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파이팅 남미 종단 트레킹 : '잉카에서 길을 찾다.' 4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19:40
조회
75
엎친 데 덮친 격인 협심증 환자의 고산증Altitude Sickness


7일차 : 12월 23일


시차 탓으로 여전히 아침마다 일찍 깨어나기 때문에 호텔 식당이 문을 여는 여섯 시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 도중에 랩탑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을 시도하였으나 연결되지 않는다. 호주에서 온 쌍둥이 자매 중 하나가 고산증Altitude Sickness에서 비롯된 현기증으로 쓰러져 어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는데 다른 쌍둥이 자매가 일찍 식당에 내려왔다. 환자에 대해 이런 저런 안부를 물어본다. 식사와 여행 일기 정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는데 일어나 보니 8시 반이다. 아이쿠! 아침 9시에 출발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나 다행히 늦지는 않아 전용버스를 타고 세이크리드 밸리Sacred Valley 투어를 떠난다.


중간에 친치엘로Cinciello라는 곳에 들렀는데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이곳에 1600년대에 지어졌다는 성당은 프레스코fresc화가 벽면과 천정에 그대로 남아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찰이나 성당은 마을이나 타운의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이 페루의 가톨릭 역시 민속 종교와 타협한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현지 종교와의 타협은 필수가 아니었을까.


이곳은 2,000 가지가 넘는 감자 농사를 짓고 있다고 한다. 마을이 모두 해발 3,000m 이상의 고지여서 감자 농사에 최적의 조건이란다. 언덕 아래 마을의 계곡valley은 감자 농사가 되지 않아 옥수수 농사만 짓는단다. 이곳 인근에는 소금 우물이 있어 소금이 주력 수출품이기도 하단다. 빙하기 이전의 그 옛날 이곳은 바다가 융기되어 생성된 땅이라는 얘기다.


친치엘로를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세이크리드 밸리에 도착했다. 잉카시절 제단을 쌓아 놓은 산과 계곡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잉카 건축의 경이는 몇 톤씩이나 되는 돌을 산위로 옮겨 놓은 기술과 몰타르mortar 없이 돌을 쌓은 솜씨다. 밸리 답사를 마치니 오후 2시다. 인근의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랐는데 어제와 마찬가지로 졸음이 쏟아져 온다. 천성적으로 잠이 많은 나는 졸음을 주체할 수 없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군에 입대해서 훈련 중에도 엉덩이만 땅에 닿으면 졸았을 정도다. 조앤과는 공교롭게도 사흘 째 옆자리에서 투어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매일 같이 조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환자인줄 알았단다. 시차가 주범인 이 졸음. 어찌하면 좋을 고!


일행은 중간에 마켓에 들러 잉카 트레일에 필요한 쇼핑을 했는데 나는 버스에 남아 잠을 잤다. 일행이 돌아와 깨워서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잠이 부족하다. 이렇게 쏟아지는 잠은 시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LA공항에서의 스탠바이, 3천 미터 이상의 고도, 협심증 등이 겹치면서 몇 년 전과 달리 체력이 많이 약해진 모습이다.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객실로 직행해서 침대에 눕는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는 것 같은데 침대에서 일어나지지가 않아 도루 잠에 떨어졌다. 얼마 후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려 바지를 주워 입고 문을 여니 가이드, 유리이다. 오늘 바네사 생일이라 케이크를 사다놓고 파티를 열 계획이란다. 쏘리sorry! 난 지금 졸려죽겠거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양해를 구하고 다시 잠에 빨려든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오후 아홉 시다. 오후 여섯 시 전에 호텔에 돌아왔을 테니 세 시간 가량 잠을 잔셈이다. 양치를 한 후 호텔 로비로 내려가 보니 아무도 보이질 않는다. 케이티Kati가 컴퓨터에 혼자 앉아 인터넷을 하고 있다. 별 일 없느냐고 궁금해 하니 모두 함께 저녁 먹고 돌아와 다들 객실로 돌아갔단다. 내일 아침에 여섯 시에 식사를 하고 여섯 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단다. 현지 여행사에서 등산용으로 제공한 더플 백duffle bag은 5kg이 넘지 않도록 꾸려야 한단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에 호텔의 리셉션 데스크에서 저울로 달아보기로 했으니 넘치게 꾸려서는 안 될 거란다. 우리와 동반할 포터들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사전 조치란다. 이 정도의 정보면 잠을 자면서 놓친 것은 없는 셈이다.


객실에 올라와 포터가 운반할 더플백과 내가 지고 갈 배낭을 챙겼다. 내일 휴게소 마켓에서 판초pancho, 모기약, 화장지, 물만 구입하면 3 박 4일 잉카 트레일을 위한 준비는 완료되는 셈이다. 다행히 여권 문제도 해결됐다고 유리가 알려주었고 체력과 건강만 허락해 주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후만 되면 계속 쏟아지는 잠과 약간의 몸살 기운, 그리고, 등반 초기의 숨 가쁨만 잘 관리하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가 될 3박4일의 잉카 트레일은 성공적일 것 같은 예감이다.


카미노 레알 트래킹Camino Real trekking


8일차 : 12월 24일


여섯 시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바로 호텔을 나선다. 시차가 아직도 적응되지 않아 새벽 두시에 깨어나서 짐을 챙기고 라면을 저녁 겸 아침으로 끓여 먹었다. 아침에 더플 백 무게를 5kg으로 제한해서 꾸리고 등산용 배낭도 챙겼다.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세이크리드 밸리 입구의 수퍼 마켓에서 쇼핑을 한다. 판초, 모기약, 쵸콜릿chocolate 등을 샀는데 화장지를 잊었다. 배낭에 랩탑 컴퓨터까지 챙긴 내 배낭이 일행 중 제일 크고 무거운 것 같다.


기차에서 내려 잉카 트레일을 시작하는 ‘Kilometre 82’ 입구에서 일행 모두 함께 모여 단체 사진을 촬영한다. 기념사진 촬영 후 바로 산행을 시작해 중간에서 차 한 잔 하기 위해 쉰 시간을 빼고는 점심이 준비되어 있는 캠프까지 간다. 포터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천막을 쳐놓고 테이블table과 스툴stool까지 준비해 놓았다. 또 다른 천막에서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포터들이 식당과 주방 텐트tent를 각각 따로 친 것이다. 점심은 캠프사이트camp site임에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차려져 나온다. 애피타이저appetizer, 메인 디쉬main dish와 디저트desert까지. 점심 후 약간의 시에스타siesta를 갖자고 해서 잔디 위에 잠시 누었는데 누가 흔들어 깨운다. 일어나 보니 대부분 산행을 시작 한 후라 일행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모습이다, 그래도 화장실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잠시 들렀다 나왔더니 그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이때부터 생겼다. 가슴은 뻐근해 오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고. 이러다 여기서 큰일당하는 건 아닌지. 겁이 덜컥 몰려온다. 당황스러움이 겹치면서 가슴이 더욱 뻐근해 오는 느낌이다. 심장 혈관 주치의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미여행을 강행하겠다고 했을 때 주치의가 응급처치 용 글리세린glycerin을 처방해 주었었다. 그동안 약을 휴대해 가지고 다니면서도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글리세린을 먹어보기로 한다. 그런데 글리세린을 목구멍에 넘기자마자 신통하게도 가슴의 통증이 사라진다. 아! 인정하기 싫어해 왔지만 나는 결국 환자로구나! 앞으로 이 험준한 산행 길을 3박 4일이나 더 가야 하는데 이 일을 어쩐다! 글리세린 투약 덕택에 산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나는 중간 휴식 장소에 제일 꼴찌로 도착했다. 일행 모두는 이런 나를 바라보며 근심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중간 휴식 장소에서 잠시 쉰 후 젖 먹은 힘을 다해 겨우겨우 저녁 캠프인 해발 3천 미터의 윤카침파Yuncachimpa에 도착했다. 오늘 트레킹은 비교적 쉬운 코스로서 걸어온 거리는 모두 13km이었는데 캠프 도착까지는 정말이지 젖 먹은 힘까지 다한 엄청나게 힘겨운 등반이었다. 2분 걷고 1분 쉬고를 반복하여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겨우 저녁 캠프에 도착한 것이다. 놀라운 건 캐나다에서 온 노인 요스Jooss - 나중에 알고 보니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이긴 했지만 – 는 뒤쳐진 일행을 도와주겠다며 저녁캠프에 자신의 짐을 풀어놓고 되돌아온 모습이다. 요스의 걸음걸이는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가벼운 모습이다. 자신은 어떤 험한 산행에도 힘들어 본 적이 없는 특이 체질이라면서 내게도 다가와 배낭을 들어주겠단다. 아무리 힘들지만 자존심이 있지! 나보다 뒤에 쳐진 여자 일행들도 모두 거절한 판인데 어찌 사나이인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저녁 캠프사이트 10여 미터를 앞두고 결국 포터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고산 트레킹의 고통은 해본 사람이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녁캠프에서도 점심과 마찬가지로 먼저 도착한 포터들이 천막을 쳐놓고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을 위해 차와 스낵snack을 제공했다. 해발 3천 미터 고산의 캠프 치고는 딜럭스deluxe 하다. 30분 후에는 정식 디너 코스dinner course로 식사를 했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디저트로 이어지는. 그러나 잠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와 밥도 먹을 수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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