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망산과 천당지재 2010-06-28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0:37
조회
250
https://www.gtn.co.kr/home/news/news_view.asp?news_seq=41665&s_key=%B9%DA%C0%C7%BC%AD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서쪽 45km에 위치한 천당지재(千唐之齋)는 손문과 함께 산해혁명을 일으켰던 상장(중장 계급) 출신 ‘장방’이 고향에 은거하면서 1921년에 조성한 곳이다. 장방은 고향 은거 이후 1930년대에는 하남성장 대리와 민정감찰청장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천당지재는 중국 유일의 묘지명(墓誌銘) 박물관으로서 중국 당나라 역사의 연구기지이자 낙양 8대 관광명소의 하나이다. 묘지명은 죽은 자의 인적사항 즉 성명, 왕조, 관직, 본적, 약력, 추모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통 관 위에 부착된다. 천당지재는 주은래 시절에 국가에 헌납돼 현재는 중국정부가 임명하는 관장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천당지재는 도굴꾼들이 우리가 사후 세계의 산으로 알고 있는 북망산(北邙山) 묘지를 도굴한 후 버린 묘지명을 수집하여 벽면에 상감(象嵌)한 것으로 황제부터 궁녀에 이르기까지의 신분을 보여주는 크기에 따라 전시돼 있다.
낙양은 기원전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최초로 도읍을 정한 이후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북위(北魏)·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 번창했던 곳이다. 북망산은 낙양 북쪽에 있는 작은 산이름이며 후한 이후 일곱 기의 황릉과 함께 귀족들의 무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인가 북망산은 사후 세계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됐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 됐다.
천당지재 묘지명은 지금부터 1400년여 전인 서진(西晉)과 북위(北魏) 시기의 정사외의 비사를 기록하고 있어 사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당나라 서예의 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묘비명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지만 측천무후가 창제한 20여개의 한자를 볼 수 있어 이채롭다. 이곳에는 2천여 점의 묘지명이 소장돼 있는데 이중 8백여 점은 아직 정리가 덜 끝나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
천당지재는 당나라 3백여 년 서예 사료의 보고로서 전시품 중 정판교(鄭板橋), 미원장(米元章), 왕탁(王鐸), 강유위(康有爲) 등의 서예작품은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곳 천당지재의 제호는 근대 중국의 3절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서예가 장태염(張太炎), 조각가 오창석(吳昌錫), 문장가 우우임(于右任) 등에 의해 제자(題字)되고 판각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는 당나라 시대에 낙양에서 무장으로 활동했던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인물 고현(高玄)의 묘지명이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전시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당지재에는 묘비명 외에 각석(刻石)들도 수집되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점이 특히 유명하다. 하나는 건륭황제 시 승상 유용(劉墉)의 작품으로 유용은 얼굴은 험하게 생겼으되 마음은 원활(圓猾)하여 내시 화곤(和坤)과의 갈등과 권력투쟁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주군은 원활(圓猾)하게 모시는 한편 백성에게는 봉사한 지혜로운 재상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캐릭터로 인기리에 방영되어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승상 유용의 각석 서체는 처음엔 절제된 모습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원래의 성격이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유용의 독특한 캐릭터가 서체에 잘 드러난 작품으로 유명하며 주군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와 같이 사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는 2인자의 슬기를 보여준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판각은 청나라 말기의 관리가 관직을 잃고 장씨 집안에 기숙하면서 그 집 화원의 땅바닥에 손톱으로 친 난으로 직함과 권세를 잃은 슬픔과 아쉬움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집주인 장 씨는 한 장의 천으로 땅바닥의 이 작품을 덮어 잘 보존하였다가 탁본하여 재생한 것으로 그 관리가 남긴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판각의 난은 뿌리가 공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의 기운이 하늘로 뻗치고 있어 정권을 다시 탈환하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잘 보여주고 있는 진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의서 교수> heuy@anyang.ac.kr 2010-06-28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洛陽)시 서쪽 45km에 위치한 천당지재(千唐之齋)는 손문과 함께 산해혁명을 일으켰던 상장(중장 계급) 출신 ‘장방’이 고향에 은거하면서 1921년에 조성한 곳이다. 장방은 고향 은거 이후 1930년대에는 하남성장 대리와 민정감찰청장을 역임하기도 한 인물이다. 천당지재는 중국 유일의 묘지명(墓誌銘) 박물관으로서 중국 당나라 역사의 연구기지이자 낙양 8대 관광명소의 하나이다. 묘지명은 죽은 자의 인적사항 즉 성명, 왕조, 관직, 본적, 약력, 추모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통 관 위에 부착된다. 천당지재는 주은래 시절에 국가에 헌납돼 현재는 중국정부가 임명하는 관장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천당지재는 도굴꾼들이 우리가 사후 세계의 산으로 알고 있는 북망산(北邙山) 묘지를 도굴한 후 버린 묘지명을 수집하여 벽면에 상감(象嵌)한 것으로 황제부터 궁녀에 이르기까지의 신분을 보여주는 크기에 따라 전시돼 있다.
낙양은 기원전 11세기에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최초로 도읍을 정한 이후 후한(後漢)을 비롯한 서진(西晉)·북위(北魏)·후당(後唐)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 번창했던 곳이다. 북망산은 낙양 북쪽에 있는 작은 산이름이며 후한 이후 일곱 기의 황릉과 함께 귀족들의 무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인가 북망산은 사후 세계의 대명사처럼 알려지게 됐고 지금도 북망산천(北邙山川)하면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 됐다.
천당지재 묘지명은 지금부터 1400년여 전인 서진(西晉)과 북위(北魏) 시기의 정사외의 비사를 기록하고 있어 사료로서도 매우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당나라 서예의 변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 묘비명에는 지금은 쓰이지 않고 있지만 측천무후가 창제한 20여개의 한자를 볼 수 있어 이채롭다. 이곳에는 2천여 점의 묘지명이 소장돼 있는데 이중 8백여 점은 아직 정리가 덜 끝나 전시되지 못하고 있다.
천당지재는 당나라 3백여 년 서예 사료의 보고로서 전시품 중 정판교(鄭板橋), 미원장(米元章), 왕탁(王鐸), 강유위(康有爲) 등의 서예작품은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곳 천당지재의 제호는 근대 중국의 3절이라고 칭송되고 있는 서예가 장태염(張太炎), 조각가 오창석(吳昌錫), 문장가 우우임(于右任) 등에 의해 제자(題字)되고 판각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는 당나라 시대에 낙양에서 무장으로 활동했던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인물 고현(高玄)의 묘지명이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전시돼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천당지재에는 묘비명 외에 각석(刻石)들도 수집되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 두 점이 특히 유명하다. 하나는 건륭황제 시 승상 유용(劉墉)의 작품으로 유용은 얼굴은 험하게 생겼으되 마음은 원활(圓猾)하여 내시 화곤(和坤)과의 갈등과 권력투쟁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주군은 원활(圓猾)하게 모시는 한편 백성에게는 봉사한 지혜로운 재상이었다고 한다. 드라마 캐릭터로 인기리에 방영되어 중국 전역에 널리 알려진 승상 유용의 각석 서체는 처음엔 절제된 모습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원래의 성격이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유용의 독특한 캐릭터가 서체에 잘 드러난 작품으로 유명하며 주군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와 같이 사는 것과 같다(伴君如伴虎)는 2인자의 슬기를 보여준 삶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판각은 청나라 말기의 관리가 관직을 잃고 장씨 집안에 기숙하면서 그 집 화원의 땅바닥에 손톱으로 친 난으로 직함과 권세를 잃은 슬픔과 아쉬움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집주인 장 씨는 한 장의 천으로 땅바닥의 이 작품을 덮어 잘 보존하였다가 탁본하여 재생한 것으로 그 관리가 남긴 유일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판각의 난은 뿌리가 공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의 기운이 하늘로 뻗치고 있어 정권을 다시 탈환하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잘 보여주고 있는 진귀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의서 교수> heuy@anyang.ac.kr 20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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