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 찻집에서 제사 떡을 나눠주었다. 둘이 갔음으로 두 봉지로 나누어 가져왔는데 한 쪽이 다른 봉지보다 양이 많아 보였다. 큰 쪽을 선택하면서 내가 한 말이 가관이다. '내가 큰 것을 가져가야 겠는 걸. ' 언뜻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양보했다면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을까? 성당에서 미사 후 떡과 수박을 나누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접시에 수 박 두 쪽만 남아있게 되자 '이거 내가 얼른 먹어야겠네..' 이것 역시 나이 먹은 사람으로서는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또 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뷔페 식당만 가면 아직도 음식을 필요 이상으로 담아온다. 이제는 소식을 생활화 하자 면서도 같은 모습이 계속 연출되고 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배고프던 어린 시절의 습관이 아직도 몸 속 깊이 깊이 남아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두는 추한 모습의 나이 듦이 아닐 수 없다. 욕심내서 음식 챙겨와 보았자 남으면 모두 가차없이 버리는 시절인 걸 모르느냐? 이 멍청아!!!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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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살이시절 한 치맥집의 단골이었다. 단골로 다니다 보니 갈 때 마다 서비스 안주가 따로 나왔다. 문제는 오랜 단골이 되다보니 서비스 안주가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되고 당연한 덤으로 치부되어 오히려 받지 않으면 서운해 지는 상황으로 나쁘게 발전된 것이다. 춘천으로 이사와서도 집에서 가까운 신북읍내에 단골 식당이 몇 군데 생겼다. 막국수집과 두부집이 대표적이다. 막국수집은 지난 몇년을 다녀도 그 맛과 종업원들의 친절이 변함없어 자주 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두부집이다. 직접 만든 두부 요리 전문의 이 식당은 주인 부부도 친절하고 소박한 맛의 두부도 넉넉하게 주어 자주 애용해왔다. 자주 가다보니 주인 부부와도 서스럼없는 사이로 지내게 되어 며칠 전 동네 지인들 모임을 주관하면서 별도의 수육 안주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고 정중하데 물었더니 의외로 단칼로 거절하는 것이었다.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했던 입장에서는 몹시 무안한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이틀 후 파크골프 동호인들과 운동을 마친 후 두부 전골을 시켜먹으면서 일행 다섯이 4인분만 우선 시키겠다고 했더니 한꺼번에 다 시키라며 눈을 부릅뜨고 불쾌해해 몹시 당황했었다. 운동 후 목이 몹시 마른 상황이라 맥주를 여섯 병이나 시켜 먹으면서도 우리 일행은 식사 내내 불쾌해 했었다. 낮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두부 전골 4인분도 다 먹지 못한 채 남기고 나오면서 더 이상 이 단골집 출입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이 단골집이 영업이 좀 되면서 주인들의 태도와 서비스가 예전 같지 않아진 게 문제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불편한...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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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기관에서 추진한 해외 파견 봉사 계획에 지원하면서 .나이 때문에 많이 망서렸었다. 그러나 지원에 나이 제한이 없는데다가 할 일이 '지속가능 관광과 문화재 보호'라서 용기를 냈었다. 나이 때문에 난관이 많으리라는 우려와 달리 파견 기관의 심사에 패스해 해외 근무 기관의 심사 후보자로 넘겨져 큰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자격 조건인 영어 외에 현지어인 '스페인어 능통' 장벽을 넘지 못하고 인터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인터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분야 전문가로 현장과 교육 경험이 풍부해 나름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었지만 그 결과는 역시나였다. 인생의 마지막 전기를 마련해 보려던 기대가 산산히 무너지면서 이제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과욕이자 노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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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전, 고향 친구가 야생 느티나무 묘목을 캐와 도원리에 옮겨 심었고 난 이 나무를 도원리 땅의 랜드마크로 키우기로 작정했었다. 장모님 유골도 이 나무에 수목장 해드리고 내 유골도 이곳에 묻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몇 년 잘 자라나던 이 나무가 작년에 느닷없이 죽어버렸다.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금년 봄에 사랑말 정원을 재배치하면서 소나무 두 그루도 옮겨심었었다. 그런데 잘 착근해가던 소나무 한 그루가 시들시들해지더니 결국 말라 비틀어 죽어버렸다. 몇 년 잘 키워오던 나름 멋쟁이 소나무였기에 아쉬움이 매우 크다. 그러나 나무들을 키워오면서 모든 나무를 다 살려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연의 섭리일지, 관리 소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받아들일 수 밖에. 더 나아가 인생도 이와 같은 게 아닐런지....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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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불알친구에게 춘천 함 다녀가라고 제안한 게 몇 년 전이다. 세종시에서 춘천을 다녀가는 게 순로가 아니어서 쉽지많은 않았을 터. 동해안 고성에 지인이 있다면서 그와 엮어 다녀가겠다고 한 게 여러 차례였지만, 한번도 성사된 적은 없었다. 친구의 춘천 원행이 쉽지 않은듯 하여 꼭 다녀가지 않아도 좋다고 전화했더니 의외로 반기는 목소리다. 그동안 매우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친구에게 굳이 춘천까지 다녀가라고 했던 이유는 오랜 친구가 보고싶기도 해서이지만, 우리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 보여준다는 게 말이 그렇지 실은 사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들 중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그간 꽤 보아왔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전화해 부담을 덜어준 것은 참 잘한 일 같다~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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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3월 11일) 아침 일찍 띠동갑 큰 누님이 운명하셨다고 생질이 알려왔다. 목욕탕에서 쓰러지신 후 만 3년만이다. 긴병에 효자없다고 부음을 접하고도 그저 무덤덤할 뿐이었다. 세월 탓인가? 감정이 메말라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감정을 아내와 주위에 얘기했더니 어찌 그럴수가 있느냐면서 모두 놀라워한다. 그러나 막상 빈소의 큰 누님 영정 앞에 서서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릴적 어머니 일찍 여의고 5남매가 맘 고생을 많이 하면서 서로 의지했던 세월이 떠오른 탓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 의지한 세월은 잠깐이었고, 이후 여러 문제들이 겹쳐오고 세월도 흐르면서 남매 간의 간극이 무척이나 벌어졌었다. 특히 큰 누님이 아들 빚으로 거리에 나앉게 되었을 때 집을 사주어 살던 집에 계속 살게 해주고 이후 명의까지 손자 명의로 돌려주었건만 매매대금 중 2천만원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해 내가 화를 냈더니 그제서야 돈을 부랴부랴 돌려주면서 우리 관계는 깨지고 그 애틋함 역시 함께 사라졌었다. 영정 앞에 서니 그까짓 2천원만(10여년 전 액면가)이 뭐라고 서로 마음을 돌렸단 말인가 하는 회한이 몰려온다. 허리 수술 때문에 빈소에 오지 못한 작은 누님과도 명의신탁으로 매입한 내 땅을 팔아먹으면서 관계가 완전히 깨졌었다. 이 또한 돈 3천만원(30여년 전 액면가) 때문이다. 물론 두 누님과의 문제는 단순한 돈 문제만은 아니고 남매간의 신뢰 문제가 훨씬 더 큰 것이긴 하다.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에게 잘 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용서의 조건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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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가 기숙 대안중학교로 진학했다. 제 부모와 함께 지낼땐 크게 걱정할 일이 없었지만 아직 어린 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걱정이 많이 된다. 그래서 전화를 해보았더니 전화도 받지 않고 리턴콜도 없다. 학교에서는 전화 통화가 금지되어 있는걸까? 손주에게 어디까지,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적정한 것일까...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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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주차를 위해 좁은 공간 진입을 시도하다 주차된 옆차와 살짝 부딪쳤다. 내려서 확인해 보니 범퍼에 가벼운 스크래치가 나 있다. 차에 명함을 꽂아둘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섰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었지만 범퍼를 갈아달라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그리 판단하게 되었다. 80년대 중반 미국에서 처음 운전할 때 도로가에 병렬주차를 많이 했는데 이 때는 앞뒤 주차된 차의 범퍼를 부딛치며 주차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범퍼는 말 그대로 범퍼의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차 때 옆차에 살짝 스크래치만 내도 범퍼를 통째로 갈아달라고 한다. 낭비도 낭비려니와 지나친 대응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부딛친 차를 두고 돌아서니 하루 종일 찜찜한 기분이다.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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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넘긴 동서 형님과 처형의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졌다. 가끔 우리 부부와 어울려 지방 여행을 같이 했었는데 운전도 어렵고 걸을걸이도 불편해져 몇년 만에 겨우 양양 콘도엘 다녀왔다. 그러나 여정 내내 두 분의 불편한 모습이 계속되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서글픈 일은 이런 모습이 미구에 다가올 우리 부부의 미래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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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참 덧없다. 작년 설, 처음 출석한 샘밭성당 미사가 끝났을 때 본당 신부가 출석 교인 전원에게 빳빳한 5천원권을 세배돈으로 나주어주었었다. 88년 영세 후 처음 있던 일이라 늘 열배로 갚아야 겠다고 다짐해 왔는데 인사이동으로 이 신부가 전근되는 바람에 세베돈 갚을 기회가 없어지고 말았다. 1년 지난 후 이제 겨우 부임해온 젊은 사제는 설 미사 봉헌후 성당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전 신자를 대상으로 세배를 넙죽 해서 전 신자의 놀라움과 박수 갈채를 받았다. 물론 젊디 젊은 신부였지만 전혀 뜻하지 않은 일로 모두에게 행복을 안겨준 깜짝 이벤트였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세배돈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신부의 강력한 공개 주문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굽은 한 할머니는 미리 준비해온 봉투를 극구 사양하는 신부 손에 한사코 쥐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할머니 역시 사제의 세배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설 미사에서 생활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막내 사위가 성가 반주 봉사를 해주어 이 또한 작은 감동이었다. 금 년 한해, 뜻하는 일들이 술술 잘 풀려 나가려나???
박 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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