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35/파묘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5 10:18
Views
161
파묘
지지리 운도 없는 삶을 영위하던 장년의 형은 투석으로 연명해오다 결국 세상을 떴다. 공부를 썩 잘 했던 그 형은 본인의 학력 수준에 비해 웬일인지 시험 운은 그다지 따라 주지 않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자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입대했다. 그러나 훈련 도중 복막염이 발병해 도중하차 할 수밖에 없었던 정말이지 억세게도 운이 없는 삶이었다. 그 형은 일반 병으로 전환되어 제대 후 동대문 시장 등을 전전하다가 서울의 한 중견 회사에 입사한 후 생산관리 분야에서 이사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부인이 식당, 부동산 등에 손을 댔다가 돈만 날렸기 때문에 집도 절도 없이 퇴직하게 된다.
그 형이 세상을 뜬 날이 하필이면 정월 초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연휴가 끝난 다음 날부터 빈소를 차리게 되었다. 장년은 형의 시신을 병원 영안실에 안치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고향의 당질에게 시골 선산에 장지를 준비해 달라고 전화했다. 그러나 당질은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삼촌들과 상의한 후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당질의 태도가 의외여서 동갑네기 사촌한테도 다시 전화해 장지에 관해 상의했더니 당질과 똑같은 답변을 해와 일단 전화를 끊었지만, 속으로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선산으로 모셔야지 무슨 얘기냐.‘
장년이 기대한 답변은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흘을 미루어 빈소를 차린 설 연휴 마지막 날까지도 사촌이나 당질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형수의 주장대로 수원 연화장 납골 공원으로 장지를 게시한 후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시골 친구 병태와 청주의 고종사촌 형은 망인의 장지를 당연히 시골 선산으로 생각하고 장례 날 선산으로 오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정말 부끄러웠지만, 형수가 원해서 시골 선산으로 가지 않고 화장 후 납골원에 모시기로 했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형수는 말로는 망인을 연화장에 안치하자고 했지만 틈만 나면 물어왔다.
“사촌들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나요?”
이날 오후 고향의 망인 친구들이 빈소로 올라와서 장지부터 걱정을 하기에 장년은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묘지에 관한 한 사촌들과의 연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했더니 모두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고향의 고인 친구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 당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의 첫 물음이 장지를 정했느냐는 것이었다. 기가 막혀서 화장 후 납골 공원에 모시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했다.
“오려면 선영의 맨 밑에 줄로 오세요.”
당질의 답변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선영의 소유가 사촌들이라지만 망자를 놓고 이런 식의 몰상식한 갑질을 해대다니! 그래서 장년은 말했다.
“됐네. 묘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세나.”
고인의 발인 바로 전날 사촌들이 한꺼번에 조문을 왔다. 사촌들은 이렇다 할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사촌 형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고. 이제 제일 큰 어른이 되셨네요.”
고인에게 조문을 마치자마자 장년에게 건넨 말이었다.
“네, 제가 어른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잔뜩 독이 올라있던 터라 사촌 형수의 말을 맞받아 장년이 대꾸했다. 고인이 선영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를 이장하여 묘지에 관한 한 사촌들과는 결별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심의 일단을 말한 것이었다. 자기들 땅이라고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 그 땅에 모셔진 조상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모시라고 할 수밖에.
사촌 형수의 두 번째 말은 고인 영정 앞에 앉아 있는 장년 옆에 다가와서 건네 온 것이었다.
“난 귀가 어두워 누가 무슨 얘길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해요.”
사촌 형수의 귀가 어두운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사촌 형수가 본인의 건강 상태를 진솔하고 순수하게 말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 고인의 묘지 결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누가 이런 주장을 누가 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동안 집안일 사사건건에 어깃장을 놓은 건 동갑네기 사촌, 상철이고 이번일 또한 상철이가 주도했을 것이라는 건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촌 형수가 정말 변명으로 이런 얘기를 고임의 영정 앞에서 했다고 상정하면서 장년이 한 생각이다.
’이분, 참 나쁘구나.‘
고인의 묘지 결정에 간여한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구나, 나잇값도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은 했어도 나쁘다는 생각은 안 했었다. 그러나 자식을 교장으로, 시의원으로 키우고, 손녀를 사법시험에 합격시킨 사촌 형수로서 이런 변명을 해온 것은 정말 나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논란과 아쉬움 속에서 고인을 시골의 선영에 모시지 못하고 결국 수원의 연화장에서 화장한 후 같은 장소의 납골원에 안치하게 되었다. 지난 세월 많은 장례와 화장을 지켜보아온 장년은 형을 화장하고 납골원에 안치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장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장년은 지난 세월 본인 시신을 어찌할까를 놓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형의 장례를 계기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장년이 티벳 여행 중 마주한 색달사의 조장 모습은 장년의 이런 생각을 한층 더 굳건하게 했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그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대신 난도질하여 독수리 떼에게 던져주는 티벳 사람들의 마지막 보시 장면을 목도한 장년은 장례라는 의식도 결국 산 사람들의 문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굳힌지 오래였다.
같은 마음으로 묘지에 관한 그간의 모든 논란을 잠재우고 죽음 이후의 모든 미련들도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 연화장까지 와있던 사촌들과 당질에게 가족 산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를 따로 개장하여 화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장년의 이러한 갑작스런 통보에 사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장년은 사촌들과 묘지와 관련된 어리석은 갈등을 한꺼번에 정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 번 결심하고 나니 개장과 화장을 미룰 이유가 없어 다가오는 한식을 택해 개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촌 형수 주도로 조성한 고향 산소에서 아버지 어머니 묘소만을 따로 개장하고 이장하면서 장년은 만감이 교차했다. 장년 가족의 시골 산소 자리는 전망이 확 트이고 따뜻한 남향이라 누가 보아도 명당인 곳이다. 그러나 명당이라는 의미는 솔직히 산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개장하고 보니 지나치게 깊게 모셔져 있는 데다가 석회 등으로 견고하게 밀봉되어 있어 갑갑하게 안장되어 있었다. 이 답답함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유골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 나니 장년 마음의 응어리가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더욱이 잔디로 잘 조성된 묘소의 따뜻한 겉모습과는 달리 묘지 안의 흙은 습기가 가시지 않은 채여서 유골을 수습해 화장해드리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다가 장차 그 넓은 산소를 누가 관리해 나가겠는가, 기껏해야 조카 세대까지 일 텐데 생전에 장년 주도로 이 모든 일과 갈등을 후대까지 미루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년으로서는 사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론 조카들의 미래도 모두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파묘를 마치자 조카가 말했다.
“삼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세대는 묘지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고인의 장례와 아버지 어머니 이장까지를 고맙게도 모두 지켜준 불알친구 병태는 장년이 하는 일이 우리 문화와 관습에 맞지 않는다며 이런저런 고마운 잔소리를 해주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마친 며칠 후에 고맙다는 전화를 했더니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이번 일로 친구에게 한 수 배웠네. 우리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앞으로 누가 우리 묘소를 관리하겠나.”
엎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묘지를 정리한 김에 집안의 기제사는 물론 설, 추석 명절의 차례까지를 모두 정리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이 생존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제사라는 게 어차피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산 자들의 의식이고 또 다음 세대로 내려가면서 제사 문화가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되어 장년이 총대를 멘 것이다.
파묘를 마친 후 평생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인자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장년의 꿈에 가끔 보였다. 사랑과 인정은 겉으로 드러나야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의식이나 제례로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장년은 새삼스레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지지리 운도 없는 삶을 영위하던 장년의 형은 투석으로 연명해오다 결국 세상을 떴다. 공부를 썩 잘 했던 그 형은 본인의 학력 수준에 비해 웬일인지 시험 운은 그다지 따라 주지 않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육군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자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입대했다. 그러나 훈련 도중 복막염이 발병해 도중하차 할 수밖에 없었던 정말이지 억세게도 운이 없는 삶이었다. 그 형은 일반 병으로 전환되어 제대 후 동대문 시장 등을 전전하다가 서울의 한 중견 회사에 입사한 후 생산관리 분야에서 이사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부인이 식당, 부동산 등에 손을 댔다가 돈만 날렸기 때문에 집도 절도 없이 퇴직하게 된다.
그 형이 세상을 뜬 날이 하필이면 정월 초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연휴가 끝난 다음 날부터 빈소를 차리게 되었다. 장년은 형의 시신을 병원 영안실에 안치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고향의 당질에게 시골 선산에 장지를 준비해 달라고 전화했다. 그러나 당질은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삼촌들과 상의한 후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당질의 태도가 의외여서 동갑네기 사촌한테도 다시 전화해 장지에 관해 상의했더니 당질과 똑같은 답변을 해와 일단 전화를 끊었지만, 속으로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선산으로 모셔야지 무슨 얘기냐.‘
장년이 기대한 답변은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흘을 미루어 빈소를 차린 설 연휴 마지막 날까지도 사촌이나 당질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형수의 주장대로 수원 연화장 납골 공원으로 장지를 게시한 후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시골 친구 병태와 청주의 고종사촌 형은 망인의 장지를 당연히 시골 선산으로 생각하고 장례 날 선산으로 오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정말 부끄러웠지만, 형수가 원해서 시골 선산으로 가지 않고 화장 후 납골원에 모시기로 했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형수는 말로는 망인을 연화장에 안치하자고 했지만 틈만 나면 물어왔다.
“사촌들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나요?”
이날 오후 고향의 망인 친구들이 빈소로 올라와서 장지부터 걱정을 하기에 장년은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묘지에 관한 한 사촌들과의 연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했더니 모두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고향의 고인 친구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 당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의 첫 물음이 장지를 정했느냐는 것이었다. 기가 막혀서 화장 후 납골 공원에 모시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했다.
“오려면 선영의 맨 밑에 줄로 오세요.”
당질의 답변이었다. 참으로 기막힌 답변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선영의 소유가 사촌들이라지만 망자를 놓고 이런 식의 몰상식한 갑질을 해대다니! 그래서 장년은 말했다.
“됐네. 묘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세나.”
고인의 발인 바로 전날 사촌들이 한꺼번에 조문을 왔다. 사촌들은 이렇다 할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사촌 형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이고. 이제 제일 큰 어른이 되셨네요.”
고인에게 조문을 마치자마자 장년에게 건넨 말이었다.
“네, 제가 어른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잔뜩 독이 올라있던 터라 사촌 형수의 말을 맞받아 장년이 대꾸했다. 고인이 선영에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를 이장하여 묘지에 관한 한 사촌들과는 결별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심의 일단을 말한 것이었다. 자기들 땅이라고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 그 땅에 모셔진 조상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모시라고 할 수밖에.
사촌 형수의 두 번째 말은 고인 영정 앞에 앉아 있는 장년 옆에 다가와서 건네 온 것이었다.
“난 귀가 어두워 누가 무슨 얘길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해요.”
사촌 형수의 귀가 어두운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사촌 형수가 본인의 건강 상태를 진솔하고 순수하게 말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 고인의 묘지 결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누가 이런 주장을 누가 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동안 집안일 사사건건에 어깃장을 놓은 건 동갑네기 사촌, 상철이고 이번일 또한 상철이가 주도했을 것이라는 건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촌 형수가 정말 변명으로 이런 얘기를 고임의 영정 앞에서 했다고 상정하면서 장년이 한 생각이다.
’이분, 참 나쁘구나.‘
고인의 묘지 결정에 간여한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구나, 나잇값도 못하는구나.‘
라는 생각은 했어도 나쁘다는 생각은 안 했었다. 그러나 자식을 교장으로, 시의원으로 키우고, 손녀를 사법시험에 합격시킨 사촌 형수로서 이런 변명을 해온 것은 정말 나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논란과 아쉬움 속에서 고인을 시골의 선영에 모시지 못하고 결국 수원의 연화장에서 화장한 후 같은 장소의 납골원에 안치하게 되었다. 지난 세월 많은 장례와 화장을 지켜보아온 장년은 형을 화장하고 납골원에 안치하면서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장이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장년은 지난 세월 본인 시신을 어찌할까를 놓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형의 장례를 계기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더욱이 장년이 티벳 여행 중 마주한 색달사의 조장 모습은 장년의 이런 생각을 한층 더 굳건하게 했다. 부모가 세상을 뜨면 그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대신 난도질하여 독수리 떼에게 던져주는 티벳 사람들의 마지막 보시 장면을 목도한 장년은 장례라는 의식도 결국 산 사람들의 문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굳힌지 오래였다.
같은 마음으로 묘지에 관한 그간의 모든 논란을 잠재우고 죽음 이후의 모든 미련들도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 연화장까지 와있던 사촌들과 당질에게 가족 산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를 따로 개장하여 화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장년의 이러한 갑작스런 통보에 사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로써 장년은 사촌들과 묘지와 관련된 어리석은 갈등을 한꺼번에 정리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 번 결심하고 나니 개장과 화장을 미룰 이유가 없어 다가오는 한식을 택해 개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사촌 형수 주도로 조성한 고향 산소에서 아버지 어머니 묘소만을 따로 개장하고 이장하면서 장년은 만감이 교차했다. 장년 가족의 시골 산소 자리는 전망이 확 트이고 따뜻한 남향이라 누가 보아도 명당인 곳이다. 그러나 명당이라는 의미는 솔직히 산 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개장하고 보니 지나치게 깊게 모셔져 있는 데다가 석회 등으로 견고하게 밀봉되어 있어 갑갑하게 안장되어 있었다. 이 답답함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유골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 나니 장년 마음의 응어리가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더욱이 잔디로 잘 조성된 묘소의 따뜻한 겉모습과는 달리 묘지 안의 흙은 습기가 가시지 않은 채여서 유골을 수습해 화장해드리기를 정말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다가 장차 그 넓은 산소를 누가 관리해 나가겠는가, 기껏해야 조카 세대까지 일 텐데 생전에 장년 주도로 이 모든 일과 갈등을 후대까지 미루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장년으로서는 사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론 조카들의 미래도 모두 잘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파묘를 마치자 조카가 말했다.
“삼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세대는 묘지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고인의 장례와 아버지 어머니 이장까지를 고맙게도 모두 지켜준 불알친구 병태는 장년이 하는 일이 우리 문화와 관습에 맞지 않는다며 이런저런 고마운 잔소리를 해주었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마친 며칠 후에 고맙다는 전화를 했더니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이번 일로 친구에게 한 수 배웠네. 우리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앞으로 누가 우리 묘소를 관리하겠나.”
엎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묘지를 정리한 김에 집안의 기제사는 물론 설, 추석 명절의 차례까지를 모두 정리했다. 이 모든 일은 고인이 생존해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제사라는 게 어차피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산 자들의 의식이고 또 다음 세대로 내려가면서 제사 문화가 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되어 장년이 총대를 멘 것이다.
파묘를 마친 후 평생 무뚝뚝하기만 했던 아버지가 인자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장년의 꿈에 가끔 보였다. 사랑과 인정은 겉으로 드러나야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의식이나 제례로 그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장년은 새삼스레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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