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2/야반도주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20
Views
48
야반도주
눈 덮인 시골 들판은 달빛마저 파리하게 내려앉아 창백함과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아직 국민학교 입학 전인 아이는 이런 분위기에서 탈출이라도 하려는 듯, 아버지 꽁무니를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다. 초저녁 일찌감치 잠에 뼈져 들었던 아이는 자정이 다 되어 두들겨 깨워져서 비몽사몽인 채다.
따스한 솜이불 속에 묻혀 단잠에 취해 있던 아이는 억지 춘향으로 깨어나 앞서가는 아버지를 따라나선 길이다. 같은 마을이긴 하지만 수백 미터 떨어진 외딴곳, 큰댁으로 제사 지내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중절모까지 챙겨 쓴 단정한 모습이다.
눈 덮인 들판은 창백하고 쓸쓸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한밤의 공기가 옷깃을 매섭게 파고들고 있어 가뜩이나 움츠러든 아이는 종종걸음을 더더욱 재촉해야만 했다.
큰댁에 도착하자마자 우물가로 달려나간 아이는 손이 쩍쩍 들러붙는 양은 대야의 차디찬 물로 얼굴을 닦아냈다. 심신을 청결히 하기 위해, 제사 지내기 전에 늘 해온 이를테면 의식 같은 거였다.
제사는 분향, 함문, 음복의 순서로 마무리되었다, 제사가 끝나면 사촌들과 둘러앉아 제사 음식을 나누는 게 마지막 순서였다. 그런데 아이는 오늘 제사상 물리는 일에 큰어머니의 일손을 돕게 되었다. 이럴 때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큰어머니는 당일 제사의 주인공인 증조할아버지가 어떻게 이곳 충청도 소골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아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는 경상도 선산인지, 칠곡인지 하는 곳의 ’설골‘이란 동네서 사시다가 여기까지 올라오시게 되셨지.”
아이는 그때 큰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큰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월이 꽤 지난 후 집안 족보 얘기가 나왔을 무렵이다.
경상도 선산 어디쯤이라는 얘기만 듣고, 조상 뿌리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경상도를 헤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장롱 서랍에 어지럽게 쌓여 있던 해묵은 사진들을 뒤적이던 소년에게 경상도 구미, 금오산 자락 절간을 배경으로 한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아버지는 조상의 뿌리를 찾으려 했었구나.‘
크리스마스 날이다. 올해 대 성황을 이루었다던 그 흔한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소년에겐 배달되지 않았다. 소년 역시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걸 보내지 않았으니까.
소년은 정오 즈음에 지게를 둘러메고 동네 또래인 동희, 재옥이와 함께 마을 앞 당골로 향했다.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소년은 당골 산에 올라 아카시 나무 다섯 다발을 해 모았다.
’한 다발만 더하면 나뭇짐이 어울리겠는데.‘
그래서 소년은 한 다발을 더 했다.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땔 나무를 하러 갔던 길이다. 그래서 나무 무게가 어느 정도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결국, 여섯 다발이 된 나뭇짐을 소년은 감당할 수 없어 간신히 지게를 지고 일어설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년은 백 미터도 못 내려와서 쉬었다. 다음에 한 오십 미터쯤 내려와서 쉬고. 그러나 소년의 다리는 여전히 휘청거렸다. 결국, 백 미터쯤 더 내려와서 나뭇짐이 그만 기울어 소년은 그대로 나 뒹굴고 말았다. 뒤에서는 동희가 계속 넘어지고. 재옥이는 결국 나뭇짐을 덜어 놓았다. 동희는 나뭇짐을 고쳐 매었지만 계속 고꾸라졌다. 결국, 동희도 소년도, 나뭇짐 두 다발을 지게에서 내려놓고 내려왔다.
저녁때는 제사가 있어 소년은 큰집으로 내려갔다. 몸이 불편한 소년의 큰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도대체, 오늘 제사는 어떤 분을 모시는 건가요?“
조상들 제삿날을 모두 외워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소년은 큰어머니에게 물었다.
”물으니, 오늘 제사에 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어야겠구나.”
이렇게 말문을 연 소년의 큰어머니는 얘기를 이어갔다.
원래 경상도에서 살던 소년의 조상은 증조부 때 충청도 전의로 올라왔다. 그리고 증조부는 할아버지 남매만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할아버지는 동네에 살던 처자를 보쌈 해와 혼인했다. 소년의 이 할머니는 아홉 살 되던 해에 천안의 어느 집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자식도 없이 남편이 세상을 떴기 때문에 할머니는 친정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동네에 과부가 있으면 홀아비가 밤중에 와서 몰래 훔쳐가던 풍속이 있었다. 소위 보쌈으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보쌈해온 것이다. 이후 할머니는 5남매를 두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때가 큰아버지 열한 살, 아버지는 겨우 아홉 살이었으니 가족들 생계는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생계가 막막했던 할머니는 결국 자식들을 데리고 또 친정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할머니 친정 역시,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 오두막의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래서 안방의 친정 식구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굶고 있는 윗방 할머니 가족들에게 밥 한 공기 나눠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떡 장사와 이웃집 가사 일을 돕는 등 모진 삶을 이어가며 아이들을 키워가야만 했다.
소년의 큰고모는 조끼를 지어 파는 재봉틀 집을 하던 공주로 출가했다. 소년의 아버지도 이 일을 배워 후에 조치원에서 조끼가게 겸 옷 수선 집을 차렸다.
그때 소년의 아버지는 이웃 여인을 만나 결혼했지만 얼마 후 이혼했다. 소년의 친어머니도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 후 부강의 친정에 돌아와 있었다. 소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형편에서 모두 재혼하게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결혼 후 생계를 위해 논산, 신의주, 평양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평양 살이 때 큰딸을 임신한 소년 어머니는 부강의 친정으로 와서 출산했다. 출산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전 남편은 아이가 자기 자식인 줄 알고 찾아왔었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소년의 증조부가 처음 정착했던 충청도 전의全義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증조부모 묘소는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출산할 즈음 소년의 출생지인 소골로 이장했다. 소년 어머니는 이때 이미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조현병 와중에 소년이 태어난 것이다. 병을 앓고 있던 소년 어머니는 한겨울에 태어난 소년을 찬물로 그것도 밖에서 목욕시켰다. 소년의 출생 상관은 동네 한 아주머니가 맡아 주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조현병이 깊어진 소년 어머니는 상관해주고 있는 아주머니에게까지 욕설을 퍼 부며 모멸감을 주기 일쑤였다.
소년의 큰집에서 지낸 제사는 고조, 증조 그리고 조부의 3대 봉사였다. 그런데 이 3대 봉사 외에 다른 제사가 하나 더 있었고, 이날에는 충북 청원의 ’벌말‘이라는 곳에서 대부라고 불리는 노인 한 분이 따로 와서 제사에 참례했다.
경상도 선산과 칠곡을 뒤져도 조상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소년 아버지는 이웃 마을, 모시터의 같은 박씨 집안에의 입양을 통해 족보를 만들기로 한다. 마침 청원의 오송에 사는 그 박씨 일가 중 하나가 손이 귀해 조상 제사를 모실 사람이 필요했던 터였다. 이렇게 해서 소년 아버지는 조상과 족보 두 가지 과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성장해오면서 소년 역시 그의 조상과 뿌리가 궁금했으나 어느 날 조상 찾기를 그만두기로 한다, 그 옛날 조상이 경상도 고향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멀고 먼 충청도 전의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건, 그 조상들이 큰 죄를 짓고 야반도주한 것이거나 아니면 역병에 걸려 고향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눈 덮인 시골 들판은 달빛마저 파리하게 내려앉아 창백함과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아직 국민학교 입학 전인 아이는 이런 분위기에서 탈출이라도 하려는 듯, 아버지 꽁무니를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고 있다. 초저녁 일찌감치 잠에 뼈져 들었던 아이는 자정이 다 되어 두들겨 깨워져서 비몽사몽인 채다.
따스한 솜이불 속에 묻혀 단잠에 취해 있던 아이는 억지 춘향으로 깨어나 앞서가는 아버지를 따라나선 길이다. 같은 마을이긴 하지만 수백 미터 떨어진 외딴곳, 큰댁으로 제사 지내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중절모까지 챙겨 쓴 단정한 모습이다.
눈 덮인 들판은 창백하고 쓸쓸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한밤의 공기가 옷깃을 매섭게 파고들고 있어 가뜩이나 움츠러든 아이는 종종걸음을 더더욱 재촉해야만 했다.
큰댁에 도착하자마자 우물가로 달려나간 아이는 손이 쩍쩍 들러붙는 양은 대야의 차디찬 물로 얼굴을 닦아냈다. 심신을 청결히 하기 위해, 제사 지내기 전에 늘 해온 이를테면 의식 같은 거였다.
제사는 분향, 함문, 음복의 순서로 마무리되었다, 제사가 끝나면 사촌들과 둘러앉아 제사 음식을 나누는 게 마지막 순서였다. 그런데 아이는 오늘 제사상 물리는 일에 큰어머니의 일손을 돕게 되었다. 이럴 때를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큰어머니는 당일 제사의 주인공인 증조할아버지가 어떻게 이곳 충청도 소골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아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증조할아버지는 경상도 선산인지, 칠곡인지 하는 곳의 ’설골‘이란 동네서 사시다가 여기까지 올라오시게 되셨지.”
아이는 그때 큰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큰어머니가 무슨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세월이 꽤 지난 후 집안 족보 얘기가 나왔을 무렵이다.
경상도 선산 어디쯤이라는 얘기만 듣고, 조상 뿌리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경상도를 헤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아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장롱 서랍에 어지럽게 쌓여 있던 해묵은 사진들을 뒤적이던 소년에게 경상도 구미, 금오산 자락 절간을 배경으로 한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아버지는 조상의 뿌리를 찾으려 했었구나.‘
크리스마스 날이다. 올해 대 성황을 이루었다던 그 흔한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소년에겐 배달되지 않았다. 소년 역시 그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걸 보내지 않았으니까.
소년은 정오 즈음에 지게를 둘러메고 동네 또래인 동희, 재옥이와 함께 마을 앞 당골로 향했다.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소년은 당골 산에 올라 아카시 나무 다섯 다발을 해 모았다.
’한 다발만 더하면 나뭇짐이 어울리겠는데.‘
그래서 소년은 한 다발을 더 했다.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땔 나무를 하러 갔던 길이다. 그래서 나무 무게가 어느 정도 될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결국, 여섯 다발이 된 나뭇짐을 소년은 감당할 수 없어 간신히 지게를 지고 일어설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년은 백 미터도 못 내려와서 쉬었다. 다음에 한 오십 미터쯤 내려와서 쉬고. 그러나 소년의 다리는 여전히 휘청거렸다. 결국, 백 미터쯤 더 내려와서 나뭇짐이 그만 기울어 소년은 그대로 나 뒹굴고 말았다. 뒤에서는 동희가 계속 넘어지고. 재옥이는 결국 나뭇짐을 덜어 놓았다. 동희는 나뭇짐을 고쳐 매었지만 계속 고꾸라졌다. 결국, 동희도 소년도, 나뭇짐 두 다발을 지게에서 내려놓고 내려왔다.
저녁때는 제사가 있어 소년은 큰집으로 내려갔다. 몸이 불편한 소년의 큰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도대체, 오늘 제사는 어떤 분을 모시는 건가요?“
조상들 제삿날을 모두 외워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소년은 큰어머니에게 물었다.
”물으니, 오늘 제사에 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어야겠구나.”
이렇게 말문을 연 소년의 큰어머니는 얘기를 이어갔다.
원래 경상도에서 살던 소년의 조상은 증조부 때 충청도 전의로 올라왔다. 그리고 증조부는 할아버지 남매만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할아버지는 동네에 살던 처자를 보쌈 해와 혼인했다. 소년의 이 할머니는 아홉 살 되던 해에 천안의 어느 집 민며느리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이른 나이에 자식도 없이 남편이 세상을 떴기 때문에 할머니는 친정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동네에 과부가 있으면 홀아비가 밤중에 와서 몰래 훔쳐가던 풍속이 있었다. 소위 보쌈으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보쌈해온 것이다. 이후 할머니는 5남매를 두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때가 큰아버지 열한 살, 아버지는 겨우 아홉 살이었으니 가족들 생계는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생계가 막막했던 할머니는 결국 자식들을 데리고 또 친정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할머니 친정 역시,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 오두막의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래서 안방의 친정 식구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굶고 있는 윗방 할머니 가족들에게 밥 한 공기 나눠줄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떡 장사와 이웃집 가사 일을 돕는 등 모진 삶을 이어가며 아이들을 키워가야만 했다.
소년의 큰고모는 조끼를 지어 파는 재봉틀 집을 하던 공주로 출가했다. 소년의 아버지도 이 일을 배워 후에 조치원에서 조끼가게 겸 옷 수선 집을 차렸다.
그때 소년의 아버지는 이웃 여인을 만나 결혼했지만 얼마 후 이혼했다. 소년의 친어머니도 한번 결혼했다가 이혼 후 부강의 친정에 돌아와 있었다. 소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형편에서 모두 재혼하게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결혼 후 생계를 위해 논산, 신의주, 평양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평양 살이 때 큰딸을 임신한 소년 어머니는 부강의 친정으로 와서 출산했다. 출산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전 남편은 아이가 자기 자식인 줄 알고 찾아왔었다고 했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소년의 증조부가 처음 정착했던 충청도 전의全義 공동묘지에 묻혀있던 증조부모 묘소는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을 출산할 즈음 소년의 출생지인 소골로 이장했다. 소년 어머니는 이때 이미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조현병 와중에 소년이 태어난 것이다. 병을 앓고 있던 소년 어머니는 한겨울에 태어난 소년을 찬물로 그것도 밖에서 목욕시켰다. 소년의 출생 상관은 동네 한 아주머니가 맡아 주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조현병이 깊어진 소년 어머니는 상관해주고 있는 아주머니에게까지 욕설을 퍼 부며 모멸감을 주기 일쑤였다.
소년의 큰집에서 지낸 제사는 고조, 증조 그리고 조부의 3대 봉사였다. 그런데 이 3대 봉사 외에 다른 제사가 하나 더 있었고, 이날에는 충북 청원의 ’벌말‘이라는 곳에서 대부라고 불리는 노인 한 분이 따로 와서 제사에 참례했다.
경상도 선산과 칠곡을 뒤져도 조상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 소년 아버지는 이웃 마을, 모시터의 같은 박씨 집안에의 입양을 통해 족보를 만들기로 한다. 마침 청원의 오송에 사는 그 박씨 일가 중 하나가 손이 귀해 조상 제사를 모실 사람이 필요했던 터였다. 이렇게 해서 소년 아버지는 조상과 족보 두 가지 과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성장해오면서 소년 역시 그의 조상과 뿌리가 궁금했으나 어느 날 조상 찾기를 그만두기로 한다, 그 옛날 조상이 경상도 고향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멀고 먼 충청도 전의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건, 그 조상들이 큰 죄를 짓고 야반도주한 것이거나 아니면 역병에 걸려 고향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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