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16/동거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01
Views
111
동거

아침 일찍 일어나 군불 때고, 밥 짓고, 설거지하는데 유쾌함은 어쩐 일일까? 그렇지. 장래에 혹 자취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인데, 그것이 불가피하지도 않고 어려운 일일 것도 없다는 그런 자신감 때문이었던가 보다.

아침밥이 모자랐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청년이 밥 당번이었다. 두 룸메이트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쌀을 아낀다는 것이 그만 이 꼴이 된 것이다. 자취 시작한 지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도 한솥밥을 먹게 된 청년과 두 룸메이트는 물속에 뜬 기름처럼 각자 따로 논다.

시험을 앞두고 있으니 도서관에 가서 공부라도 하면 좋으련만, 오늘은 밥 당번이라 청년은 일찍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취방에 돌아와 보니 연탄불이 꺼져 있다. 원래 아침에 연탄불을 갈았어야 했는데. 구멍만 막으면 반나절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막아 놓은 것이 그만 화근이 된 것이다. 연탄 좀 아끼려다 귀한 시간은 물론 숯 값과 저녁 빵 값까지 가외로 지출하게 된 것이다. 청년은 비록 오늘 당번이긴 했지만, 연탄불을 숯으로 살려 본 경험도 없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렇지만 불 살리기 선수인 최는 무심했다. 결국, 최의 코치로 연탄불을 다시 살려내기는 했지만, 이후 둘 사이에는 불편한 기류가 흐르게 되었다.

자취방 안집에서는 소풍 다녀온 여학생들이 전축 볼륨을 한껏 틀어 놓고 춤을 추고 있다. 청년은 쌀 아끼려다 친구 애끓게 하고, 연탄 아끼려다 불이 꺼져버려 속이 상해 죽고 싶은 심정인데.

이 모두가 ‘돈’ 때문이다. 청년은 하루 왼 종일 우울하기만 했다. 그래서 청년은 지금 시험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판에 룸메이트 최와 안은 그동안 못해온 영양보충도 할 겸 곰탕이나 한 그릇 사 먹자고 했다. 청년은 호주머니 사정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 깊었다. 고속도로를 풀 스피드로 달려온 밤차들이 숨 가쁘게 질주한다. 최는 서울 집으로 갔고 안은 속리산으로 캠핑을 떠났다. 자취방에는 집에 갈 예정이었던 청년만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청년은 이날 저녁밥을 솥째 번쩍 들어다 놓고 퍼먹었다. 반찬은 콩 볶음과 무장아찌가 전부였다.

“따분하구먼. ”

이웃에서 하숙하고 있는 동급생, 철수가 와서 청년의 청승맞은 식사 모습을 보며 던진 말이다.

김치 담그기로 청년의 노여움과 인내 사이의 갈등이 끝난 시각은 밤 열 한 시. 청년은 그 빌어먹을 최와 안처럼 행동하지는 않기로 굳게 작심했건만, 김치 담그는 내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배추 가져와서 다시 김치를 담으면 내가 성을 갈겠다.’

청년은 굳게 다짐했다. 김칫거리를 청년이 준비해 왔으니 청년이 김치를 담아야만 한다고 치자. 그러나 청년은 최와 안이 물이라도 퍼주었더라면, 김치 씻는데 훨씬 수월했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집에 갔던 청년은 저녁 통근차를 타고 밤 9시가 다 되어서 자취방에 돌아온 참이다. 그리고 몸살감기까지 겹쳐있었다. 청년은 작은 그릇 때문에 배추 전체를 3등분해서 각각 다섯 번씩 열다섯 번을 씻었다.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좋다. 쿨쿨 자빠져 자면서 솥에선 밀가루 물이 흘러 부뚜막이 온통 난장판이 되고, 밀가루 탄내가 진동하는 데도 이를 방치한다는 건,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닌가.

‘그래, 너희들 너무했어! 이 인정머리 없고 저주받을 친구들아!’

자취는 가장 어려운 대인관계 중 하나다. 각자 다른 개성과 재원財源들이 한 살림을 해 나가는 것이니까.

“손해 더 보고, 할 일 조금 더 하면 다툴 일이 없을 게다.”

자취하겠다고 집 떠날 때 아버지가 해주던 충고를 되새기며 청년은 들끓는 분통을 삭여냈다.

모처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평화시장에 들러 푸짐하게 장을 보았다. 돼지고기 반 근, 배추 한 포기, 상추, 양파 등. 오늘 당번은 청년이었지만 최와 안이 김치를 같이 담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모처럼 셋이 모두 부엌에서 복작복작. 어휴, 이날 저녁은 얼마나 맛났던지. 쩝쩝.

어제는 현충일이었고 오늘은 일요일이므로 연속 이틀간을 쉬어야 했지만. 청년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돈벌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대전시청의 지적도 트레이싱 용역 일이다. 한 매에 250원가량 쳐준다기에 하루에 너덧 장씩 작업하면 2천 원은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건데. 그게 오산이었다. 실제로는 이틀간 겨우 3매를 그렸다. 그래도 칠, 팔백 원은 번 셈이다.

안은 친구들과 이틀 연휴를 이용해 캠핑을 갔다. 7백 원 쓰며 낭만을 추구하는 놈에 비해 겨우 7백여 원 벌고자 일해야 했던 청년의 처지는 상대적으로 초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뿌듯하기만 했다. 더 이상 얻어먹지 않고 사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트레이싱 용역으로 받은 보수 중 2백 원으로 셋이서 냉면을 사 먹기로 했다. 그런데 안이 배가 부르다고 해서 안과 청년은 막걸리 100원어치, 최에게는 냉면 한 그릇을 산 게 금요일 저녁이었다.

오늘은 저녁 먹고 나서 더위를 피하자고 최와 함께 인근 가양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마침 산책 얘기가 나왔다. 청년은 언젠가 안과 함께 가양국민학교를 지나서 대전상고까지의 산책 코스를 정해 둔 일이 있었지만,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통에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그래서 최와 내기를 해 보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내기 한번 하자고.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책하고 오면 네가 냉면 한 그릇, 늦잠을 여전히 자면 내가 냉면 한 그릇을 살 게.”

“뭐? 내가 냉면 한 그릇에 목매는 줄 아냐? 툭하면 냉면, 냉면 하게!”

청년은 말끝도 못 맺고 그만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하. 이럴 수가! 그랬구나. 그까짓 냉면 한 그릇 가지고 냉면, 냉면 하며 기회 있는 대로 생색을 내다니. 역시 난 얻어먹어야만 격에 어울리나 보다.’

경제적인 원인에서부터 시작된 청년의 소심증은 특히 청년을 줏대 없는 놈으로 만들어 버렸다. 청년은 지난 며칠 사이에 많은 꿈을 꾸었는데 그것들은 몹시도 산만하고 혼돈된 것들이다. 청년은 또한 소심증 때문에 경직된 대인관계를 갖게 되었다. 또한, 그동안 겪어온 청년의 슬럼프와 이를 극복할 수 없으리라는 열등감은 청년의 생활 태도를 배타적이고, 보복적이고, 신경질적으로 이끌어 왔다. 방학을 앞두고 세 사람의 생활은 형편이 없었다. 쌀은 있었지만, 반찬은 고추장과 간장뿐이었다. 장이 좀 있었지만 충분한 양이 되지 못했다. 청년은 식욕이 줄어들고 배속이 좋지 않았다. 화장실에서는 하혈도 했다.

자취방은 우물을 사이에 두고 담을 건너 두 세대. 담에 쪽문을 달아 그 너머로 또 두 세대. 이렇게 많은 쪽방 세대가 붐비고 있다. 그러니 아침엔 화장실 볼일 보기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사 하고 싶지만 가진 것이 넉넉하지 않으니 마땅한 대안이 없다.

쌀 떨어지고 돈 떨어졌으니 집엘 다녀오는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한 달 비용이 쌀 서 말이었다. 그것이 네 말로 되었다가 이젠 다섯 말이다. 엊저녁은 국수 삶아 먹은 후 저녁 통근 열차를 타고 모처럼 집에 들렀다. 예고 없이, 잠긴 대문을 열어달라니 아버지와 계모 모두 놀란다.

“이 밤에 어인 일이냐?”

쌀 얘길 했다. 여전히 자리에 누워 있던 청년 아버지가 병환과 실의에 지친 모습으로 한숨을 내 쉰다.

“그렇게 돈 쓰고, 고생해가며 무엇 때문에 자취를 한다는 거냐?”

지구의 온 중량이 청년 머리 위로 느껴졌다. 언제나 이 지긋지긋한 생활과 가족관계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인가?

안의 생일이랬다. 최가 오늘 밥 당번이었지만 자신은 오늘이 안의 생일인 줄 몰랐단다. 그건 어찌 되었든 간에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사실 엊저녁에 미역국과 돼지고기, 김 등의 준비를 안과 둘이서 농담조로 얘기했었지만, 최는 한참 꿈나라에 가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최가 안의 생일을 몰랐다는 말은 며칠 전부터 화제가 되어왔던 것이므로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불쾌한 일은 낮에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최가 한 얘기, 즉 만규가 최에게 찾아와서 오늘 안의 생일인데 뭘 해준 게 없느냐고 한 것과 수업이 끝나고 만규와 안 둘이서만 저녁을 먹으러 가버린 일이다. 불쾌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일이지만 넓지 못한 성격 탓인지 청년은 여간 불쾌했던 게 아니었다. 결국은 셋이서 저녁에 곰탕 한 그릇씩 먹은 것으로써 생일을 대신하고 말았지만, 저녁에 찾아온 만규 때문에 또 다시 비위를 상하고 말았다.

“최는 극장에 가겠다니 극장에 가고 상은이, 넌 뭘 할래? 기타나 치지 뭐. 그럼, 안은 나하고 같이 나가자!”

나가면서 결국 만규가 손을 벌려왔지만, 청년은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이를 뿌리쳤다.

일요일 아침이다, 최와 안이 말없이 떠나버린 후 착잡한 심정의 청년만 홀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 그들은 결국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 청년은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비를 들어 방을 쓸고 걸레를 빨아 방을 닦았다. 그리고 책걸상과 옷가지들, 이불들을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했다. 기왕의 우정조차 자취를 함으로써 해쳐서는 안 되겠다는 초심이 청년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청소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청년은 되씹었다.

‘나는 너희들과 똑같은 인간이 될 수 없어!’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처음에 안이 이 생활을 집어치우고 하숙을 하겠다고 한 말을 최로부터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때 청년은 약간의 허탈감과 함께 그 원인이 본인의 소심증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것보단 훨씬 더 안의 무책임한 태도에서 기인한 일이다. 이제 와 방을 얻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저만 홀로 빠져 버리겠다는 심보. 아무래도 청년은 잘못 출발했나 보다고 자책했다. 뒤따라 최 역시 하숙을 하겠다고 했다. 돈 없는 청년은 다시 열차 통학으로 돌아가야만 할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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