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규칙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1:57
조회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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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규칙

지난여름 월드컵 예선전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심판의 오프사이드에 관한 판정은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반전시켜 우리가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억울한 판정을 지켜볼 당시의 분위기로는 심판에게 테러라도 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 여자월드컵 예선전 호주와의 경기에서 북한 선수가 심판의 오심에 격분, 심판을 가격하여 국제사회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 두 경기 모두 심판 판정이 오심이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오심여부에 관계없이 심판 폭행의 결과는 경기 몰수나 선수의 퇴장으로 이어질 뿐이다.

놀이문화 연구의 원조인 요한 호이징하는 인간의 존재와 행위 양식의 본질을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가 아닌 호모루덴스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의 본질을 지혜나 기구의 사용 능력이 아닌 놀이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호이징하는 이러한 놀이의 본질을 두 가지 요소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놀이가 실질적인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움직임의 유일한 동기가 놀이 자체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정신적 또는 육체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놀이란 모든 참여자에 의해 인정받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활동이며 성취와 실패,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놀이 연구의 또 다른 전문가인 로제 카이와는 놀이의 본질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 다음의 여섯 가지 특징으로 정리했다. 첫째, 놀이는 강요되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이며 강요된 놀이는 즐거움을 잃게 된다. 둘째, 놀이는 정해진 명확한 공간과 시간의 범위 내에 한정되는 분리된 활동이다. 셋째, 놀이는 게임의 전개가 결정되어 있지도 않으며 결과가 미리 주어져 있지도 않다. 넷째, 놀이는 재화도 부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인 활동이다. 놀이하는 자들 간의 소유권 이동을 제외하면 놀이의 결과는 게임 시작 때와 똑같은 상태로 돌아간다. 다섯째, 놀이는 규칙이 있는 활동이다. 놀이는 약속에 따르는 활동으로 이 약속은 일상의 법규를 정지시키고 일시적으로 새로운 법을 확립하며 이 법만이 통용된다. 마지막으로 놀이는 허구적인 활동이다.

로제 카이와는 놀이의 목적 달성을 위해 경쟁, 우연, 모의(模擬), 현기증의 네 가지 역할 중에서 어느 것이 우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놀이를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하였다. 그리스어로 시합이나 경기를 나타내는 아곤, 요행이나 우연을 뜻하는 알레아, 흉내나 모방을 의미하는 미미크리, 소용돌이의 의미인 일링크스가 그것들이다.

놀이의 관건은 심판의 판정이 설사 부당하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는 데 있다. 경쟁의 타락은 심판과 판정이 모두 무시되는 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엄격한 룰이 적용되는 스포츠가 타락하면 폭력이 되고, 운의 순수한 영역인 복권과 경마가 타락하면 미신이나 점성술이 횡행하게 된다. 카니발이나 축제가 타락하면 광란이 되고 스피드나 감각을 광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결국 알코올이나 마약 중독으로 이어져서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를 붕괴시키게 된다.

요즈음 한 사행성 게임 프로그램이 온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다. 이 사례는 인간관계나 놀이에서의 규칙과 약속의 위반은 결국 놀이판은 물론 우리 사회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