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4/상수와 목수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18
Views
48
상수와 목수

소년은 아버지 얼굴에 희로애락의 감정을 드러낸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본 기억은 더더욱 없다. 그래도 소년은 아주 가끔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마을 이웃들과 시조를 읊조리며 풍류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물론 술이 거나해서다. 그런데 동네 분들이 정말 풍류를 즐긴 것인지, 아니면 양반이나 선비 코스프레를 했던 것인지는 분간하지 못한다.

소년 아버지는 보평, 모시터, 하소골, 능골, 상소골을 퉁쳐 소골이라 불리던 골짜기에서 알아주는 목수였다. 이를테면 이 골짜기의 웬만한 집들은 목수인 소년 아버지가 지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그 시절엔 목수를 대목이라고도 불렀는데 소년은 아버지가 큰 나무를 넘겨놓고 이를 톱과 대패로 능수능란하게 다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지켜보곤 했다.

소년은 또한 아버지가 마을 행사 때마다 상수를 도맡아 풍물패를 이끄는 모습도 자주 지켜보았다. 그러나 꽹과리를 잡은 아버지 모습은 흥겹고 신난다기보다는 근엄한 표정에 가까웠다.

다랑이 밭과 천수답이 대부분이었던 소골의 부동산 거래는 주로 농한기인 한겨울에 이루어졌다. 소년 아버지는 이 고을 부동산 거래의 거간꾼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였는지는 몰라도 겨울철이면 소년 집 사랑방은 마실 온 동네 사람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

소년이 뒤적였던 빛바랜 사진 묶음에는 재봉틀 앞에서 옷을 짓거나 수선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사진도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말해 준 적은 없지만, 소년 아버지는 한때 옷 짓는 일도 했었다는 것이 큰어머니의 귀뜸이었다.

소년 아버지는 농사꾼이었지만 거간꾼, 마을 풍물패의 상수 그리고 목수 등 마을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이를테면 오지랖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서울에서 물을 잘 만났다면 이 병철이나 정 주영처럼 큰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게 소년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년 아버지가 정직하게 사업을 영위했을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소년은 아버지가 멍석에 깔린 쌀을 말로 될 때마다 손바닥으로 말 뒤 끝을 살짝 걷어내는 방법으로 말을 속이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칫 잘못하면 광선狂線을 넘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웃음이 나올 때 계속 웃어대면 여지없이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비굴하며 계집애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훌륭하진 못해도 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왜 난 꾸지람을 들어야 하며, 남의 비웃음을 사야 하는 걸까? 조물주가 저지른 불평등 탓일까?‘

소년은 자신이 너무나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려움이 가장 많은 놈이자 가장 적은 놈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힘의 두려움, 밤의 두려움, 행동의 두려움, 마음의 두려움이 늘 소년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두려움은 생각지 않았다. 불쌍하다면 불쌍하다고 할 수 있을는지. 도무지 마음이 조급하거나 아프거나 하지 않다.

다양한 역할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소년의 아버지는 오십 중반에 접어들면서 소위 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해지며 자리에 누워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나 소년은 아버지가 아픈 건 아픈 거고, 소년은 소년대로 신나게 놀면 그만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부름을 시키면 그저 해줄 뿐이다. 걱정을 하면 입가에 웃음을 흘리면 되는 것이다. 혼내면 며칠 우울해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몸져누우면서 소년의 생활과 가세는 점점 기울어져 갔다. 마땅한 치료 수단이 없던 시절이라 소년은 아버지를 위해 이런저런 병 수발 심부름을 자주 다녀야 했다. 한 번은 소년이 이웃 마을 덤수의 서당 선생 겸 한약방으로 약을 지으러 갈 때 무당인 종억이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어딜 가니?”

“덤수에 가요.”

“약 지으러? 쯧쯧 어린 것이 딱하기도 하지!“

그러나 소년 자신은 스스로 딱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심부름을 시키면 그저 할 뿐이니까. 귀찮다는 생각은 가끔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년의 신세가 어떻다든지 하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건 아마 친절한 무당의 따뜻한 말 때문이었으리라.

집에서 십여 리 길의 덤수 선생에게 약을 지어 돌아올 때 선생이 소년을 마루까지 따라 나오며 걱정했다.

”이거 누구한테 할 얘기는 아니고, 네 아버지가 아무래도 위태하다.“

평소 농담 잘 하는 선생이 심각하게 전한 얘기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 짐짓 어두운 표정을 꾸몄다. 소년의 진심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간 선생한테 혼이 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불효치곤 대장감이지. 웬일인지 입안에서 ‘불효 부모 사 후회’라는 말이 자꾸 맴돈다. 그건 사실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쉬운 때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후회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아는 일이고.

소년의 생각은 평온했다.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설마 못살아 가랴. 부자간에 사랑도 없고, 아버지는 아들을 늘 혼내기만 한다. 그러나 소년은 아버지가 그리 쉽게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는 놈은 없는데, 쓰기만 하니 어쩔 것이냐.“

소년 아버지가 항상 입에 달고 있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우환은 소년을 가장 슬프게 했으며 소년 가정을 쓰러뜨리는 가장 큰 구실을 했다. 근래에 와선 약도 잘 먹지 못하게 된 소년 아버지는 대신 눈물이 많아졌다.

방안에 들어서면 화장터에서 맡을 수 있는 불쾌한 냄새와 솜 탄내가 한꺼번에 퍼진다. 이런 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바로 하게 되는 생각이다.

‘이런 방에서 어떻게 밥을 먹지.’

소년 아버지의 배와 등짝 그리고 허리에는 모두 합쳐 수십여 개의 시커먼 구멍이 생겨 있었다. 뜸으로 살이 타서 생긴 상처들이다.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아마 이 흉터들이 모두 없어지려면 앞으로 수십 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흉터가 그렇게 쉬 없어질 것 같지 않다는 게 소년의 생각이었다.

어느 해 겨울, 소년 아버지가 병원에 가게 되었을 때 돈까지 모두 준비해 두고는 입원 이틀이나 하루 전에는 병원엘 안 가겠다고 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프다고 했는데 오늘은 괜찮다고 하면서. 그리고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또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고 또 2~3일 전에는 다 준비했다가 안 간다고 하고.

소년의 집은 여전히 궁핍 그리고 우환과 짜증의 연속이다. 그러나 소년은 하나뿐인 동생에게만은 이런 환경을 모르게 하고 자라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은 소년이 밟아왔던 그 자취를 그대로 더듬고 있었다. 따뜻한 손길이 필요했던 동생은 나름대로 모든 걸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 동생을 아버지와 계모는 사소한 잘못을 놓고도 크게 나무랐다.

이 모두가 집안의 우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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