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의 파이팅 남미 종단 트레킹 : '잉카에서 길을 찾다.' 6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19:39
조회
80
‘사라진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



11일차 : 12월 27일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얼떨결에 지나갔다. 4천 2백 고지를 넘을 때 메리앤이 ‘미저러블 크리스마스miserable Christmas’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서양 아이들한테 크리스마스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가 서양문화 아니던가. 그래서 로스앤젤리스에서 스탠바이 티켓으로 엄청나게 고생만 하고 비행기를 못 탔었지. 설과 추석에 겪는 우리 민족의 대이동 정도라고 얘기하면 좀 과장이겠지만 아무튼 대이동이었지.


그렇다면 이 서양친구들은 다 뭐란 말인가. 가족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를 마다하고 이곳에 몰려오다니. 그렇다. 가족이 없거나 결손 가정들이다.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자.


오늘은 새벽 4시부터 움직였다. 밤에는 개프, 이 친구가 코를 곤다고 ‘미스터 박! 턴 어라운드turn around’를 외쳐 대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지난밤까지만 해도 이 친구가 아무리 코를 골아도 깨우지 않았지만 나도 이 친구가 조금만 코를 골아도 깨운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제 플래쉬 라이트flash light를 놓아두고 내 것을 빌려달란다. 내 헤드라이트head light를 천정에 부쳐 놓고 일을 하잔다. 참으로 이기적인 녀석이다. 식사 때는 이것저것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 구차스럽기 조차하다.


잉카 트레일의 마지막 캠프 사이트에서 ‘사라진 도시’ 마추픽추Machu Picchu로 향하는 마지막 날 여정의 아침 일찍인데도 아름다운 구름들이 몰려와 있다. 그러나 구름이 끼어 있어 좋은 경치를 다 놓친다. 이래서 잉카 트레일은 겨울이어야 한다고 한다. 이제 한 시간 정도만 더 가면 마추픽추에 닿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예고된 대로 한 시간 만에 인티 푼쿠Inti Punku 일명 선 게이트Sun Gate에 도착했다. 마추픽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라고 하지만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마추픽추를 내려다보는 장관을 볼 수가 없다. 일행의 젊은 친구들한테 다시 와야 할 것 같다고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90년대 후반 금강산 관광이 우리에게 처음 열렸을 때 어렵사리 금강산에 갔더니 상팔담과 만물상 등이 안개에 가려 못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금강산 길 여기저기서 경비 보던 북한 사람들에게 덕이 없어 못보고 간다고 했더니 한 번 더 오라는 뜻이라고 유머러스하게 맞받아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곳 잉카 트레일에 또 온다는 것은 시간, 거리, 나이, 비용, 건강이 다 받쳐주어야 할 터이니 내겐 어려운 일일 터이다.


구름이 자욱한 마추픽추를 뒤로하고 선 게이트를 내려선다. 비록 잉카 트레일은 못했지만 마추픽추 푸에블로machu picchu pueblo 마을에서 거꾸로 올라온 사람들이 우리 일행과는 반대로 선 게이트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 이들이 선 게이트에 올라가 있을 때는 구름이 걷히려나? 마추픽추까지 내려와 국립공원 출구 밖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다시 입장하니 그제야 햇볕이 참 좋다. 비로소 마추픽추를 제대로 구경한다.


마추픽추 구경을 다 마치고 2천4백 고지에 있는 마추픽추를 뒤로하고 버스로 마추픽추 푸에블로로 내려온다. 한 식당에 배낭을 맡기고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의 온천hot spring으로 직행한다. 노천인 이 온천은 3박 4일의 피로를 풀기에는 최고의 입지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입장료 10솔sol에 짐 맡기는데 1솔sol로 비용도 저렴하다. 이런 온천이 인근에 있다는 것은 3박4일의 잉카 트레일의 피로를 씻어내기에는 최고의 보상인데도 온천은 나 혼자 만 다녀왔다. 서양 친구들은 온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온천을 즐기기에는 아직 젊은 게지. 어쨌거나 3박 4일의 잉카 트레일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시작할 때 걱정과는 달리 성취감으로 뿌듯하다. 이제 2시 25분 기차를 타고 쿠스코로 돌아가 오늘과 내일 잘 쉴 일만 남았다. 아! 기분이 참 좋구나!


쿠스코 행 기차를 탔다. 쿠스코에서 오는 기차는 매 한 시간 마다 운행되고 있어 잉카 트레일을 하지 않는 여행자들의 마추픽추 관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옆자리엔 변호사인 바네샤가 앉았다. 그래서 변호사가 된 얘기, 그리고 지금은 도시계획전문가로 일하는 얘기, 이 투어tour에 오기 전에 크루즈cruise로 남극을 여행한 얘기, 우크라이나Ukraine에서 호주로 이민 오게 된 얘기 등을 들었다. 남미를 5대양 6대주의 마지막 여행지로 알았더니 서양 사람들은 남극도 대륙으로 친단다. 그렇다면 5대양 6대주가 아니라 7대주인 셈이니 갈 곳이 하나 더 늘은 셈이다. 이 일행 중의 일부도 남극까지 간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의 우슈아이아Ushuaia에서 남극 여행을 시작한다는데 남극 대륙 여행을 위해 남미에 다시 한 번 와야 할 것 같다.


바네샤는 ‘82km 지점’에서 잉카트레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념으로 찍은 우리 일행 모두의 단체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온천 간 사이에 짐을 맡겨 두었던 식당에서 산 것이라고 했다. 잉카 트레일 시작 전에 기념사진 촬영 때 전문 사진사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이 좋아 나도 한 장 사고 싶어 가이드 유리에게 구입 가능성을 물었으나 이미 기차를 탄 상황이라 어찌할 수가 없다고. 대신 바네샤가 사진을 스캐닝scanning해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사진은 아직도 내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


마추픽추 푸에블로machu picchu pueblo에서 출발한 기차를 오리엔트밤바orient bamba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 후 쿠스코로 돌아온다. 마침 날씨가 좋아 돌아오는 길의 만년설로 뒤덮인 산들이 오늘은 선명하게 보인다. 신령스럽다. 그러나 피로와 고산증이 겹쳐 그런지 이내 잠에 떨어졌다. 쿠스코 호텔에 들어와 짐을 정리하여 세탁을 맡긴 후 라면 끓여 먹고 다시 깊은 잠에 떨어진다.


쿠스코Cusco의 이별 파티


12일차 : 12월 28일


아침엔 호텔에서 인터넷이 되어 그동안 e메일에 잔뜩 쌓여있던 밀린 일들을 모두 처리했다. 아침 식사 후 요스, 조앤 그리고 바네샤 등과 한 팀이 되어 쿠스코 시내를 모처럼 여유롭게 나들이한다. 시내 산책을 하며 점잖은 요스와 조앤도 개프를 반은 걱정, 반은 조롱하는 얘기들을 하고 있다. 없는 사람 도마에 올려놓고 이런 저런 흉을 보는 것은 어딜 가나 늘 있는 일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어쩌면 이다지도 다르지 않단 말인가.


바네샤 등의 젊은 여자 일행은 마사지를 받겠다고 우리의 찜질방 같은 곳으로 들어가고 나는 요스, 조앤과 함께 시내를 돌며 환전하는 일과 배낭 구입도 도와주고 우편엽서를 부치겠다고 해서 우체국도 같이 방문하면서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한다.


쿠스코 시내 산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한 후 요스와 함께 점심을 위해 다시 외출 나간다. 호텔 가까이에 있는 카페cafe에서 샌드위치sandwich 시켜 놓고 요스의 신상 얘기와 에콰도르Ecuador 여행 얘기를 들었다. 요스는 소년 시절에 네델란드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나는 리마에서 일행과 합류한 경우지만 요스는 에콰도르에서부터 여행을 계속해온 그룹 중의 한 명이다. 잉카트레일 중 설사를 한다고 해서 정로환을 두 번 챙겨주었더니 그 고마움의 표시로 점심을 냈다.


호텔에 돌아오니 쌍둥이 자매가 조앤과 함께 울상이다. 쌍둥이 자매 중의 하나인 안드레아Andrea가 결국 고도를 견디지 못하고 칠레로 가서 일정을 마쳐야하기 때문이란다. 볼리비아는 평균 고도가 더 높다는 데 걱정이다. 잘 견뎌 내야 할 텐데. 저녁은 모두 같이 먹기로 했다. 뭐 기니피그Guinea Pig라는 특별 메뉴라는데 먹고 나서 다시 쓰기로 하자


오후에는 사진도 정리하고 그동안 못했던 인터넷도 싫증이 나도록 한 후 여섯시가 다되어 잉카 트레일로 더렵혀진 세탁물을 찾아다가 푸노Puno로 갈 준비를 위한 짐을 챙겼다. 여섯시가 되니 저녁을 먹으러 가기 위해 일행이 다 모였다. 쿠스코 시내는 참 편리하다. 웬만한 곳은 모두 걸어서 갈수 있다. 그래서 쿠스코의 메인 스트리트main street는 벌써 몇 번째 왕래를 해 웬만한 곳은 다 알 수 있을 정도다. 저녁 식사도 같은 메인 스트리트를 걸어 올라가 한 식당에 갔다. 이 곳은 가이드, 유리가 이미 예약을 해놓은 곳인데 새끼 돼지, 기니피그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일행은 애피타이저appetizer로 새끼돼지 한 마릴 시켜 놓고 온갖 포즈를 취한 후 기념사진을 찍는다.


우리 일행은 모두 17명이지만 엄격히 얘기하면 세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에 가장 연대감이 높은 그룹은 에콰도르부터 같이 출발한 그룹이다. 벌써 열흘 이상을 같이 여행한데다 모두 싱글single이어서 연대감이 무척 높다. 그런데 그 중에 쌍둥이 자매 두 명이 고산증을 견디지 못하고 내일 칠레로 내려간다고 하니 오늘 저녁은 그들을 위한 송별만찬인 셈이다. 그래서 이 그룹들은 술 한 잔 되자 모두 일어나 같이 사진도 찍고 특히 나이가 가장 많은 요스를 중심으로 어깨동무도 했다가 무릎에 앉았다가 온갖 포즈로 난리법석을 피운다. 식당엔 다른 손님들도 많았지만 이들의 분위기를 억제할 순 없었다. 나머지 그룹은 커플그룹couple group과 리마에서 새로 조인한 싱글그룹single group이다.


나는 아보카도avocado 중심의 샐러드salad로 간단하게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옆자리의 매리앤이 자기는 페루의 알파카Alpaca 양고기를 먹어보겠다고 해서 나도 마음을 바꾸었다. 그래, 기왕이면 여기 특산의 음식을 한번 먹어보아야 추억이 될 수 있겠지. 이래저래 분위기가 엄청 들뜬 만찬이었다. 아마도 이들은 식사가 끝나면 가라오케karaoke나 나이트클럽night club까지 이 분위기를 가져갈 것 같다.


그런데 니콜Nicole이 아파서 호텔에 누워있는 남자친구를 챙겨주어야 한다며 먹을 음식을 테이크 아웃take out해가지고 자릴 일어선다. 누군가가 혼자서 호텔까지 돌아가는 데 위험하지 않겠냐고 걱정을 한다. 아, 마침 잘 됐다. 와인 한잔 하고 졸음을 못 참던 참인데. 니콜을 동반하겠다는 핑계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콜은 참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다. 늘 웃는 모습이다. 그래서 잉카트레일 중 남자 친구 브랜트Brant에게 넌 참 좋은 여자 친구를 두어서 좋겠다고 했더니 자기와는 자주 다툰다는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아무리 좋은 성격의 소유자라 해도 동반자와 의견이 늘 일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사랑은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 내 잣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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