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학파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0:42
조회
72
https://www.gtn.co.kr/home/news/news_view.asp?news_seq=10811&s_key=%B9%DA%C0%C7%BC%AD

강화도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점철된 섬이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군이 섬 내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고 단군을 제사지내는 참성단이 있어 개국 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나라가 환란에 시달릴 때는 수도가 천도된 곳인가 하면 폭정으로 쫓겨난 광해군과 연산군이 유배되었던 귀양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는 팔만대장경판과 금속활자가 제조된 문화도시였으며 구한말에는 외적의 잇단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일제와 강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근대사의 문을 연 관문이기도 하다. 요즈음은 교통인프라의 개선으로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있어 주말, 주중을 가리지 않고 관광객들로 강화도 접근로가 몸살을 앓고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와 쾌적한 환경 때문에 전원주택과 펜션 건설로 각광을 받고 있는 새로운 개념의 주거지이기도 하다. 개발의 물결이 세차게 밀려들고 있는 이곳 강화에는 특이하게도 강화학파 후학들이 매달 정기적으로 두 차례씩 모여 강화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맥을 이어가면서 강화만의 독특한 문화향기를 지켜가고 있다. 강화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한 역사학자의 열정과 주머니돈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데 서울 등에서 초청되는 전문가와 학자들이 이 모임을 대상으로 강연하러왔다가 참석자들의 열정과 구성에 놀라 오히려 감동을 받고 돌아가게 하는 모임이다. 참가자들의 열정이 그만큼 대단하고 인적 구성 역시 주부·공무원·학생·농부·시민운동가·기업인·교사·의사·종교인 등을 망라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화학파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것이다. 조선시대 사상계의 주류는 주자학이었지만 17세기 중반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주자학의 편협성에 저항하는 여러 조류의 사상이 형성됐다. 강화학파는 그 중에서 양명학을 수용해 공리주의적인 실학과는 취향을 달리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중시하는 유심적 실학으로 정제두에 의해 발원되어 하나의 맥을 이루어 발전한 것이다. 강화도에 살면서 강학한 정제두와 이후 강화와 일정한 관련을 가진 사람들이 조선 양명학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이들을 강화학파라고 부르고 그들이 추구한 학문은 강화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강화학과 강화학파는 정제두 이후 윤순·이광사·이영익·신작·이시원·이건창을 거쳐 최근세의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학자 그룹에 의해 계승되어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를 여행하다 보면 정제두의 묘나 이건창 생가 등을 마주치게 된다. 강화학파는 오늘날에도 소멸되지 않고 한 평범한 역사 학자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 강화도 시민들의 모임에 의해 그 명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화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주관하고 있는 이 시민모임은 강화도의 풍부한 유적·유물을 배경으로 하여 교육과 출판활동도 같이 수행함으로써 지역주민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 주고 있음은 물론 강화도 역사·화의 관광 상품화를 지원함으로써 지역발전을 위한 촉매 역할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 관광상품의 개발은 물리적으로만 완성될 수 없다. 개발된 상품 안에 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배어 있어야만 비로소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나라의 선진화 역시 물리적·경제적 발전으로만 달성될 수는 없다. 바로 강화학파 모임이 추구하고 있는 문화 발전이 동반될 때만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열병같이 번져가고 있으나 내용이 거기 거기인 겉치레 축제보다는 강화학파와 같이 내실 있는 학술·화 모임이 전국적으로 번져갔으면 좋겠다.< 박의서 교수·안양대학교 euisuh@yahoo.com>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