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aka & Lankawi 에서 겨울나기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1:45
조회
93
쿠알라룸푸르의 저가 항공전용 터미널이 인천공항 수준으로 새롭게 건축된 모습이 경이롭다. 건물 규모도 어마어마하거니와 말라카를 경유하여 싱가포르까지 가는 버스를 터미널 건물 안에서 타게 한 것도 큰 발전이다. 불과 몇 해 전에 쿠알라룸푸르의 저가 항공 전용 터미널에 처음 내렸을 때만해도 시골스러운 풍경이 물씬 풍겨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지구촌의 모든 공항들이 인천 공항의 시설과 서비스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다. 일등을 유지한다는 건 그만큼 늘 긴장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항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말라카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그치질 않는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라카까지의 도로도 몇 해 전에 비해 훨씬 더 정비되고 풍요로운 모습이다. 변화된 건 없는데 그냥 느낌만 그런 것일까?

말레이시아 전역에 끝없이 펼쳐진 팜트리는 고무나무와 함께 말레이시아의 부를 상징한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팜트리의 짙푸름은 말레이시아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숨쉬기도 좋고 느낌도 아주 좋다.

두 시간 여 만에 말라카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후 택시를 20 링깃에 흥정하여 예약한 호텔에 도착해 보니 호텔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2층에만 있는데다가 주변도 시골스러워 다소 실망이다. 그러나 객실에 들어와 보니 가격 대비 훌륭한 모습인데다가 이후 이 호텔 종업원들의 서비스가 매우 만족스럽게 진행되어 왜 이 호텔의 열두 개 객실이 늘 만실인지를 실감나게 해준다. 위치도 언뜻 보기에 외곽인 것 같지만 말라카의 메인 스트리트인 종커스 거리의 끝자락이고 운하와도 한 불럭 떨어져 있는 탁월한 곳이다.

호텔 객실에 짐을 풀고 나니 날이 어둑어둑 해져 있고 배도 고프다. 막 도착한 우리를 배려해 호텔 종업원 메이가 우리 부부를 차에 태워 호텔 인근 식당으로 안내했지만 우리가 원하던 쌀국수 집은 준비한 음식이 다 떨어 졌다며 문을 닫겠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좀 더 멀리 운전해 가니 열린 식당이 한 곳 있어 쌀국수로 간단히 저녁을 때운다. 저녁 식사 후는 걸어야 했는데 호텔로 돌아가는 길을 잘 몰라서 물어물어 겨우 호텔에 찾아들어왔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말라카 종커 스트리트의 야시장은 불야성이라고 했다. 피곤에 절어 도착 이튿날 저녁인 금요일은 호텔에서 쉰 후 토요일 저녁 야시장을 찾았다. 야시장이 열린 종커스트리트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대부분의 야시장이 음식 위주인데 비해 종커 스트리의 야시장은 만물시장이다. 우리의 인사동도 주말에 한해 종커스트리트와 같은 야시장을 연출한다면 서울의 매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을까? 온갖 음식과 볼거리가 넘쳐나는 종커 스트리트 야시장의 길거리에서 크레페, 꼬치 등을 사먹어 본다.

그러나 야시장 음식으로는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피하기도 할 겸 마눌과 나는 길거리의 한 중국식당으로 들어선다. 안전을 걱정하는 마눌에게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착하다고 누누이 강조 했었건만 이날 저녁 이 중국식당에서 사기를 당했다. 메뉴에서 10링깃, 8링깃, 1링깃 짜리 메뉴 세 접시를 시켰는데 식사 후 여자 종업원이 32 링깃의 청구서를 가져왔다. 계산이 맞지 않으니 주문 당시의 메뉴를 다시 가져오라고 하니 메뉴를 찾는 시늉만하며 우왕좌왕한다. 그러더니 이번엔 매니저인지 주인인지 하는 젊은 친구가 같은 금액의 청구서를 다시 가져온다. 이번에도 재차 당초의 메뉴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마지못해 원래의 메뉴를 가져오면서 실수했으니 미안하단다. 나는 경찰을 부르라고 언성을 높였지만 마눌이 옆에서 말려 그냥 19 링깃을 계산하고 일어선다.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이런 일은 늘 겪게 마련이고 세월이 지나면 이런 에피소드만 추억으로 남게 마련이다.

말라카에서는 조금만 신경 쓰면 매우 경제적으로 여행할 수 있다. 대부분 식당의 음식과 가게의 물건들이 우리의 그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싸기 때문이다. 일인당 우리 돈 2~3천이면 매끼 쌀국수와 딤섬 등으로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주말 내내 말라카를 비웠다던 레지나가 일요일 오후에 연락을 해왔다. 이번엔 신랑 테오와  함께 호텔로 운전해왔는데 테오의 인상이 매우 좋아 보인다. 레지나는 3년 전 내가 말라카를 처음 찾았을 때 당시 말라카에 거주하던 지인 우 유진의 소개로 인연이 된 후 지금까지 페이스북을 통해 알고 지내는 사이다. 호텔을 같이 나선 레지나 부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아들과 딸을 픽업해 집 근처 말라카 교외의 생선 전문 중국집으로 간다. 이 집의 메뉴는 양념이 잘 되어 있고 크리스피해 우리 입맛에 딱 맞는 곳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조차 두 시간 여의 운전으로 이 집을 찾아와 식사를 할 만큼 유명한 곳이란다.

모처럼 대접을 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레지나 부부가 이튿날 또 호텔로 오겠단다. 과공은 비례라는 말이 이런 경우에 딱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우리는 그냥 자유롭고 싶을 뿐인데....

이튿날 오전 한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중국 명나라 시대의 대 항해가인 정화를 기념하는 박물관에 들렀다. 말라카의 명소인 성바울 성당 언덕 근처의 공립 정화기념관이 레노베이션을 위해 문이 닫혀 있어 매우 아쉽던 차에 반갑기 그지없다. 3년 전 말라카에 처음 들렀을 때 정화기념관을 둘러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정화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을 때라 전혀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몇 년간 학생들과 기행문학 세미나를 같이 공부한 탓으로 정화의 항로의 유적을 말라카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이 수집해서 모았다는 정화기념관의 소장품은 그 규모와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28,000명의 함대, 선실과 선실 객실의 모습을 옛날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그 당시 이미 2층 침대를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선실의 이발소 의자도 전시되어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인상적이다.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 간 나침반 과학들이 그 당시의 도자기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는 모습 역시 매우 흥미롭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정화가 신격화 되고 있다고 했다. 정화가 나타날 때 마치 부처님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란다. 말레이반도의 화교들도 모두 정화의 후예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들 모두 정화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14세기 명나라 초의 목조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고 있는 박물관을 다 돌아 본 후 관련 책자와 CD를 구입했다. 새 학기 개설 과목인 기행문학 세미나를 위해 매우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정화 박물관 관람 도중 한 무리의 젊은 한국 학생들과 마주쳤는데 대구의 영진전문대생들이라고 했다. 유아교육 전공 학생들이 인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여행 중이라고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방학을 잘 활용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3년 전과 크게 달라진 말라카의 모습은 역사유적 중심 지구를 약간 벗어난 성바울 성당 언덕 남쪽에 대규모 쇼핑몰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커다란 규모의 건물을 이어 지은 쇼핑몰에는 온갖 브랜드의 고급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이 도시의 부를 짐작케 한다. 온갖 브랜드의 고급스러운 부티크들 사이로 풍요롭게 보이는 새로운 세대들의 인파가 물밀 듯 하다. 그렇지만 이런 인파는 주말 오후뿐이어서 실제로는 말라카의 소비와 수요가 넉넉지 않아 물건들이 70%까지 할인되어 팔리고 있다. 마눌과 나는 유명 브랜드의 여름용 티셔츠와 손주들에게 선물할 옷가지 몇 점을 아주 싼값에 구입했다.

쇼핑몰 안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우릴 즐겁게 했는데 그 중에 특히 공화당이라는 일종 한약방에서 판매하고 있는 거북 뼈에서 추출했다는 젤리와 탕 전문 식당인 탕사부의 오골계탕은 백미였다. 말라카 시내에는 3대가 같이 운영하는 죽 집, 백여 년을 운영하고 있는 딤섬 집, 특이한 레시피의 해장국집 등 호텔에서 걸어 10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먹거리가 널려 있는 곳이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하루 종일 영업을 하는 게 아니라 식당 마다 아침 시간, 오전, 점심시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문을 연다는 것이다.

당초 내가 처음 말라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 유진 때문이었다. 우 유진은 고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재직하다가 미술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우리대학에서 art tourism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박사학위 강의와 유진의 박사 학위 논문심사를 맡게 된 때문이다.

3년 전 겨울 우 유진의 초대로 처음 말라카에 왔을 때 말라카에 관해 매우 특이한 인상을 받았었다. 날씨도 좋았지만 말라카의 고풍스러움과 예술적인 모습 그리고 조용하고 단순한 삶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이었다.

그러나 1주일여를 우 유진의 민박에 머무르면서 우 유진의 곤궁한 삶과 함께 그의 이웃들도 함께 알게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레지나와 임 화백이다. 특히 임 화백과 우 유진은 돌아온 싱글의 같은 입장으로서 서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같이 자주 어울리는 모습이 좋아보였었다. 식사도 함께 다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돕고 의지하는 모습이라 언젠가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간 후 결합을 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했었다.

한번은 우 유진에게서 말라카까지 와서 살게 된 경위에 관해 얘길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떤 멋쟁이 백구두 남자를 좋아했었는데 그 사람을 따라 말라카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아파트 등을 정리 한 많은 돈을 환전해서 이곳에 같이 왔었는데 1년도 채 안되어 모두 털린 채 빈털터리가 되고 그 남자는 떠나갔다고 했다.

이번에 레지나에게 얘기를 들으니 임 화백이 이런 우 유진의 모습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봤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 화백이 우 유진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임 화백이 정말 우 유진을 좋아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어려운 입장의 우 유진을 돕기 위해 우 유진의 그림을 비싸게 쳐서 몇 점씩 사주었는데 그때마다 우 유진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여행 다니면서 그 돈을 모두 탕진하곤 했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레지나가 두 사람을 연결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사였는데 어느 날 삶이 많이 어려워진 우 유진이 다짜고짜로 임 화백을 찾아가 결혼을 구걸했었다고 한다. 깜짝 놀란 임 화백이 거절을 하자 우 유진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레지나에게 돌아왔었다고 했다.

이번에 말라카에 돌아와 보니 우 유진은 지난 7월 말라카 생활을 모두 접고 서울로 철수했다고 했고 임 화백은 잠시 여행 중인지 가게의 철창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잘 될 수도 있는 사이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우 유빈의 지나친 욕심 때문에 파탄이 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남녀 관계를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잘 해주어도 끌리는 남자나 여자는 따로 있는 법이니.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수확은 작은 규모의 호텔들이 영업을 잘 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말라카의 호텔 ‘홍’도 객실 열두 개의 작은 호텔이고 쿠알라룸푸르의 ‘야드 부티크’ 호텔 역시 객실 열두 개의 작은 호텔이지만 나름의 독특한 시설과 서비스로 승부를 걸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들 호텔의 또 다른 특징은 성수기와 비수기의 극심한 수요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적은 규모의 객실만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심한 경쟁에서 잘 살아남고 있는 비즈니즈들은 나름의 이유를 다 가지고 있다. 특히 ‘야드 부티크’ 호텔은 쿠알라룸푸르의 도심 한 복판의 허름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만실이 되고 있어 그 운영 방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작고 조용한 역사와 전통의 도시 말라카 도심을 차를 타고 벗어나면 팜오일과 고무나무 비즈니스로 돈을 번 교외의 신흥 부자들의 대궐 같은 집들이 즐비하다. 겨울이 없어 난방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집을 맘껏 크게도 지어 놓았다.

도심의 식당에는 세대 구별 없이 가족이 어울려 평화롭게 담소하는 모습의 식탁 문화가 참으로 따뜻해 보인다. 그래. 사람 사는 모습이 이래야지. 화교들은 자기들끼리 그리고 가족들끼리 뭉쳐 지내면서 이국에서의 서러움을 달래고 있는 건 아닌지.
화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 한결같다. 모두 이들을 향한 피해의식이 만만치 않다. 말레이시아에서 정권과 재산권에서 밀려 있다는 피해의식이다.

말라카 해변가에는 포츠기스 세틀먼트가 있다. 이들은 주로 피싱으로 연명하기 때문에 마치 인도사람들처럼 새까맣다. 어부로 생계를 이어가는 외에 말라카 도심에서 관광객들을 위한 인력거도 이들이 독점적으로 운영한단다. 인도사람 얘기가 나오니 말레이시아에는 인도 이주민이 말레이, 화교에 이어 제3의 종족을 이루고 있다. 인도사람들의 신용이 땅에 떨어져 있어 인도인과의 비즈니스는 절대 금물이라고 한다.

말레이 화교들의 고민/자식들의 미래
성요한 성당과 성바울 성당 언덕/모든 종교 시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명당이다.

암에 좋다는 그라비올라가 언론을 타면서 여행 중의 마눌이 바빠졌다. 절친의 남편이 암과 싸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전 본적이 없는 그라비올라를 아무리 더운 나라에 왔다고 한들 어디서 찾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다행이도 우리 얘기를 귀동냥한 레지나 부부가 적극적으로 수소문한 끝에 자기 어머니집 정원수로 그라비올라가 크게 자라고 있다며 우리 일처럼 좋아한다. 과일의 왕이라는 두리안(벨란디아두리안)은 잘 보이지도 않거니와 어쩌다 보여도 매우 비싸다. 제철이 아닌 때문이란다. 두리안을 잘 먹으려면 6월  경이어야 하고 그 종류도 많아 좋은 종자를 골라 먹어야 한단다.

네이버에서 남미종단 잉카 트레킹을 검색해보니 놀랍게도 악풀이 달려있다. 놀라서 출판사의 신사장에게 연락을 했더니 자신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의 댓글인 것 같다는 답이 왔다. 그래서 본인도 삭제 요청을 할 테니 저자도 삭제 요청을 같이 해달란다. 악풀도 의견이다 싶어 내키진 않았지만 출판사의 입장을 고려해 삭제 요청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며칠 후 같은 ID의 네티즌이 유사한 내용의 댓글을 또 다시 올린 것이다. 이번 역시 댓글에 정면 대응하는 답글을 달았지만 신사장의 요청에 의해 또 다시 삭제 요청을 해 삭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네티즌은 세 번째로 유사한 글을 또 올렸다. 이번엔 신사장만 삭제 요청을 하고 대신 관할 경찰서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정식으로 신청하였단다.

여행 중에는 서울 소식이 궁금하고 그립기도 한 법이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노트북으로 웨서핑을 하게 된다. 오늘도 웹서핑하던 차에 조선일보의 이혼 부부 재결합에 관한 기사와 그 댓글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여자가 바람피워 이혼한 커플인데 청소기 돌리는 여자의 엉덩이만 봐도 같이 놀아난 사내 생각이 나서 견디기 어렵다는 기사에 대한 다양한 댓글이 찬반양론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모습이다. 호주의 어느 학자가 밝힌 연구결과대로 바람 피는 사람들은 특별한 DNA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즘 여행 중에 한국 여행자들을 만나는 일은 더 이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번 여행 중에도 방학을 이용해 단둘이 여행에 나선 젊은 교사 부부와 50대 후반의 교사 부부, 주말을 이용해 이곳까지 왔다는 금까기 부부 그리고 거의 무전으로 1년째 여행 중이라는 여대생 박소연양 등을 만났다. 말라카 버스 터미널에서 처음 조우한 박 소연 양을 중국 여자 아이로 오인하고 서로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으나 같은 버스를 타고 쿠알라룸푸르의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려고 KFC에 들렀었다. 뒤늦게 이 식당에 들어온 박 소연 양을 다시 만나 한국 학생임을 확인하고 서로 반가워했다. 인하대 역사학과 3학년을 마친 박 소연양은 1년째 중앙아시아지역을 집중적으로 여행 중에 있단다. 주로 코치 서핑 등을 이용해서 거의 무전여행 수준의 여행이라니 참으로 담대한 아가씨다. 마침 지니고 있던 남미 종단 트레킹 여행기를 한 권 전해 주니 감격해 한다. 어디 그뿐이랴 먹다 남은 치킨과 과일 등의 음식을 주저하며 건넸더니 오히려 고마워한다. 이런 식으로 여행을 다니고 있으니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 여대생이다.

버스터미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브티크야드호텔에 도작하니 도심 한 복판의 허름한 뒷골목에 위치한 호텔은 그야말로 브티크처럼 아름답게도 디자인해 놓았다. 호텔 예약 전문 사이트의 좋은 평가를 따라 호텔을 예약하니 모두 만족스럽다. 이 호텔도 객실이 열두어개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호텔이라 늘 만실이란다. 정원 역시 아름답게 디자인 되어 있어 가끔 이 곳에서 결혼식과 피로연이 같이 열린단다.

호텔의 바로 뒷길은 먹거리 골목으로 길거리에서 온갖 음식을 팔고 있어 관광객들이 들끓고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식당들이 손님이 많아 한가한 베트남 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 종업원들이 우리를 보고도 무관심하다. 역시 손님 많은 곳은 많은대로 적은 곳은 적은대로 그 이유를 가지고 있는 법이다. 더욱이 이 식당의 주방을 가로지르는 큰 쥐를 보고 마눌이 기겁을 한다. 깔끔한 고양이 한 마리만 키워도 이런 일은 없을 터인데....
이 베트남 식당에서 댕기지 않는 맥주를 억지로 한 잔 했더니 이후 장이 다시 안 좋아 지면서 피똥이 다시 흐르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각각 1박씩 만 머문 쿠알라푸르와 이포에서는 버스터미널 스토리지에 큰 가방 두 개를 맡기고 단촐하게 움직이니 편하다. 그러나 쿠알라룸푸르 버스터미널의 버스 스케줄과 터미널 소재지 그리고 완행/급행 등의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해 많은 불편을 겪는다. 터미널에서는 버스의 진행 방향을 고성으로 알리면서 티켓 구매를 유도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난무하고 있었는데 마치 우리나라 60년대 의 버스 차장의 외침이나 남대문 시장의 호객 행위를 상기시키는 모습이다.

특정 버스 회사의 티켓을 구매했지만 엉뚱한 버스 회사 버스로 안내되기도 하는 것을 보니 확인해 보아야 하겠지만 말레이시아의 버스 운영은 우리의 패키지여행처럼 다수의 버스 회사가 콘소시움으로 운영하는 시스템이 아닌 가 싶다.
말레이 사람들은 기다림에 익숙해 있는 것 같다. 버스 노선이 갑자기 바뀌거나 연발이 되더라도 화를 내거나 어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더운 날씨 탓인가?

예정 시간을 훨씬 넘겨 쿠알라룸푸를 출발한 완행버스는 이포의 외곽지역인 아만자야 터미널에 도착했다. 시내까지는 한 시간여가 소요된다고 해서 버스터미널의 스토리지에 큰 짐을 맡긴다. 그런데 우리 부부를 한국 사람으로 알아 본 스토리지의 인도계 소녀가 한국 부채가 갖고 싶단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전달해주고 싶을 만큼 간절한 소망이다. 이 모두가 우리 드라마와 영화 탓인 게다.
시내버스로 한 시간여를 가니 이포 시내 한 복판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다. 이런! 버스가 완행인지 급행인지도 정확히 안내가 되지 않고 도시의 버스 터미널 위치에 관한 정확한 정보도 없이 다니고 있구나!

예약해 놓은 프렌치 호텔에 체크인 해서 노트북을 켜니 모니터의 액정 화면이 어른거리는 모습으로 부팅이 된다. 화면이 고장난 것이다. 아이쿠 이거 큰일 낫는 걸! 학교와의 업무처리를 어찌해야 하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람이 아닌 노트북이 대신 탈이 나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위안을 삼아본다.

늘 리조트 스타일의 숙소에서만 머물다가 이번 말레이시아 여행 중 처음으로 도시 형 호텔에 투숙한 탓인지 쾌적한 분위기의 호텔이다. 그래서 모처럼 쾌적한 체류다.
짐을 푼 후 호텔의 추천으로 희열/DELIJHT FOOD이라는 해물 전문 중국식당에서 좋은 음식을 싼값에 즐겼다. 그러나 이 식당의 거대한 룸에서도 큰 쥐들이 왔다 갔다 해 마눌이 기겁을 한다.
어쨌거나 근사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호텔 돌아오는 길에 모처럼 발마사지 집에 들러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어낸다.
호텔에 돌아오니 프런트 아가씨가 이포에서 며칠이나 묵느냐고 물어온다. 하룻밤이라고 했더니 이포는 동굴사찰과 노천온천이 유명한데 그냥 가게 되어 안타깝단다.

이튿날 아침에도 호텔의 추천으로 홍콩 식 딤섬 집에서 훌륭한 식사를 즐긴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후 형편없는 시내버스를 타고 아만자야 터미널로 다시 간다. 60년대의 우리 모습처럼 버스 안에는 차장이 따로 있어 티켓을 판매하고 있다. 버스기사는 한 무더기의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진행방향을 물어보더니 버스에 태운다. 요금 징수 시스템이 우리의 그것과 같이 디지털화 되어있지 않으니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 정겹다.

이포에서 피냉으로 향하는 도로는 카메룬 하이랜드 지역으로 험한 산악지대와 시멘트 공장 채석장이 드문드문 보인다. 궁기가 보이지 않는 들판과 도로 표지판으로만 보아서는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을 여행하는 느낌이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거나 도로에서 멀리 보이는 고압선은 그 나라 국부의 상징이다. 말레이시아의 고압선도 파워풀하다. 그러나 지난 달 헤집고 갔다는 홍수가 들판과 계곡의 여기저기에 상처를 남겨 놓고 있다.

피냉에서는 남경호텔에 투숙했는데 고관대작의 집을 개조해서 만든 호텔로 품위와 격조가 느껴지는 호텔이다. 하늘이 뚫린 중정과 계단 그리고 고풍스러운 창문들이 인상적인 호텔인데  택시에서 짐을 내려 체크인도 하기 전에 시원한 쥬스와 커피를 대접해오니 기분이 좋아 진다. 위치도 조지타운 입구라서 매우 편리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나이 지긋한 캐나다 부부를 만났는데 말끔하게 차려입은 복장과 부부 간의 금슬이 느껴지는 동행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록 더운 나라에서 캐주얼하게 다니는 여행 일망정 늙어갈수록 깨끗하게 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캐주얼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워 졌다.

이날 저녁 피냉의 골목길을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이탈리아 식당에서 해물 스파게티와 생선 필레를 시켜 모처럼 와인까지 곁들여 우아한 식사를 했다. 이탈리아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이 늘 그렇듯이 주방의 이탈리아인 세프가 홀까지 나와 인사를 해 모처럼 어거지 이탈리아어를 구사하면서 모처럼 한바탕 웃어 본다. 오랜만에 잘 먹긴 했으나 현지 음식에 비해 턱없이 비싼 값을 지불한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이탈리아 음식에 비교하면 싼 편이지만 그 사이 이곳 물가에 적응이 되어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이곳 말레이시아 와서 비싼 값을 지불한 식사는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비싼 값을 지불했으면 맛이나 분위기라도 끝내 줘야 하는데 인지부조화만 겪게 할 뿐이다.
말레이시아 여행 중 처음으로 와인 한 잔을 걸쳐 호텔로 돌아와 그냥 쓰러진다.ㅓ

피냉의 식당은 지저분하고 식당 주변의 하수구 여기저기에서는 냄새가 진동한다. 주요 도로에는 횡단보도도 없고 자동차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과 불 연소 냄새 때문에 사람들은 코를 막고 다니고 있다. 이 모든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수백만의 관광자들이 페냉에 쇄도해 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냉에서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분석해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관광객이 많고 이에 따라 다양한 숙박업소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에 비하면 런드로매트가 잘 보이질 않는다. 어쩌다 겨우 발견한 뒷골목의 런드로매트에서 그 동안 밀린 빨래를 시도하였지만 동전 교환이 되지 않아 불편을 겪었다.

오늘은 고풍스러운 남경호텔에서 누르딘 뮤호텔로 짐을 옮겼다. 수영장이 딸려 있고 객실도 넓고 쾌적해서 쉬어가기에는 그만인 호텔이다. 마눌은 호텔예약 전문 사이트 아고다에서 소비자들의 평가가 좋은 호텔만을 예약했는데 묵은 호텔들이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누르딘 뮤호텔로 옮긴 후 노트북을 열어보니 졸업외국어 시험을 완화하겠다는 급한 메일이 도착해 있다. 외국어 시험 때문에 졸업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누적되면서 학교 평가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기 때문이다. 나름의 대안을 만들어 학과의 두 젊은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으나 학교의 급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는 짓이 정말 본대가 없는 젊은이들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내가 뿌린 씨는 결국 내라 거두어야 하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공존하는 법이다. 해외여행 중인 학과장 보직의 나를 도와 업무 공백을 잘 메워주고 있는 교양학부의 강 교수가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다. 젊어서 일정 기간의 고생은 교수 생활과 인생에도 커다란 교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이번 여행 중 다양한 식당들을 경험하면서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의 종업원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께 느낀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호텔의 종업원들도 물론 마찬가지고. 길가다 우연히 이런 좋은 식당들을 만나면 큰 기쁨이다. 피냉 도심의 중국 과자 집이 그랬고 쌀국수 집이 그랬다. 그만큼 피냉에는 좋은 맛집들이 많다는 얘기다.

날씨 좋은 곳이라 휴양을 겸해 서양의 노부부들이 많이 눈에 띤다. 이들의 공통점은 젊은 모습으로 오래 산다는 것인데 이 분들의 공통된 모습은 스키니 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소식을 하며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 말레시아의 할머니들도 예외는 아니다. 할머니들의 식사는 담백한 쌀국수 한 그룻이 전부다. 그러나 이곳 할머니들의 모습 역시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는 매 한가지다.

팝온 팝오프 버스를 타고 피냉 교외의 국립공원 탐방에 나선다. 도심에서 아름다운 가니드라이브를 따라 국립공원에 이르니 해변과 연결된 트레일 트레킹코스가 나온다. 멍키 비치 등으로 유명한 국립공원인 데 정작 비치에는 멍키가 없었다. 멍키들에게 안정적인 터전을 보장하지 않는 사람들의 탓일 게다. 그러나 트레일 중간 중간 이구아나, 원숭이, 뱀들이 출몰하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원시를 간직하고 있고 비치 자체는 조용하고 아름답다.

피냉 방문자들은 조지타운을 한눈에 조망하기 위해 피냉 힐을 찾는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모한 모습이지만 원래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전원주택지 였다는데 지금도 전직 총리와 재벌의 별장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부자들은 있고 또 이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도 공존하고 있다.

한 손에 두 개를 같이 쥘 수는 없다. 이곳에서 태양을 마음껏 마주하며 지내니 건강은 많이 좋아진 느낌인데 서울에서의 이런저런 행사들을 많이 놓치게 된다. quello e la vita.

피냉 북부에 위치한 극락사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절의 규모도 그렇고 야외에 세워져 있는 관음보살상의 크기도 그렇다. 중국 본토와 서역까지 꽤 많은 중국의 불교 사찰들을 보아왔지만 그 규모만큼은 피냉의 극락사만한 사찰을 아직까지 본 적은 없을 정도다.

조지타운을 산책하다가 한 무리의 인파와 함께 도로상에서 음식을 나누고 있는 모습과 마주했다.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모양의 탈을 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같이 노닐고 북과 괭과리도 울려댄댜. 호기심에 이끌려 무리에 섞여 구경하고 있노라니 음식 접시를 들고 있는 현지인이 우릴 보고도 음식을 먹어보란다. 우리가 쭈빗쭈빗하고 있으니 공짜란다. 응! 공짜? 그렇다면.
그래서 이 곳 노상에서 공짜 음식을 두 차례나 가져다 먹는다. 물론 음료수와 과일까지도 공짜로 주어졌다. 공짜 음식을 주는 기관이 궁금해서 수소문했더니 인근의 도교사원이었다. 1년에 한 두 차례 이런 방식으로 주민들과 행인들을 위해 음식을 베푼단다. 그래. 종교란 원래 베푸는 것이지. 그렇지만 베품을 위해 누군가는 기부도 해야 하는 법이지. 그러니 누군가가 이렇게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도록 기부하며 살아가는 삶이 축복받은 인생이지.

아무리 시체놀이를 한다고 해도 마누라 외에 어울릴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마누라 얼굴만 쳐다보고 살 수도 없는 일이고 하루 왼종일 책만 쳐다보고 살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런 환경을 동경하면서도 쉽게 시도하지 못할 게다. 그러니 마음에 맞는 친구와 함께 하든가 아니면 무엇인가 소일거리를 준비해야 이곳에서의 은퇴게획이 마무리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한 겨울에 태양을 쫓아오는 일은 꼭 필요할 것 같지만 그 기간과 장소를 얼마동안 어디로 해야 할지가 문제로다.

중국 사람들은 지구촌 곳곳에 없는 곳이 없다. 이곳 말레이시아에는 특히 중국인들이 많이 거주해서 인구의 삼분지 일이 중국 화교들이다. 중국인들의 특징은 아직도 대가족 제도를 유지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 피냉의 한 딤섬집에서 손자가 지극 정성의 모습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와 식사를 대접하는 모습이 하도 좋아 보여 할머니가 미인이라고 추켜 주었더니 오히려 손자가 더 좋아한다. 이 식당에서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느 중국 식당에서 가도 삼대가 어울려 즐겁게 식사하는 모습이 자주 보여 인상적이다.

우리는 피한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고 앞으로 매년 겨울이면 유럽 사람들이 이곳에 매년 찾아오듯이 우리도 그럴 예정이다. 그러나 행복은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는 이곳 화교들의 패밀리 오리엔트 문화에서 찾게 되었다.

노년의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노년의 행복은 가족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데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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