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고 가까워진 도쿄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0:19
조회
215
안(安),근(近),단(短) - 일본 사람들의 해외여행 패턴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말이다. 일본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할 때 편리하고, 가깝고, 짧은 시간의 거리를 선호한다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과거 수십 년 동안 일본은 우리에게 가장 큰 관광객 송출 시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해 이런 여행 패턴이 역전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작년 한 해 동안 일본인의 한국 방문은 2005년 대비 4%가 감소한 230여만 명에 머문 반면, 일본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상 처음으로 200만 명을 돌파한 것이다. 숫자로만 봐서는 아직 한일 간 관광 수지가 역조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한일 양국의 인구 비율로 보면 엄청난 변화이자 사건인 셈이다. 일본 엔화의 약세와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방랑벽이 가져온 결과이다.

지난 3월 첫 주말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아시아나를 이용해 2박3일간 일정으로 도쿄를 방문한 필자에게도 도쿄의 물가는 서울의 그것에 비해 그다지 비싼 느낌이 아니었음은 물론 어떤 경우는 서울보다 싸기까지 했다. 일례로 필자가 묵은 숙소는 도쿄 신주쿠(新宿) 외곽 시오도메역 근처의 유명한 화장품회사 시세이도 본사 건물과 주상 복합 형태로 지어진 로얄파크  시오도메 타워 호텔로서 일인당 하루 밤 숙박료가 15,000엔에 불과하였다. 신주쿠 외곽이긴 하지만 재개발로 새로이 조성된 화려한 단지이고 호텔 등급도 초특급인 데다 걸어서 웬만한 도쿄 도심을 관광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비싼 가격이라고 할 수 없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호텔 인근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는데 790엔 즉 우리 돈 6,500원이어서 환율기준으로 친다면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또 한 번 놀랐다. 이튿날 아침은 도심 뒷골목의 허름한 식당에서 고기덮밥을 먹었는데 550엔에 불과해 웬만한 우리 음식 가격인 5천원에 비해 오히려 싼 편이다. 더욱 놀란 것은 시내 관광 중 원두 커피집에 들렀더니 200엔 즉 1,600여원 정도여서 8-9배의 환율은 고사하고 절대 가격만으로도 서울의 커피 값보다 싼 것이었다. 일본 물가에 대한 일련의 충격은 이튿날 하코네의 한 골프장에서 그린피를 계산하며 극도에 달했다. 캐디피와 점심을 포함해서 50여년 된 명문 골프장의 정규 18홀 그린피가 15,000엔으로 좀 과장한다면 서울의 퍼블릭 골프장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물가를 비교할 때 맥도날드 햄버거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빅맥지수가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 생활비나 여행비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도쿄시내에서 우리나라에선 아직 판매되지 않는 메뉴인 메가맥 - 크기가 빅맥보다 더 큰 햄버거로 메가맥 안에는 무려 4겹의 고기가 들어 있다 - 을 시켰는데 3,000원이 채 안 된다. 우리나라에선 빅맥 가격이 4천 원 정도 하니 환율을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싼 가격이 아닐 수 없다. 맥도날드에서 판매하는 원두커피 한잔 역시 100엔에 불과해서 우리나라 맥도날드 커피 값인 2,000원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 가격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지난 한해 일본으로 몰려들 수밖에. 일본인의 여행패턴 대명사인 안(安),근(近),단(短)이 거꾸로 일본 방문 한국 여행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이웃 일본을 얘기할 때 우리가 단골로 쓰는 수식어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유럽 사람들이 영어를 포함해서 유럽 내의 한두 가지 언어를 쉽게 구사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 역시 중국어나 일본어를 웬만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한자 지명, 간판, 교통표지판 정도를 빼면 별반 아는 게 없는 게 한중일 삼국의 현실이다. 그래도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으로 도착한 도쿄의 분위기는 좀 청결한 것을 빼고는 그렇게 이국적인 모습은 아니다. 사람들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고 한자 간판과 표지판들이 많이 보여서 그럴 것이다. 도쿄의 하네다 공항은 나리타의 개항으로 우리의 김포공항과 같이 국내선 전용이지만 김포-하네다 노선 운항이 재개되면서 도쿄 여행이 한결 편리해 졌다. 이를테면 국내의 제주도 여행 정도의 비용과 시간으로 주말을 이용해 얼마든지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공항 입국 수속을 마치고 택시로 이동하여 도쿄 중심을 모두 걸어서 구경할 수가 있는 도쿄 도심 신쥬쿠 외곽 시오도메역 근처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토요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도쿄 중심 긴자거리가 무척 한산해서 공해 없이 높기만 한 도쿄 하늘을 이고 마음껏 활보해 본다. 긴자 거리의 슈퍼마켓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쇼핑해도 가격이 비싸다고 느껴지지가 않고 특히 골프 클럽은 관세 때문인지 몰라도 국내 가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싸다. 한가롭기만 한 도심을 가로질러 100년 전에 일본 최초로 조성된 서양식 공원이라는 히비야 공원을 산책한다. 같이 간 교수 일행들과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던 망중한의 담론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면서 활짝 핀 매화 향기에 취해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여정의 피로를 풀기에는 더없이 좋은 분위기이다.

적당히 피로를 푼 우리 일행은 발 닿는 대로 도쿄 시내를 돌아보기로 한다. 한참을 걸어 우리의 서울역사와 유사한 건물과 마주쳤는데 역시 도쿄역 청사 건물이었다. 우리나라의 옛 서울역 모습을 연상케 하는 붉은 벽돌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지하철과 일본 국철 노선이 결절하고 있는 곳이다. 1914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역을 모델로 해서 건축한 도쿄역은 2차 대전 때 공습으로 파괴되어 1951년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도쿄의 현관으로 불리는 도쿄역은 지하철 마루노우치선과 연결되며 하루에 수천대의 열차가 오고 가는 거대한 규모이다. 역사 내에 도쿄스테이션호텔과 갤러리가 있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품격 있는 분위기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며 많은 도쿄시민들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 쪽으로 나와 넓은 가로수 길을 지나면 양쪽으로 일본 경제의 중심인 증권회사, 금융기관, 상사들의 본점이 입주해 있는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속칭 마루노우치비루로 통하는 마루노우치 빌딩가는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뉴욕의 월가에 버금가는 세계 경제의 핵심부라고 한다. 중앙출구를 나와 북쪽으로는 일본교통공사, 다이이치간쿄은행, 토요우신탁은행, 미쯔비시신탁은행, 은행회관, 일본공업클럽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중앙출구 남쪽에는 도쿄 중앙우체국, 미쯔이물산, 미쯔비시덴키, 요코하마은행 등의 재벌기업과 금융기관이 자리 잡고 있어 이름만으로도 도쿄 최고의 번화가임을 실감할 수 있다.

신주쿠는 쇼핑과 유흥의 거리이자 일본 대중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명성에 걸맞게 대형 백화점과 소극장도 많이 보인다. 신주쿠는 히가시신주쿠와 니시신주쿠로 나뉘는데, 동쪽을 의미하는 히가시신주쿠가 젊음과 쇼핑의 거리라면, 서쪽을 의미하는 니시신주쿠는 대형 빌딩이 즐비한 상가이다. 도쿄 중심가의 세계적 명품 브랜드 부티크와 디스플레이 수준은 패션의 원조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뉴욕의 5번가나 이탈리아 밀라노의 몬테 나폴레오네 거리에 와있는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저녁에는 일본 전통의 크랩 요리로 호기를 부렸는데도 가벼운 정종을 포함해 일인당 오천엔의 계산서가 나와 우리 일행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저녁을 마친 후 식당의 추천으로 롯봉기 야경을 돌아보았다. 롯봉기는 외국인들이 많이 다니는 우리나라의 이태원과 비슷한 곳으로 서양식 카페나 찻집, 고급 레스토랑, 바와 클럽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외국 대사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도쿄 신흥 부자들의 집단 주거지로도 알려져 있으며 밤거리의 롯봉기는 첨단 건물들이 뿜어내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금발의 서양 미녀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인종을 가리지 않고 자유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세계화된 일본의 단면을 볼 수 있기도 하다.

긴자의 밤은 네온사인이 현란한 환락가이면서 또한 아담한 카페와 레스토랑, 술집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여행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거리 중의 하나로 최신 유행과 젊음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많은 갤러리도 있어 도쿄시민들이 애용하는 문화의 거리이기도 하다. 긴자의 볼거리는 거리별로 다양한데 주오도오리는 유명한 브랜드의 부티크나 상점이 즐비하고 하루미도오리는 귀족적이고 고풍스런 분위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중앙로라는 의미의 주오도오리는 매주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 일시적으로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어 일본어로 보행자천국이라는 의미의 호코샤텐코쿠 거리퍼포먼스와 즉흥연주를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토요일 오전엔 한산하기만 하던 긴자거리가 오후가 되니 남녀노소가 쏟아져 나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빈다.

다음날 오전 도쿄에서 가까운 온천도시, 하코네(箱根)로 가기 위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깨끗하고 쾌적한 분위기였는데 종착역에 도착하는 열차를 플랫폼에서 군대식으로 일렬로 기다리던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신속하게 청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코네는 도쿄 인근의 유명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지역이다. 도쿄에서 당일로 온천, 휴양, 관광을 함께 즐길 수 있어 관광객들은 물론 현지 일본인들에게도 사랑받는 휴양지이다. 도쿄에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로 하코네 로망스카를 이용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산과 호수, 그리고 수많은 유명 온천들이 가득한 하코네는 전시관과 미술관도 많이 있어, 문화적인 휴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한가로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골프클럽도 여러 곳 있어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골프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의 다양한 여가문화를 체험하고 싶다면 도쿄 여행 시 꼭 한번 찾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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