에 들킨 후 주인 협박에 살이 빠졌던 일을 복수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그때 소년은 특히 이 일이 학교에 알려질까 해서 퍽 두려웠었고 배 밭주인은 이걸 알고 소년을 오랜 세월 괴롭혔었다. 그때 그 주인이 요구한 돈은 한사람 당 2천 원이었다. 그때 그 돈이 큰돈이기도 했었지만 적은 돈이라고 해도, 그 당시 소년에게 그런 돈이 나올 데가 없었다. 이 사건은 세월이 지나면서 결국, 유야무야되기는 했지만. 소년에게는 심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었다.
소년과 일행은 하소골 배 밭에 도착해서 주위 동정을 살폈다. 대부분 집들이 불을 껐으나, 배 밭 주인집을 포함해서 몇 집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배 밭머리의 담배 건조실에서는 인부들이 아직 자지 않고 불을 때고 있었다. 병태가 어두운 나무 그늘만을 골라 담배 건조실 가까이 접근했다. 사람이 자지 않고 있는지를 살펴볼 요량이었지만, 가시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배 밭 울타리에 기어들어 갈 틈이 있을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조금 후에 병태가 돌아와서 그래도 큰길가 울타리가 허술할뿐더러 마을과도 먼 거리이니 좋겠다고 했다. 모두 쪼그려 앉아 귓속말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국도로 나가는 길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소년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풀 섶과 어둠 속으로 숨었다. 하소골에 사는 두 고등학생이었는데 아마 연애라도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동네 속으로 사라지자 모두 튀어나왔다. 정교가 말했다.
”한 30분 더 기다렸다가 행동하자.“
그 게 안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기다렸다가 행동하기로 했다. 동균이는 흰 런닝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벗어 알몸이 되었다. 나머지는 옷을 벗지 않아도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만약에 주인에게 들키면 우리 마을과는 반대 방향인 보평으로 달아나 그곳 삼거리에 모여서 같이 행동하기로 했다. 보평 애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교와 동균이는 밖에서 망을 보고, 병태와 소년은 배 밭 울타리를 넘기로 했다. 울타리는 가장 허술한 곳을 골랐으나, 그래도 거기에는 가시나무가 얼기설기 걸쳐 놓여 있었다. 병태가 먼저 넘었다.
”투둑!“
긴장 탓인지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잠시 멈추었으나 주인은 아마 신나게 골아 떨어져 있겠지. 다음에 소년이 넘었다. 소리가 더 큰듯했다. 주위에는 수수와 콩들이 있었고 약 5m를 더 나아가니 배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병태가 주의를 주었다. 더욱더 숨을 죽였다. 전방에 무엇인가 하얀 물체가 보였다. 그 형상이 똑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주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철빙이가 미리 기미를 채고 저기 와서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병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하필 저런 데서 저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소년이 의견을 말했다. 확인해 보기로 했다. 돌멩이를 찾아보았으나 없다. 흙덩이를 집어던졌다. 꼼짝도 안 한다. 또 한 번 던졌다. 여전히 가만히 있다. 그러고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병태가 각오했는지 나아갔다. 가까이 가더니 소년을 향해 손짓한다. 접근해서 보니 옥수수 잎이 말라 널 부러져있는 모습이다.
”까짓것, 아주 들통 날 각오로 와본 거지. 뭐.“
병태가 소리 죽여 말했다. 소년도 그때 답답했던 건 사실이었으나, 먼저의 경우가 있어서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역시 돈의 배경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병태는 그런 배짱이 항상 돌발하니까. 까짓것 들통 나도 몇 푼 물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겠지.
소년은 배나무 밑으로 접근했다. 우선 급한 대로 배 하나를 땄다.
”뚝.”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배 담을 곳이 없다. 병태가 윗저고리를 벗었다. 그러자 런닝셔츠가 보이며 환해져서 그것마저 벗어버렸다.
배를 손에 쥐게 된 탓인지 소년은 그제 서야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배나무가 조그만 탓인지, 한 나무를 깡그리 따니 윗저고리로 만든 자루가 꽉 찼다. 병태가 바지마저 벗었다. 완전히 팬티 차림이었다. 다음 나무로 다가가서 그 나무도 삭발해 버렸다. 바지가 다 찼다.
“오줌이 눟고 싶은 걸.”
병태가 이런 때면 오줌이 자주 마렵다면서 앉은 채로 풀 섶에 오줌을 갈기며 여유 있는 소리를 해 보였다. 아마 병태도 이제 마음이 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나갈 때는 들어올 때의 맞은편 울타리를 택했다. 거기서는 가시나무 가지 사이를 빠져나가야 했다. 소년이 먼저 나왔다. 반바지와 T셔츠를 입은 소년은 적당히 나올 수 있었지만, 병태는 좀 할퀸 모양이었다. 가슴까지 닿는 벼 사이로, 물이 괴여있는 논을 건너 정교와 동균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야, 지루했다. 한 시간 이상 걸린 것 같지? 쥐새끼 소리조차 안 나니. 모두 죽어버렸나 했다.”
풀 섶에 엎드려 망을 보던 정교의 투정이다.
“야, 말마라. 배따는 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들리던지.”
병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소년은 동네로 직행하려는 모두를 말렸다. 그래서 일행은 동네 반대편 길로 내려섰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냇물 건너서 건너편 둑을 넘어 논두렁으로 들어섰다. 동네와 보평, 하소골, 모시터의 거리가 비슷한 곳인 장 나들이 세거리에 와서 모두 주저앉았다.
“아주 자취가 안 나게 하려 했던 것인데, 배 도둑맞았다는 걸 날이 새면 바로 알아보겠지?”
복수해서 시원할 것 같던 소년의 마음은 오히려 더 불안해 와 몇 해 전 고통 받던 때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이런 기분을 눈치 챈 병태가
“그까짓 것. 뭐 어때. 그게 오히려 더 통쾌하지.”
병태는 진짜로 통쾌한 듯이 외쳐댔다.
정교가 배 봉지를 비집어 내고 배를 한 움큼 물어 떼더니 감탄한다.
“우와, 이거 꿀맛인 걸!”
배는 클 대로 커서 맛이 들어있었다.
“야, 철빙이. 그때처럼 우리 집에 미리 가서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이건 모두 소년의 기우였다.
“야. 배 봉지와 껍데기는 잘 모아 두었다가 안 보이는 곳에 버리는 게 좋겠어. 아까 냇물에서 모두 벗겨 내버릴걸 그랬지.”
“뭐. 별 게 아니라고. 여기 있는 넷이서 입만 봉 하면.”
병태의 주장이다.
“재수는 우리의 계획을 몰랐지? 그렇지 정교야? 그리고 재봉한테는 정교 네가 잘 말해둬라.” 소년이 다짐했다.
“그려. 규창이 그런 애들한테도 말할 필요가 없어. 원래 변덕이 심한 애니까.”
정교가 응답했다. 동균이는 한옆에서 배 먹기에 정신이 없다. 배가 부르도록 먹었지만, 배가 남았다. 넷이서 세 개씩 나눠 가지니 하나가 남았다. 그건 동균이가 먹었다. 아마 한 서른 여 개나 따온 모양이었다.
“야. 동구 앞 가게를 피해 가는 게 좋겠다. 괜히 그 수다스러운 여자에게 기미를 알게 해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역시 소년의 제의.
시간을 물으니 새벽 1시 40분이 넘었다고 했다.
“아따. 그놈 되게 못되어 먹었네. 뭐가 그렇게 두렵담.“
정교가 힐난했다.
”아냐. 철빙이라는 사람 퍽 간교하단 말야. 그리고 매일 밤 고생 안 하려면 범인을 잡아 본보기로 배 값 덮어씌우려 할 걸. 그러니 범죄 용의가 우리 동네로 미쳐서는 안 되지.“
소년이 자꾸만 불안한 소리만 한 탓인지, 병태도 좀 불안해졌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동균이, 너 혹시 철빙이가 예를 들어 정교한테 들었다면서 ’배 따먹었지?‘하고 윽박지르더라도 얼굴색 하나라도 변하면 안 돼.“
좀 어수룩하게 생각했던지 동균이 보고 한 소리다. 동균이는 나머지 배마저 모두 먹어 치웠다. 일행은 가게를 비켜 가기로 하고 사잇길을 택했다.
”이렇게 늦게 집엘 들어가면 집에서 의심할 텐데. 그게 문제란 말야.“
또 소년의 기우.
”아따. 변소엘 좀 다녀온다고 하면 되잖냐.“
정교.
”저녁에 안 들어온 걸 아는 데도?“
”잠든 사람이 뭘 알아.”
동네 어귀까지 왔다.
“야, 주의는 동네서 더 해야 해.”
병태.
“그렇지 들어갈 땐 잘 가란 인사도 서로 하지 말자.”
소년.
그래서 인사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날이 새면 서울로 떠날 병태와 대문 앞에서 헤어지며 작별 인사도 못 한 셈이었다.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으나 아버지가 자지 않고 있다가 소년의 기미를 알아채고 기침을 한다.
“삐드득.”
할 수 없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고 소년은 저벅저벅 집 안으로 들어선다.
“일찍 들어와 자지 않고 어딜 갔다 이제 오니?”
아버지가 걱정스레 한마디 하였으나 소년은 대답 없이 방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자리에 들었다. 눕자마자 괘종시계가 새벽 두 시를 쳤다.
’내일은 저 배를 아버지께 드리고 그때 살 빠진 걸 보충하느라고 배서리 갔었다고 말씀드려야지.‘
밤이 깊어가는 소리에 소년은 깊숙이 잠에 빠져들었다.
시골에서는 한때 서리라는 이름으로 남의 집 참외, 수박 때로는 간을 키워 남의 집 횃대의 씨암탉까지도 잡아다가 닭볶음탕을 해 먹기도 했다. 저녁 먹고 동네 마실로 사랑방에 모이면 긴긴밤 할 일이 많지 않아 이집 저집 솥뚜껑을 열어 남은 밥을 훔쳐다가 큰 양은그릇에 던져 넣어 비벼 먹곤 했다.
그 시절 소년은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아랫마을 과수원으로 배서리에 나섰다가 이후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서툰 도둑이 첫날밤에 걸린다고 딱 그 격이었다. 아랫동네 배 밭은 오래되기도 했거니와 규모도 커 인근에서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간 서리꾼들도 꽤 많았을 터여서 주인 입장으로는 피해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소년과 그 일행 서리꾼들은 검은 옷에 얼굴까지 검정 숯으로 위장한 채 밤이 이슥하길 기다려 과수원으로 진입했다. 위장까지 한 걸 보면 서리라기보다는 배 도둑에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배를 훔쳐다 팔려는 전문 도둑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소년 일행이 과수원 울타리를 넘는 순간 손전등 불빛이 소년 일행 얼굴을 환하게 비쳐왔다. 배 밭주인은 마침 소년이 다녔던 국민학교 육성회장을 겸하고 있었고 소년 역시 나름 인근에 알려진 얼굴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쳤지만 헛수고였다. 배 한 개 따먹어 보지도 못한 채 소년은 이후 배 밭주인으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배 값을 보상하라면서 소년 집으로 내용 증명을 등기로 보내온 건 시작에 불과했다. 소년 아버지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생전 처음 이런 일을 겪는 소년으로서는 이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축 처진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왔다. 이것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겨우 들어온 것이다.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꾸중할 것을 소년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 심란한 마음. 그러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집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소년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소년은 아버지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소년이 일을 저질렀거나 말을 안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꾸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튿날 학교에 가서도 소년은 마음이 온통 엊저녁 일에만 신경이 쓰여,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오늘따라 선생님은 뭘 그리 열심히 씨부렁거린담.‘
다음날 배 밭주인, 윤 씨의 조카가 소년 패거리를 모아왔다. 윤씨가 오란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소년과 순용은 무조건 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소년과 순용은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열흘의 기한을 줄 테니까 한 사람 앞에 돈 2천 원씩 가져와! 잘 됐지 뭐야. 작년부터 잃어버린 거, 너희들이 다 물어야 해. 너희들이 다 훔쳐 간 것이지.”
윤 씨의 대답은 싸늘하기만 했다.
소년은 울먹이며 계속 빌었다.
“용서해 주세요.“
소년은 피로하고, 괴롭고, 우울했다. 동네에 소년에 대한 소문이 이상하게 떠돌고 있는 모양이고 하소골 윤 씨는 소년을 망신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10대이고 학생이다. 그리고 이웃 동네 사람이다. 소년은 윤 씨가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소년은 도둑인 것이다. 배 따 먹은 도둑이란 말이다. 배 한 개도 먹지 못하고 거금 2천 원을 물어야 할 딱 한 처지다. 배를 하나도 먹지 못했건 먹었건 어쨌든 그쪽에서 소년을 도둑으로 생각한다면 도둑이고, 장난으로 생각한다면 장난이다. 그러나 그쪽에선 소년을 도둑으로 생각한다.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소년 일행이 가서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그쪽에서 너무 냉정하게 나오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2천 원이란 거금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돈을 물게 된다면 소년은 집에서 그리고 학교에서 무슨 꼴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해온단 말인가. 그러나 거금 2천 원을 3일 후까지 갖다 바쳐야 한다. 안 가져오면 고소하겠단다. 무서운 소리, 억울한 소리, 얄궂은 소리다.
시월 들어서면서 소년은 부쩍 는 휴일과 함께 생활했다. 그렇지만 소년 마음은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하소골 윤 씨는 또 올라와서 벌금 2천 원을 준비해 오라고 한다. 해오지 않으면 경찰에 알려서 소년을 감화원에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무섭고 두려운 말이다. 돈은 나올 구멍이 없다.
더욱이 배 따 먹은 소식이 학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장학생인 소년으로서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일이었다.
소년은 여름 방학 40일의 피날레를 두 가지 사건으로 장식했다. 그 하나는 방학 마지막 날 저녁의 산토끼 구이였고 나머지는 보복 배서리였다.
산토끼는 콩밭에 놓은 올가미에 걸린 것을 정교가 감추어 두었다가 앞 냇가 모래톱에 모닥불을 놓아 구워 먹었다. 달빛도 교교히 비치고 옆에서 물도 흘러 퍽 낭만적인 일이었으나, 토끼가 그리 크지 못한 게 아쉽다면 아쉽다고나 할까?
토끼를 구워 먹고 나니 밤 10시가 넘었다. 재수와 재봉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병태, 정교, 동균이가 소년과 함께 남았다. 배서리는, 낮부터 소년과 병태 사이에 계획되어있었다. 소년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던 배서리 사건으로 인한 소년과 그 일행의 상처는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과 그 일행은 모래톱에서 달이 지도록 누워 있다가, 자정을 넘겼을 때 배 밭을 향했다. 이 일은 벌써 언제였던가. 그러니까 여러 해 전에 배 한 개도 먹어보지 못하고 배서리에 들킨 후 주인 협박에 살이 빠졌던 일을 복수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그때 소년은 특히 이 일이 학교에 알려질까 해서 퍽 두려웠었고 배 밭주인은 이걸 알고 소년을 오랜 세월 괴롭혔었다. 그때 그 주인이 요구한 돈은 한사람 당 2천 원이었다. 그때 그 돈이 큰돈이기도 했었지만 적은 돈이라고 해도, 그 당시 소년에게 그런 돈이 나올 데가 없었다. 이 사건은 세월이 지나면서 결국, 유야무야되기는 했지만. 소년에게는 심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었다.
소년과 일행은 하소골 배 밭에 도착해서 주위 동정을 살폈다. 대부분 집들이 불을 껐으나, 배 밭 주인집을 포함해서 몇 집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배 밭머리의 담배 건조실에서는 인부들이 아직 자지 않고 불을 때고 있었다. 병태가 어두운 나무 그늘만을 골라 담배 건조실 가까이 접근했다. 사람이 자지 않고 있는지를 살펴볼 요량이었지만, 가시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쳐 놓은 배 밭 울타리에 기어들어 갈 틈이 있을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조금 후에 병태가 돌아와서 그래도 큰길가 울타리가 허술할뿐더러 마을과도 먼 거리이니 좋겠다고 했다. 모두 쪼그려 앉아 귓속말들을 주고받고 있는데, 국도로 나가는 길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소년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풀 섶과 어둠 속으로 숨었다. 하소골에 사는 두 고등학생이었는데 아마 연애라도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동네 속으로 사라지자 모두 튀어나왔다. 정교가 말했다.
”한 30분 더 기다렸다가 행동하자.“
그 게 안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기다렸다가 행동하기로 했다. 동균이는 흰 런닝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벗어 알몸이 되었다. 나머지는 옷을 벗지 않아도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만약에 주인에게 들키면 우리 마을과는 반대 방향인 보평으로 달아나 그곳 삼거리에 모여서 같이 행동하기로 했다. 보평 애들로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교와 동균이는 밖에서 망을 보고, 병태와 소년은 배 밭 울타리를 넘기로 했다. 울타리는 가장 허술한 곳을 골랐으나, 그래도 거기에는 가시나무가 얼기설기 걸쳐 놓여 있었다. 병태가 먼저 넘었다.
”투둑!“
긴장 탓인지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잠시 멈추었으나 주인은 아마 신나게 골아 떨어져 있겠지. 다음에 소년이 넘었다. 소리가 더 큰듯했다. 주위에는 수수와 콩들이 있었고 약 5m를 더 나아가니 배나무가 있었다. 그런데 병태가 주의를 주었다. 더욱더 숨을 죽였다. 전방에 무엇인가 하얀 물체가 보였다. 그 형상이 똑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주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철빙이가 미리 기미를 채고 저기 와서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병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 지금이 몇 시인데. 하필 저런 데서 저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소년이 의견을 말했다. 확인해 보기로 했다. 돌멩이를 찾아보았으나 없다. 흙덩이를 집어던졌다. 꼼짝도 안 한다. 또 한 번 던졌다. 여전히 가만히 있다. 그러고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병태가 각오했는지 나아갔다. 가까이 가더니 소년을 향해 손짓한다. 접근해서 보니 옥수수 잎이 말라 널 부러져있는 모습이다.
”까짓것, 아주 들통 날 각오로 와본 거지. 뭐.“
병태가 소리 죽여 말했다. 소년도 그때 답답했던 건 사실이었으나, 먼저의 경우가 있어서 도저히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역시 돈의 배경이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병태는 그런 배짱이 항상 돌발하니까. 까짓것 들통 나도 몇 푼 물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겠지.
소년은 배나무 밑으로 접근했다. 우선 급한 대로 배 하나를 땄다.
”뚝.”
소리가 몹시 크게 들렸다. 배 담을 곳이 없다. 병태가 윗저고리를 벗었다. 그러자 런닝셔츠가 보이며 환해져서 그것마저 벗어버렸다.
배를 손에 쥐게 된 탓인지 소년은 그제 서야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사람 꼬락서니를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배나무가 조그만 탓인지, 한 나무를 깡그리 따니 윗저고리로 만든 자루가 꽉 찼다. 병태가 바지마저 벗었다. 완전히 팬티 차림이었다. 다음 나무로 다가가서 그 나무도 삭발해 버렸다. 바지가 다 찼다.
“오줌이 눟고 싶은 걸.”
병태가 이런 때면 오줌이 자주 마렵다면서 앉은 채로 풀 섶에 오줌을 갈기며 여유 있는 소리를 해 보였다. 아마 병태도 이제 마음이 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나갈 때는 들어올 때의 맞은편 울타리를 택했다. 거기서는 가시나무 가지 사이를 빠져나가야 했다. 소년이 먼저 나왔다. 반바지와 T셔츠를 입은 소년은 적당히 나올 수 있었지만, 병태는 좀 할퀸 모양이었다. 가슴까지 닿는 벼 사이로, 물이 괴여있는 논을 건너 정교와 동균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야, 지루했다. 한 시간 이상 걸린 것 같지? 쥐새끼 소리조차 안 나니. 모두 죽어버렸나 했다.”
풀 섶에 엎드려 망을 보던 정교의 투정이다.
“야, 말마라. 배따는 소리가 왜 그렇게 크게 들리던지.”
병태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소년은 동네로 직행하려는 모두를 말렸다. 그래서 일행은 동네 반대편 길로 내려섰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냇물 건너서 건너편 둑을 넘어 논두렁으로 들어섰다. 동네와 보평, 하소골, 모시터의 거리가 비슷한 곳인 장 나들이 세거리에 와서 모두 주저앉았다.
“아주 자취가 안 나게 하려 했던 것인데, 배 도둑맞았다는 걸 날이 새면 바로 알아보겠지?”
복수해서 시원할 것 같던 소년의 마음은 오히려 더 불안해 와 몇 해 전 고통 받던 때의 기분이 되어버렸다. 이런 기분을 눈치 챈 병태가
“그까짓 것. 뭐 어때. 그게 오히려 더 통쾌하지.”
병태는 진짜로 통쾌한 듯이 외쳐댔다.
정교가 배 봉지를 비집어 내고 배를 한 움큼 물어 떼더니 감탄한다.
“우와, 이거 꿀맛인 걸!”
배는 클 대로 커서 맛이 들어있었다.
“야, 철빙이. 그때처럼 우리 집에 미리 가서 내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이건 모두 소년의 기우였다.
“야. 배 봉지와 껍데기는 잘 모아 두었다가 안 보이는 곳에 버리는 게 좋겠어. 아까 냇물에서 모두 벗겨 내버릴걸 그랬지.”
“뭐. 별 게 아니라고. 여기 있는 넷이서 입만 봉 하면.”
병태의 주장이다.
“재수는 우리의 계획을 몰랐지? 그렇지 정교야? 그리고 재봉한테는 정교 네가 잘 말해둬라.” 소년이 다짐했다.
“그려. 규창이 그런 애들한테도 말할 필요가 없어. 원래 변덕이 심한 애니까.”
정교가 응답했다. 동균이는 한옆에서 배 먹기에 정신이 없다. 배가 부르도록 먹었지만, 배가 남았다. 넷이서 세 개씩 나눠 가지니 하나가 남았다. 그건 동균이가 먹었다. 아마 한 서른 여 개나 따온 모양이었다.
“야. 동구 앞 가게를 피해 가는 게 좋겠다. 괜히 그 수다스러운 여자에게 기미를 알게 해서 좋을 게 없을 테니까.”
역시 소년의 제의.
시간을 물으니 새벽 1시 40분이 넘었다고 했다.
“아따. 그놈 되게 못되어 먹었네. 뭐가 그렇게 두렵담.“
정교가 힐난했다.
”아냐. 철빙이라는 사람 퍽 간교하단 말야. 그리고 매일 밤 고생 안 하려면 범인을 잡아 본보기로 배 값 덮어씌우려 할 걸. 그러니 범죄 용의가 우리 동네로 미쳐서는 안 되지.“
소년이 자꾸만 불안한 소리만 한 탓인지, 병태도 좀 불안해졌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동균이, 너 혹시 철빙이가 예를 들어 정교한테 들었다면서 ’배 따먹었지?‘하고 윽박지르더라도 얼굴색 하나라도 변하면 안 돼.“
좀 어수룩하게 생각했던지 동균이 보고 한 소리다. 동균이는 나머지 배마저 모두 먹어 치웠다. 일행은 가게를 비켜 가기로 하고 사잇길을 택했다.
”이렇게 늦게 집엘 들어가면 집에서 의심할 텐데. 그게 문제란 말야.“
또 소년의 기우.
”아따. 변소엘 좀 다녀온다고 하면 되잖냐.“
정교.
”저녁에 안 들어온 걸 아는 데도?“
”잠든 사람이 뭘 알아.”
동네 어귀까지 왔다.
“야, 주의는 동네서 더 해야 해.”
병태.
“그렇지 들어갈 땐 잘 가란 인사도 서로 하지 말자.”
소년.
그래서 인사도 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날이 새면 서울로 떠날 병태와 대문 앞에서 헤어지며 작별 인사도 못 한 셈이었다.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으나 아버지가 자지 않고 있다가 소년의 기미를 알아채고 기침을 한다.
“삐드득.”
할 수 없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고 소년은 저벅저벅 집 안으로 들어선다.
“일찍 들어와 자지 않고 어딜 갔다 이제 오니?”
아버지가 걱정스레 한마디 하였으나 소년은 대답 없이 방에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자리에 들었다. 눕자마자 괘종시계가 새벽 두 시를 쳤다.
’내일은 저 배를 아버지께 드리고 그때 살 빠진 걸 보충하느라고 배서리 갔었다고 말씀드려야지.‘
밤이 깊어가는 소리에 소년은 깊숙이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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