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파이팅 남미 종단 트레킹 : '잉카에서 길을 찾다.' 2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19:41
조회
78
게이트를 옮겨 다닌다고 정신없다가 배가 고파와 공항 내에 있는 식당들을 둘러보니 샐러드 세트salad set가 15불, 버거킹 피쉬 버거 세트fish burger set가 10불이다. 공항이라 그런가, 아님 미국 물가가 이렇게 많이 올랐다는 말인가. 샐러드 세트로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다음 비행기들을 기다리기 위해 게이트를 또 다시 옮겨 다닌다. 그러나 저녁 9시 15분, 11시, 11시 30분 비행기 모두에 내 자린 결국 없었다.


공항 터미널에서 새우잠을 자다


3일차 : 12월 19일 로스앤젤리스Los Angels 공항 터미널


생전 처음으로 공항 터미널 바닥에서 새우잠을 잤다. 나 말고도 공항 바닥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 그나마 위안이다. 어떤 승객들은 가족 모두가 모포를 준비해와 잠을 자고 있어 놀라웠다. 공항 대기실 바닥에서 눈을 부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소란스러워 깨어보니 새벽 4시 반인데 벌써 손님들이 몰려들어오고 있다. 오늘 새벽엔 어떻게든지 자릴 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러나 일반 승객들의 보딩이 끝난 후 스탠바이 명단이 뜬 것을 보니 24명 중 내 우선순위는 22위다. 절망이다. 6시 마이애미 행 비행기 보딩이 끝났음을 알리는 탑승 게이트의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같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래도 8시와 9시 15분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았지만 모두 허사다. 그렇다고 하루나 이틀을 공항에서 더 기다린다고 해도 상황이 좋아질 것 같지가 않다. 그렇다면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 다른 항공권을 구입하는 방법,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 어떤 대안을 선택하든 이미 비행기 화물로 실려 간 가방의 소재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공항 CIQ 내 고객센터에 문의해보니 가방의 소재는 배기지 클레임baggage claim에 가봐야 알 수 있단다. 로스앤젤리스 공항 아메리칸 항공 터미널의 배기지 클레임 표지판을 쫒다보니 자연스럽게 공항 CIQ를 벗어나 배기지 클레임 구역으로 연결된다. 이제 다시 터미널 안으로 그냥 들어갈 수는 없다는 의미다. 배기지 클레임에서 짐을 확인해 보니 다행스럽게도 내 가방이 페루Peru의 리마Lima 공항에 도착해 있단다. 그렇다면 나의 대안은 어떻게 해서든지 항공권을 가격 불문 구입해서 리마에 도착하는 것이다. 서울의 아내에게 급하게 전화를 해 상황을 설명하고 인터넷을 통해 표를 구입하도록 부탁한다. 아내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라고 새벽 3시에 깨어나 전화를 받는단다. 그러나 어쩌란 말이냐. 나는 나대로 2번 터미널로 옮겨가 란칠레 항공Lan Chile Airlines 카운터에서 리마 행 항공권을 알아본다. 표가 없는 건 아닌데 비즈니스 클래스business class뿐이란다. 가격도 편도에 자그마치 4천불이나 되고. 하는 수 없이 터미널을 또 옮겨 아비앙카항공사Abianca Airlines의 항공권 사정을 알아보니 비즈니스 클래스조차 없단다. 란칠레 항공 카운터로 다시 돌아와 만일을 대비해서 비즈니스 항공권을 예약만 했다. 예약을 마치고 나니 마침 서울의 아내가 전화를 주었다. 다행히 1,600불대의 항공권을 인터넷에서 찾았는데 서울의 우리 카드로 결제가 되지 않아 부득이 로스앤젤리스의 자기 친구에게 결제를 부탁했단다. 으흠! 결국 로스앤젤리스의 마누라 친구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구나. 이번 여행에서 어느 누구의 신세도 지고 싶지 않았것만. 로스앤젤리스의 마누라 친구와 이래저래 전화를 해야 되는데 이번에는 핸드폰 배터리battery가 다 떨어져 간다. 충전기가 항공 수하물로 리마에 이미 실려가 있어 충전기를 사 보려고 터미널 안의 이 가게 저 가게를 전전해 보아도 우리 시스템system에 맞는 충전기를 구할 수 가 없다. 아니 한국과 미국이 이렇게 다른 것도 있었단 말인가! 문화적, 기술적으로 우리는 미국의 우산 속에 속해 있는 줄만 알았는데.


마지막 순간의 항공권은 그야말로 시시각각으로 상황이 변한다. 큰 딸이 인터넷으로 잠정 확보했던 1,600불대의 티켓은 순식간에 없어졌단다. 로스앤젤리스의 아내 친구 딸이 인터넷에서 보았던 1,900불대의 티켓도 우물쭈물 하는 사이 날아가 버리고. 전화로 연결되어 있는 아내 친구 딸은 - 이번에 캘리포니아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재원이다 -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4천불짜리 비즈니스 클래스를 당장 예약하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시간의 웹서핑web surfing만에 겨우 찾은 결과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래도 그 딸의 아빠는 헬렌Helen이라는 여행사 사장의 능력을 믿고 딸의 선택을 과감히 버리라고 한다. 어쨌거나 운 좋게도 여행사 사장 헬렌은 1,850불의 이코노미 티켓economy ticket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역시 여행사가 다르긴 다르구나. 판단 착오와 작은 이해에 얽매여 2,300불이면 남미까지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던 여정을 돈은 돈대로 날리고 고생은 몇 곱으로 부풀려서 한 꼴이 됐다.


미국의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항공권 사정이 우리나라의 추석과 설날의 귀성 전쟁과 흡사하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경험했다. 이 와중에 스탠바이 항공권으로 여행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너도 참 딱하다! 이번의 한 바탕 소란으로 예약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표가 있다면 그 길로 가는 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닐까. 표가 없어서 동동거려야 하는. 값비싼 경험이지만 어찌 보면 남은 삶에 대한 지침을 크게 깨닫게 해준 한바탕의 에피소드episode가 아닐 수 없다.


네트워크도 참 소중하다. 로스앤젤리스의 아내 친구 남편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아내 친구 남편 강 사장은 주말의 그 바쁜 와중에도 공항까지 직접 나와 주고, 된장찌개도 사주고, 자신이 운영하는 사우나에서 쉬게 해 준 것은 물론 잠까지 재워주고. 내 핸드폰 배터리 나간 것을 알고 사무실의 전화를 마음대로 쓰란다. 네트워크의 고마움이라니. 우리도 이처럼 베풀며 살아가야 할 텐데.


그러나 나중에 후문을 들으니 내가 이때 사용한 전화요금이 수백 달러에 달해 나를 위해 애써준 강 사장이 크게 당황해 했었단다. 전화 연결되는 김에 한국은 물론 남미 등에 전화를 해댔으니 오죽하랴!


강 사장이 운영하는 헬스에서 사우나와 휴식으로 피로를 푼 나는 한인 타운의 한 스시sushi집에서 회 한 접시를 놓고 모처럼 매실주와 따뜻한 사케sake 한 도쿠리를 시켜놓고 지난 몇 일간의 악몽을 씻어내는 여유를 부린다. 모든 일이 결국 감사하구나.


저녁에는 사우나 숙소로 돌아와 강 사장 사무실에서 아내와 행정과장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보직 발령에 따른 후속 조치들을 논의했다. 모처럼 강 사장 사무실의 노트북으로 e메일을 열어보니 학과장으로부터 커리큘럼curriculum 개정에 대한 동의 요청이 와있다. 그러나 열다섯 과목이나 되는 커리큘럼을 동시에 개정하자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교수의 이해만 반영한 모습으로 보여 내년에 새롭게 논의하자는 답 메일을 보낸 후 잠을 청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4일차 : 12월 20일


어제 저녁 10시 반쯤 사우나의 찜질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자정 12시 반이다. 냉수 한 잔을 챙겨 단 숨에 들이 키고 다시 잠을 청하자마자 이내 골아 떨어졌다. 잠결에 밖에서 누군가 문 여는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났는데 시계를 챙겨보니 아직 새벽 네 시 반밖에 되지 않은 시각이다. 찜질방의 더위 속에서 범벅이 된 땀을 닦아낸 후 휴게실로 나가 안락의자에서 잠을 청한다. 이내 잠에 떨어졌나 싶었는데 이번엔 진짜 인기척으로 깨어보니 찜질방 종업원이 날 깨운다. 아이쿠! 좀 일찍 일어나 샤워도 하고 여유 있게 공항으로 출발하려 했는데 오히려 깊은 새벽잠에 떨어져 아침 7시가 다 된 시간이다. 다행히 배낭을 새벽에 잠시 깨었을 때 챙겨 놓았기 때문에 허겁지겁 배낭만 찾아 걸머메고 총알같이 대기 중인 콜택시로 내달았다. 로스엔젤리스의 시원한 프리웨이free way를 타고 공항의 델타항공 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 20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체크인을 위한 대기선이 터미널 밖에까지 구불구불 장사진이다. 30여분 만에 겨우 체크인을 마쳤더니 이번엔 안전심사대 통과를 위해 30여분을 또 기다린다. 겨우 안전 검사를 마치고 게이트에 도착했더니 모든 승객들이 이미 보딩을 끝낸 탓으로 게이트가 텅 비어 있다. 그래도 보딩 전에 강 사장과 아내 친구, 정 여사에게 전화는 하고 가야할 것 같아 시간을 좀 줄 수 없겠냐고 했더니 항공사 직원이 빨리 탑승하라며 얼굴을 붉힌다.


델타항공은 예정시간을 조금 넘겨 아틀란타Atlanta공항에 착륙했다. 1,850불 - 그것도 편도 요금만으로 - 이나 지불한 비행기지만 아침 식사를 7불이나 주고 사먹어야 했다. 미국 비행기들이 왜 이리 인색해 졌단 말인가. 이런 서비스로는 아시아권 항공사들에 의해 따라 잡히는 게 시간문제이겠구나.


델타항공기가 아틀란타 공항에 예정보다 늦게 도착한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항공 일정상의 트랜지트transit 시간이 50분밖에 안되어 걱정이었는데 비행기를 갈아탈 수 있는 시간이 30여분 밖에 남지 않아 터미널 안을 전 속력으로 달린다. 아틀란타의 스키폴Schipole공항은 규모가 엄청나 콩코스concours와 콩코스를 모노레일mono rail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B 콩코스에서 E 콩코스까지 겨우겨우 이동해 E14 게이트에 도착하니 이게 웬일! 게이트가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내가 게이트를 잘 못 찾아왔나? 그리고 게이트가 웬 노스웨스트 항공Northwest Airlines? 순간 당황해서 멈칫했더니 미국인 항공사 직원이 일본말로 빨리 탑승하란다. 코드쉐어code share 항공이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동양 사람을 모두 일본 사람으로 오인한 탓으로 나는 졸지에 일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긴 여행 중에 불리한 일이 있을 때는 일본 사람 흉내를 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긴 했었지. 내가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비행기는 비로소 탑승구 문을 닫고 이륙 준비가 다 되었다는 기내 방송을 한다. 모든 승객들이 탑승을 마치고도 나를 기다리기 위해 게이트를 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우~. 이번 여행, 참 간단치가 않네. 어쨌거나 리마 행 델타 156편 항공기에 몸을 싣고 이렇게 오늘 일어난 일들을 비행기 안에서 정리하고 있어 다행이다. 모든 일이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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