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20/가지 못한 길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5 10:38
Views
165
가지 못한 길

 

“너, 이 자식! 왜 또 지랄이야!”

“이놈이 어디다 대고!”

오늘도, 어제도 소년은 동생과 이처럼 막말로 다툼을 이어간다. 그러나 소년은 동생에게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동생도 이제 자랄 만큼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이렇게 대응 대응해 오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하찮은 심부름을 어쩌다 시켜도

“제까짓 게 하지!”

가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그러니 소년으로서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네 살 터울인 동생에게 형 소리 한번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동생에게 욕까지 얻어먹는 것은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일이었다. 소년은 같은 터울인 형에게 욕 한 번 해본 적 없고 형이라고 안 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형인 소년이 너그러이 동생을 대해야 동생도 형을 좋게 대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소년은 동생에게 너무했다고 생각했다.

형쯤 되면 동생을 말로 설복시켜서 형을 따르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겠다. 그러나 소년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소년도 동생처럼 남의 심부름 하는 것이나 남한테 욕 얻어먹는 일은 싫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저러고 동생의 못된 성질 때문에 소년의 걱정은 태산이다. 그놈 어떻게 해서 그렇게 성질이 이토록 사나운지. 평소엔 안 그런 놈이 싸울 때 특히 울 때 보면 여간 심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이런 성질은 소년의 반면교사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우리 집안의 가족력일 수도 있는 일종의 분노조절장애였다.

세월이 한 참 흘러 동생이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게 되자 청년은 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날씨가 서늘해졌다. 이젠 벼도 완전히 자라 이삭 패는 일만 남았구나. 그래서 농부들은 한가해졌는가 보다. 농부들은 농삿일 대신 지루한 장마에 허물어진 담장이라든가, 패인 마당, 물이 새는 지붕을 고치느라 한창 분주한 모습이구나. 너와 방학 한 달을 함께 생활하면서 입시 준비하는 네게 아무런 도움도, 조언도 해 줄 수가 없었구나. 내 자신이 네게 도움을 줄 만한 입장이나 형편이 아니구나. 나는 소위 일류 고등학교를 거쳐 일류대학에 다니고 있는 그러한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널 보고 무슨 조언을 할 수 있겠니?

그러나, 그 간 네 앞에서 직접 하지 못한 얘기를 편지를 빌어 털어놓아야겠다.

나는 네게 내 뒤를 본받으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네 잘못을 깨우쳐 줄 수도 있다. 나는 사잇길 사잇길로 해서 인생 항로를 걸어가고 있다만,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 잘못을 뼈저리게 느끼는 법이다. 그래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르고, 바람직한 일 인가 하는 분별력을 갖게 되기도 하지.

이제, 고등학교 입시까지는 130여 일이 남았을 뿐이다. 그 사이 네 인생 진로는 크게 방향이 잡히는 거야. 참으로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지. 아버지 형편으로는 너를 진학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리라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형은 아직 형 자신조차 거두지 못하는 형편이고. 나는 언제가 형과 너의 진로에 대해 상의한 적이 있다. 그때 형은 너를 실업학교에나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져보지 못했던 자유로운 선택의 기회를 네게 만은 꼭 부여해 주고 싶다.

이건 가능한 일이다. 나는 내년쯤엔 취업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네 학비를 내가 댈 수만 있다면, 나는 형이나 아버지보다는 네 진로에 대해 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130여 일을 남겨두고 너에게 중대한 각성을 촉구하려는 거다.

우선 내 얘기부터 해보자. 내 중학교 3학년 시절에는 희망이라곤 없었다. 형은 입대해서 훈련 중이었고 아버지는 내게 실업학교를 못 박아놓고 계셨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나 자신 진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다. 그 실례로 나는 한 장의 입학원서도 사지 않았었다.

나는 겨우 학교가 공동으로 구입한 5년제 공업고등전문학교 입학원서를 그것도 담임의 권유로 써냈을 뿐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시험에 합격 되어 내 인생의 진로는 그렇게 결정되어 버린 것이지.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상황을 항상 후회해왔다. 후회뿐만 아니라 나는 지난 세월 내 어리석은 선택에 대해 얼마나 비관해 왔는지 모른다. 고등학교 과정 3학년 때까지는 대입 준비에 여념이 없는 다른 동창들 때문에 풀 죽어있었고, 초급대학과정인 지금은 대학에 다니는 몇몇 친구들 때문에 기가 죽어있다. 물론 내 현실을 무시한 터무니없는 생각일 수는 있겠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서 나의 모든 야심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이 모든 걸 잘 아는 내가 어떻게 너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있겠니? 나는 그래서 정통을 절감하게 되었다. 너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나오는 그런 정규과정을 밟아야 하는 거야.

지금 와서 우리 집안 형편이 좀 더 나아졌다는 건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 궁핍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네게 터무니없는 시도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나는 내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 조차 가져보지 못했다는 게 큰 불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조차 보지 못한 게 아니냐. 그래서 나는 네게 어려운 것을 강요하고 있는 거야. 그래도 그건 영영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보다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좋은 조건이지.

나는 너를 천재 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너는 보통 이상의 두뇌를 가지고 있지. 따라서 너는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으면 좋겠다. 너무 차가운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일류 고등학교에 응시하는 거야. 그래서 네 능력을 평가할 기회를 가져보는 거지. 붙으면 내 편에서는 좀 고되겠지만 너로서는 장래가 밝아진다. 비록 내 현실은 고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하지 못한 것을 네게서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거기서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너는, 내가 자신을 위해서 너를 이용하고, 도구화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다. 결국, 그것은 네게 도움이 되는 일일 테니까.

나는 네가 명문 고등학교 모표에 교복을 단정하게 입고, 열심히 그리고 으젓하게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 그건 내가 얼마나 염원했던 일이더란 말이냐! 너는 3년 동안 금전적으로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일류대학에 들어간다. 그때는 내가 아마도 입대를 하게 될 테지만 학비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네가 들어간 그 학교 이름 덕분으로 너는 쉽사리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고, 그리고 그때는 너도 자립을 위한 쓴 약을 몇 번이라도 맛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 염원은 너를 그늘 없이, 건강하게 자라고, 배우게 해서 내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러나 청년의 동생은 결국 국내 최고 수준이긴 하지만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대학 공부 대신 금융기관에 취업하게 되었다. 이후 동생은 청년과 마찬가지로 주경야독으로 야간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나 금융기관에서 잘 나가던 청년의 동생은 처가와의 인연으로 사업에 뛰어들면서 결국 부도를 내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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