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前 上書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1:45
조회
91
형님,

참으로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아마도 형님 군에 계실 때 편지 써본 이후로 처음인 것 같으니 한 45년여 만인 셈입니다.

형님께 올리는 오랜만의 글이다 보니 옛날 생각이 먼저 떠오르네요.

우린 참 어렵게 자랐지요. 어머니가 몹쓸 병으로 오랜 동안 앓다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서모 겸 계모를 들이시면서 우린 늘 불행해 했었지요. 어머니 돌아가실 때 제 나이 겨우 열한 살이었으니 어린 나이에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두 누님과 형님에게 많이 기대어 자랐지요.

어렵게 자란 탓인지 우리 삼형제는 중학교까지는 늘 1등을 놓치지 않고 공부를 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실업학교를 선택해야만 했지요. 그래도 형님은 1차 낙방하고 2차이긴 했지만 인문계로 진학해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었지요. 그렇지만 거기도 실패했지요. 형님의 학력 수준에 비해 웬일인지 형님에게는 시험 운이 따라 주지 않았던 겁니다. 이후 군 입대를 앞두고 하는 수 없이 지금의 제3사관학교인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훈련을 받다가 그것도 복막염인가가 발병해 도중하차 할 수밖에 없었던 정말이지 억세게도 운이 없던 삶을 사셨습니다.

결국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형님은 제대 후 동대문 시장 등을 전전하다가 친구와의 연으로 아남산업에 입사하게 되었지요. 입사하신 후 그 회사의 생산관리 분야에서 이사까지 승진하긴 했지만 형수가 다른 일에 손을 대는 바람에 집도 절도 없이 퇴직을 하게 되었지요. 이때도 형수께서 식당이며 부동산이며 손을 댔었지만 하는 일마다 돈만 날렸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었지요. 그나마 은퇴한 후 남들이 어려워 한 부동산중개사 자격시험에 단 번에 합격해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하면서 잠시나마 행복해 하셨지요.

형님 주위의 누님들과 동생들이라도 잘 되었으면 형제지간에 서로 버팀목이 되었으련만 큰 매형 일찍 돌아가시면서 큰 누님 가세 기울었지요. 막내도 사업한다고 일을 벌이다 수십억 부도 맞으면서 형님은 물론 누님들께도 피해만 안겨주었지요. 이러다 보니 형제지간도 서로 부담스러워 질뿐이었지요.

건강만큼은 자신 있어 하시던 형님이 어느 날 투석을 위한 수술을 받은 후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면서 병원도 자주 드나드시게 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병원 조제의 많은 약을 드시면서 식욕까지 잃게 되셨지요. 식사를 잘 못하게 되면서 형님의 모습은 날로 쇠약해져 갔고 그래서 주위에서 모두들 걱정을 했었지요. 이런 와중에 일부 사람들은 투석 환자들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우려를 해와 비로소 형님이 위중하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네요.

형님은 우리 동생들을 겉으로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분은 아니었지요. 그 옛날 분들이 대개 표현이 서툴렀던 것처럼 말이지요. 게다가 얼마 되지도 않은 고향의 재산 처리라든지, 사촌 형수가 주도해서 조성한 시골의 선산의 소유권 문제 등으로 설, 추석 때만 되면 우리 동생들에게 늘 수세에서 논쟁을 해야만 했었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논쟁들이었네요.

최근엔 형님 건강이 우려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겨울 방학을 이용해 장기 여행을 다녀와 보니 그 사이 형님이 한 달간이나 대학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고 했었지요. 귀국해서 퇴원해 계시는 형님께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날을 잡았었지만 약속 날을 하루 앞두고 다시 병원 응급실로 실려 오셔서 결국 병원에서 뵐 수밖에 없었네요.

응급실에 실려 오셨을 때만 해도 형수님이 매니큐어를 지나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 탓에 부자로 오인되어 병원비만 많이 물게 되었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형수님을 핀잔하는 모습이 정겨워 보이기만 했었지요. 그렇지만 우리의 안심과는 달리 담당 주치의는 의료계기판에 나타나는 수치를 근거로 형님이 매우 위태로울 수도 있다며 심각하게 우려를 했었지요. 그러나 이  때만 해도 설마 설마 했던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병원 측이 정신 멀쩡한 형님을 중환자실로 옮겨 놓고 하루에 두 번의 면회만 허락하면서 좀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지요. 돌아가시기 하루 전의 오전에 중환자실로 저 혼자서 형님을 면회했었지요. 중환자실 들어가 보니 죽음을 앞에 둔 혼수상태의 환자들 사이에서 형님 홀로 정신이 깨어계신 채로 간밤을 지 샌 모습을 보고 정말이지 참담함을 감출 수 가 없었습니다. 형님의 위독 여부를 떠나 중환자실의 상황 자체가 깨어계신 형님으로서는 지옥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5분 정도의 대화였지만 형님은 이때까지만 해도 삶에 대해 한 오라기의 의심도 없는 모습이셨지요. 그렇지만 중환자실에서 나온 나는 형수께 형님을 당장 중환자실에서 모시고 나와 집으로 모시는 게 좋겠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형수님도 동의를 했었지요.

그리고 섣달 그믐날이던 그날 오후 형수님과 조카 용환이가 형님을 중환자실에서 나오시게 하여 2인 병실의 간호사실 옆 응급처치실에서 처치를 받도록 하여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튿날은 정월 초하루였고 점심때쯤 척추 수술을 한 큰 누님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형님 병문안을 오시고 있다며 전화를 주었을 때 형님 곁을 돌아가면서 지켜드리자며 동참하지 못했었지요. 마침 우리 집에 아이들과 동서네 부부도 와 계시고 해서 겸사겸사 그런 결정을 내렸었던 거지요.

그런데 식구들 한 참 저녁 먹고 있는 오후 7시 40분쯤 용환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황급한 전화를 주었습니다. 형님이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온 것입니다.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도착해보니 형님은 아직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채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계셨습니다. 아! 그래도 고통스럽게 가시진 않았구나. 그런데 용환이가 그 이유를 얘기해 줍니다. 몰핀 주사 맞고 깨어나시지 못한 채 돌아가신 모습이라고.
따뜻한 형님의 주검을 안치실로 바로 옮길 수는 없어서 한 참을 형님 주위에서 맴돌다가 어쩔 수 없이 냉동 안치실로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날이 하필이면 정월 초하루라서 여러 사정 상 용환이가 빈소를 연휴가 끝나는 일요일부터 차리자고 해서 형님을 안치실에 모셔둔 채로 모두 집으로 돌아왔지요.

형님 모셔져 있는 병원으로 황급히 가면서도 고향의 당질에게는 문자를 넣었었지요. 형님이 돌아가셨노라고. 당질에게 가장 먼저 알린 이유는 시골의 장지를 준비해 달라는 의미였지요, 두어 시간 지난 후에 당질이 전화를 해왔기에 형님 장지를 제일 먼저 상의했는데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사촌들과 상의한 후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당질의 태도가 의외로 미적지근해서 사촌한테도 전화했더니 받지 않더군요. 그래서 문자를 넣어 놓았더니 이튿날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장지에 관해 같은 얘기를 했더니 당질과 똑같은 얘기를 해 와 겉으로는 상의한 후 연락 달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었지만 속으로는 참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내가 기대한 답은 '당연히 선산으로 모셔야지 무슨 얘기냐' 이런 것이었지요.

그런데 나흘을 미루어 빈소를 차린 설 연휴 마지막 날인 일요일까지 사촌이나 당질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요. 하는 수 없이 형수님의 주장대도 수원 연화장의 납골 공원으로 장지를 게시한 후 손님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시골의 내 친구 하나와 청주의 고종사촌은 형님의 장지를 당연히 시골의 선산으로 생각하고 장례 날 선산으로 오겠다는 전화를 해왔었지요. 정말 부끄러웠지만 형수님이 원해서 시골 선산으로 가지 않고 화장 후 납골공원에 모시기로 했다고 둘러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수는 말로는 형님을 연화장에 모시자고 했지만 틈만 나면 내게 물으셨습니다. '사촌들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느냐'고...
이날 오후 고향의 형님 친구 분들이 빈소로 올라오셔서 장지부터 걱정을 하기에 사실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지요. 묘지에 관한한 사촌들과의 연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했더니 모두들 안타까와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얼마나 창피한 변명이었든지요! 형님 생존해 계실 때 묘지의 소유권 문제로 그토록 많은 논란을 겪은 결과가 형님 돌아가시면서 이런 식으로 현실화 된 것입니다!

고향의 형님 친구 분들이 조문을 마치고 돌아간 직후 당질로부터 전화가 왔지요. 전화의 첫 물음이 장지를 정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기가 막혀서 화장 후 납골 공원에 모시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했더니 그 다음 한다는 말이 오려면 선영의 맨 밑에 줄로 오시라는 거였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선영의 소유가 사촌들이라지만 망자를 놓고 이런 식의 몰상식한 갑 질을 해대다니!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됐네. 묘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세나.

나흘을 미룬 후 형님 빈소 차리자마자 아침 일찍 가장 먼저 달려온 손님이 누구였는지 아세요? 저는 생면부지인 형님 다니던 회사의 후배 이 아무개라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 오셔서는 저보다 형님 돌아가신 것을 더 애통해 하면서 형님이 아남산업에서 얼마나 신화적인 존재였는지를 누누이 얘기하드라고요.  이분 앞에서 정말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워졌습니다. 왜냐고요? 형님 편찮으실 때 보신탕과 회를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여러 번 대접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랬지요. 저는 형님 편찮으신 동안 식사 한번 변변하게 모시지 못했었잖아요.

오후에 이 분은 지방에 중요한 거래가 있다면서 일단 돌아갔다가 형님 발인 날 새벽같이 수원의 연화장으로 다시 왔더군요. 중요한 것은 이 분 다녀 간 후 아남산업의 형님 선후배들이 줄을 이어 사흘 내내 조문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통념 상 정승집의 개가 죽으면 조문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아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조문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죽은 자에 대한 조문은 당사자 외에는 인사할 곳이 없는 탓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형님의 경우는 우리 사회의 통념을 완전히 깨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문 온 분들이 한 결 같이 형님이 아남산업 계실 때 선후배 사이의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솔선수범해서 해결하신 훌륭한 분이었다고 애도해서 제가 형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하는 생각에 비로소 형님 앞에 부끄러워졌습니다!

막내와 난 그동안 집안일에 너무 나약한 형님 모습만을 보아오고 늘 형님을 불편하게 해 왔었지요. 우리말에 형만 한 동생 없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이겠습니다.
형님, 제가 만일 오늘 당장 죽는다 해도 제 선후배들이 제 빈소에 과연 몇 명이나 올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손꼽을 숫자에 불과하겠지요.
형님은 이렇게 가셨지만 형님을 찾아 준 형님의 선후배 분들 때문에 마음 한구석으로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네요.

형님 장례 바로 전날 사촌들이 한꺼번에 조문을 왔지요. 와서 어떤 얘기를 할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사촌들은 이렇다 할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촌 형수가 두 가지 중요한 말을 해왔습니다.
하나는 형님께 조문을 마치자마자 절 보고 한다는 얘기가 '아이고 이제 제일 큰 어른이 되셨네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잔뜩 독이 올라있던 터라 이 말을 맞받아서 '네 제가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그랬지요. 형님이 선영에 가시지 못했으니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이장하여 묘지에 관한한 사촌들과는 결별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심의 일단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들 땅이라고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 그 땅에 모셔진 조상들도 자기들이 알아서 모시라고 할 수 밖에요.

사촌 형수의 두 번째 얘기는 형님 영정 앞에 앉아있는 제 옆에 다가와서 건네 온 것이었습니다. 다른 얘긴 없었고 딱 한마디였는데 '난 귀가 어두워서 누가 얘기를 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사촌 형수님의 건강에 관한 사실을 진솔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얘기한 것이라고 믿고 싶군요. 아시다시피 사촌 형수의 귀가 어두운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번 형님의 묘지 결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다는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황 상 사촌 형수가 형님 장지에 관한 의사결정에 간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니까요. 사실 변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누가 이런 주장을 했을지는 짐작이 가는 일이고 정서 형님만 살아계셨어도 사촌지간에 묘지를 놓고 이런 식의 몰상식한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사촌 형수가 정말 변명으로 이런 얘기를 형님 영정 앞에서 했다고 상정을 하면 정말 나쁜 분이구나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형님 묘지 결정에 관해서 저는 그 결정에 간여한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구나, 나이 값도 못 하는구나 이런 생각은 했어도 나쁜 사람들이다 라는 생각은 안했었지요. 그러나 사촌 형수가 만에 하나 변명으로 제게 다가와서 그런 얘기를 우정 한 것이라면 정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건 저 혼자만의 오해일 것이라는 바람을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는 게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정월 초하루에 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에 형님의 장례는 결과적으로 6일장으로 모셔졌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다녀갔습니다. 그리고는 논란과 아쉬움 속에서 형님을 시골의 선영에 모시지 못하고 결국 수원의 연화장에서 화장해드린 다음 같은 장소의 납골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 많은 장례와 화장을 지켜보아 왔지만 형님을 화장해 드리고 또 같은 장소의 납골원에 모시면서 돌아가신 분들의 시신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화장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절실히 느꼈네요.
그동안 내 시신을 어찌할까를 놓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형님 장례를 계기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깔끔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차제에 묘지에 관한 모든 논란을 잠재우고 죽음 이후의 모든 미련들도 정리하는 게 좋겠다는 확신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마침 연화장까지 와있던 사촌들과 당질에게 가족 산소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를 따로 개장하여 화장하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이런 나의 갑작스런 말에 사촌들이 놀라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더군요.

이로서 사촌들과 묘지와 관련된 어리석음을 한꺼번에 정리하게 되었지요. 한 번 결심을 하고 나니 개장과 화장을 미룰 이유가 없어 한식을 택해 개장을 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이장과 화장을 하기에는 한식 전후가 너무 바쁘다고 해서 지난 3월 20일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개장한 후 화장하여 괴산의 저의 땅에 자연장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사촌 형수 주도로 조성한 시골의 산소에서 아버지 어머니 묘소만을 따로 개장하면서 만감이 교차해왔습니다.
형님 아시다시피 시골의 산소는 전망이 툭 트이고 따뜻한 남향의 장소라 누가 보아도 명당인 곳이지요. 그러나 명당이라는 의미는 솔직히 산자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실제로 아버지 어머니 묘소를 개장하고 보니 지나치게 깊게 모셔져 있는데다가 석회 등으로 견고하게 밀봉되어 있어 갑갑하게 안장되어 있더군요. 이 답답함에서 아버지 어머니 유골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고나니 제 마음의 응어리가 다 없어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더욱이 잔디로 잘 조성된 묘소의 따뜻한 겉모습과는 달리 묘지 안의 흙은 습기가 가시지 않은 채여서 유골을 수습해 화장해드리기를 정말 잘 했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다가 앞으로 그 넓은 산소를 누가 관리해 나가겠어요, 기껏해야 용환이 세대까지 일 텐데 제 생전에 저의 주도로 이 모든 일들과 갈등을 후대까지 미루지 않고 깔끔하게 정리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정리하자 큰 누님은 몹시 아쉬워 하셨고 작은 누님은 형님이 돌아가시면서 이 모든 일을 정리하고 가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로서는 사촌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은 물론 조카들과의 미래도 모두 정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장을 마치자 형님 아들, 용환이가 그랬습니다.
삼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세대는 묘지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형님 장례와 아버지 어머니 이장까지를 고맙게도 모두 지켜준 불알친구 근무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 문화와 관습에 맞지 않는다며 이런 저런 고마운 잔소리를 해주었었지요.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마친 며칠 후에 고맙다는 전화를 했더니 뜻밖의 말을 건네 왔습니다.
'이번 일로 친구에게 한 수 배웠네. 우리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앞으로 누가 우리 묘소를 관리하겠나.'

형님,

우리 속담에 청명에 죽으나 곡우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요. 삶은 유한한 것이어서 어차피 한번은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니 긴 세월에서 보면 일이십년 먼저 가나 후에 가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겠지요. 특히나 내 몸도 가눌 수 없는 상항에서 무의미하게 생명이나 연명해 가는 경우는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남은 사람에게는 모든 죽음이 아쉬운 것일 것이나 세월 지나면서 이 또한 잊혀지는 게 현실이지요.

형님,

남들 보다 다소 일찍 가셔서 남은 사람들이 많이 아쉬워하고 있지만 남은 사람들 또한 곧 형님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산 자들의 숙명입니다.

지금 형님께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계시던 지난 일 모두 내려놓으셨으니 평안하게 지내세요.

2015년 3월 29일

동생 의서 올림
전체 1

  • 2023-02-18 21:45

    나의상태^^! 형님,

    금방이라도 뭐라고 하시면서 옆으로 오실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세상 버리셨다는 게 도저히 현실같지 않아서요..... 15-07-18 0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