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길은 물리적으로 각기 다른 장소를 연결해 주는 통로이다. 그러나 길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길은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이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시련의 극복이라는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휠씬 더 많기 때문이다.
길은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이의 화두였다. 시인 윤동주가 그의 시에서 읊은 ‘길’은 식민의 역사적 상황에 의해 정해진 운명이다. 따라서 그의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오로지 극복의 대상이었다. 김소월의 시 ‘길’은 갈 곳 없는 자신의 처지를 처절하게 비관하고 있다. ‘갈래갈래 갈린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반면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가 흘러넘친다. 모건 스콧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은 삶에서 마주치는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고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데 필요한 자기관리법을 제시하고 있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세파에 시달리던 두 부랑노무자의 귀향길을 그린 이야기다. 펠리니의 영화 ‘길’은 한 방랑자의 인생을 험한 세파와 비유하여 진한 감동을 준 불후의 명작이다.
세상에는 길에 관한 수식어도 범람하고 있다. 가지 못한 길, 잃어버린 길, 보이지 않는 길, 제3의 길, 지름길, 낯선 길, 익숙한 길, 마음으로 걷는 길, 고행 길, 동행 길, 초행 길, 왕도, 패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처지와 의지를 길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길에게 길을 묻다, 숨은 길은 찾고 끊어진 길은 잇고 없는 길은 만들고. 길이 아니라면 가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 누군가 가야할 길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쳐 나가겠다.
예로부터 길과 관련한 제도를 세우는 일은 나라살림의 근간이었다. 조선시대는 사람의 왕래, 숙박, 공물 운송과 사신 접대를 위해 대략 30리마다 역을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500여개의 역참(驛站)을 운영하였었다. 지금은 4대강 물길로 온나라가 시끄럽다. 로마는 잘 닦은 길로 세계를 제패했었다. 로마와 로마제국의 식민지를 이어주던 아피아가도는 지금은 지구촌 곳곳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길이다.
길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대표적인 곳은 ‘산티아고 가는 길’(Santiago de Compostela)일 것이다. 스페인 북서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그리스도교 순례지로 알려져 있다. 성 야곱의 유해가 안치된 곳으로도 유명한 이 순례지는 중세 내내 유럽 전역에서 찾아온 수많은 순례자들로 북적거리던 곳이다. 순례 길에는 자연스레 순례자들의 신앙생활과 숙식을 위한 교회, 수도원, 병원, 숙박업소와 같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800여개의 순례길 건물은 오늘날까지 남아 이들 중 상당수는 세계문회유산으로 지정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매력이 되고 있다.
우리는 매일 길을 걸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새삼스레 온 나라가 길로 야단법석이다. 제주 올레길의 성공으로 점화된 길 만들기 불길이 구제역 번지 듯 전국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레길, 나들길, 테마길, 둘레길, 해파랑길, 산막이 옛길, 덕수궁 돌담길, 솔마루길, 솔향기길. 한반도는 어느 날 갑자기 길 공화국이 되었고 같은 이름의 길도 셀 수 없이 생겨나고 있다. 사람과 문화의 통로인 길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나 문제는 길의 숫자가 아니라 길이 얼마나 내실 있게 운영되어 찾아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느냐이다. 한두 군데가 잘 된다고 해서 같은 이름의 길을 너도 나도 따라서 만드는 것은 하수 중의 하수나 하는는 치졸한 발상이다.
길은 건강관리의 수단이자 자아 성찰과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고독한 탐색의 여정이기도 하다. 멀고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가끔은 험난한 길을 만날지라도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 피해야 할 길과 직면해야 할 길을 구별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