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9/바늘 도둑의 작은 죽음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11
Views
154
바늘 도둑의 작은 죽음
아버지는 소년에게 단 10원의 용돈도 줘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이 용돈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소년 아버지는 아들이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소년에게 용돈이 따로 주어지지 않다 보니 다른 돈에서 용돈을 이리저리 충당해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편히 앉아 밥 먹기는 틀린 놈이다.”
소년 아버지가 저녁 밥상을 앞에 놓고 한 말이다. 소년은 고개에 뼈가 없어졌다고 느꼈다. 얼굴을 들 수도 없었고 그 색깔은 홍당무가 되었다. 눈에는 안개가 끼었다.
“봐라. 당장 땔 나무가 없으니 쇠죽 쑤어 주는 일도 얼마나 어려우냐? 한 푼 쓰고, 한 끼 먹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더냐?”
소년 아버지가 왕겨로 쇠죽을 쓰고 방으로 들어오면서 한 말이다. 소년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돈을 버는 대신 쓰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아버지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이런 말을 들으며 소년은 형을 문뜩 떠올렸다.
‘형은 아버지를 편하게 모실 수 있으려나?’
형이나 소년이나 돈만 쓰면서 아버지에게 걱정만 끼쳤지, 뭐 한 가지 이롭게 해 준 일이 없었다. 적어도 아버지 잣대로는 그렇다. 아쉬운 대로 집안에서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사소한 일이라도 아버지를 도와야 할 테지만, 소년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녁 먹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소년은 갑갑했다. 바깥 날씨가 추웠지만, 소년은 점퍼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들은 벗었던 눈을 다시 뒤집어쓰고 있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밖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는다. 마당 끝 우물가로 간 소년은 안산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신나게 불어 제꼈다.
“진지 드셨어유?”
이웃에 사는 아저씨가 다가오자 소년은 건성으로 인사했다. 소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아저씨는 소년 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 역시 또래들이 나오지 않자 집으로 들어섰다. 점퍼를 벗어놓고 아버지와 아저씨가 마주하고 있는 안방으로 건너간 소년은 방 안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년 아버지는 역시 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돈 얘기만 하면 진저리가 났다.
“내가 애들 학비만 아녀도 쌀 한 열 가마 빚지고 땅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소년 아버지의 투정이다. 그러나 소년은 같은 말을 늘 들어온 터라 귓가로 흘리고 있었다.
“작년에도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땅을 팔기는커녕 오히려 샀을 거다.”
이웃집 아저씨를 앞에 두고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소년은 이런 상황을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소년은 더 이상 아버지 얘기나 집안일 그리고 돈에 관해서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돈을 두려워했고 또 그만큼 아버지도 두려웠다.
“또 무엇에 쓸려고 그러니?”
소년이 돈을 달랄 때마다 소년 아버지가 으레 하는 대꾸다. 원 참. 기가 막혀서. 소년은 돈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 가서 창피당하기 또한 싫었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이 싫었다.
그런데 저녁에 아버지가 소년을 불러 돈과 그 용처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에 엉거주춤하며 대답을 미뤘더니 종아리를 때렸다. 맞은 자리는 쑤시고 따가웠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계모는 자식이 종아리를 사정없이 맞고 있는데도 보고만 있었다. 말려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말리기는커녕 더 때려 주었으면 하는 태도다. 이러니까 소년 형제와 남매들이 계모에게 어머니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흥! 나한테 어머니 대우받기는 틀렸다구!’
소년은 다시는 아버지한테 돈을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돈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봄, 가을 소풍 때는 약간의 용돈을 주긴 했다. 그러나 소년은 소풍에서 돌아오면서 이 용돈으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진로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귀가하곤 했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가난만을 저주하던 소년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마누라를 여럿 두고 그 식솔들을 모두 먹여 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처구니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이뿐이 아니었다. 허구한 날 고장이 잦은 호미와 낫 등의 농기구에 왜 상표를 붙여 파는지 소년은 의아했다. 상표를 붙이지 않고 팔아야 고장이 나도 뒤탈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자라난 소년이니 남의 물건 하나쯤 슬쩍 하는 것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소년이 자라던 시절은 궁색하기도 했거니와 시골이라 모든 것이 궁핍했다. 그러니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도 예사롭던 시절이다.
소년은 휴일인 식목일 저녁때 동무들과 어울려 놀다가 밥을 훔쳐 먹기로 했다. 당시는 이 역시 사랑방에 모여 놀며 즐기든 놀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런 놀이는 다음 날 아침이면 훔친 아이들의 이름까지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소년 일행이 밥을 훔친 집은 모두 네 집으로 ’명옥‘이네의 생채, ’동예‘네 부엌에서는 아무것도 훔치지 못해 빈손으로 나오고, ’순자‘집에서 쌀밥 한 그릇, ’상욱이네에서도 쌀밥 한 그릇을 훔친 후 ‘상범’네 사랑방에서 비벼 먹었다.
하루는 양은그릇을 리어카에 싣고 동네방네 찾아다니며 판매하는 이동 장수가 마을에 왔다. 이 양은그릇 장수는 리어카 한구석에 엿판도 가지고 다녔는데 엿을 살짝 훔쳐 먹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물론 소년 혼자서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이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소년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따로 놀고 있었다.
소년과 같은 또래의 동무 네 명은 아랫마을로 마실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야. 우리, 가게에서 사탕 훔쳐 먹자.”
“그러자. 가게 주인도 아랫마을 이발소에 있더라.”
“아. 그럼 노인 아니면 그 부인이 가게를 지키고 있겠군.”
소년 일행이 아랫마을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주고받은 대화였다.
“그럼 누가 단 일원 어치라도 과자를 사.”
“내가 사지.”
일행 중, 순용이가 나섰다. 소년 일행은 가게로 들어섰다. 순용이가 주인 노인과 교섭하는 동안 병태는 과자를 훔쳐서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은 또 세 개들이 과자 한 줄을 받아 와서 일행과 나눠 먹었다. 이 건 장난을 가장한 남의 재산 도둑인 것이다. 지금 같으면 소년원행 감이었을 것이다.
소년은 하교 길에서 소년이 지금까지 주은 돈 중 가장 많은 금액인 40원을 습득했다. 그리고는 이 돈 중 빵, 펜촉, 복숭아 등을 구입하며 15원을 썼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소년은 나머지 돈도 다 써버릴 심산이다. 나쁘다는 건 알지만 할 수 없다. 소년은 돈이 넉넉했다면 40원 같은 건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경찰서에 맡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밀라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장년에게는 전혀 뜻밖의 보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재직 회사의 사장이 바뀌면서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장년을 뉴욕지사장으로 발령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냥 발령을 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국영 방송 사장 출신의 신임 사장은 장년을 사장실로 불러 뉴욕지사장으로 발령 내겠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미리 귀뜸 해 주었다.
장년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이런 인사를 하면 회사가 소란스러워질 것이라며 고사한 후 사장실을 나왔다. 밀라노지사에서 귀임한 후 아직 이삿짐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해외지사장으로 발령받는 일은 그간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장년을 다시 부른 사장은
‘자네 말이 맞더군.’
하며 뉴욕지사장 발령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임원들과 상의해 본 결과라고 했다. 임원들이 이 인사를 말렸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안으로 제시한 보직이었다. 회사 수익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전국의 공항과 해항 면세점 운영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장년은 적극적으로 고사했다. 회사 최대 이권 부서라서 위험 부담이 매우 큰 보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변명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고사는 받아줄 수 없다며 사장이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한때 계약 담당 과장으로 이 분야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장년은 정말 몸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보직에 임했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친한 후배가 업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인사를 왔다. 당시 회사를 그만둔 후 자기 사업을 하고 있던 후배였다. 그 후배는 장년이 계약 담당 과장일 때 계약을 담당하던 실무자였고 대동한 업자는 그때 납품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었다. 공항 면세점에 칠기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때는 억대의 월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후배는 장년이 어려운 보직을 맡았으니 필요한 때 이 사람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계약 담당 과장 때까지만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던 말이었다.
그러나 황금을 돌같이 보면서 보직 수행을 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조직 내 최대 이권 부서의 책임자로 발령받으면서 문제가 되지 않는 돈은 받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보직 관리를 위한 필요악이기도 했다. 이 업자는 추석과 설 명절에 떡값이라며 돈 봉투를 가져왔다. 영업이 잘되어 매입 단가를 내려준 경우라서 대가성 없이 받은 그야말로 떡값이었다. 하지만 자수정을 납품하던 다른 업자와 전임 보직자 사이에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른 업자가 장년의 전임자를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검찰은 민원 관련 업체 외에 유사업체 두 곳까지 수사하게 되면서 그 불똥이 후임자인 장년에게까지 튀게 되었다. 이때는 위험한 보직을 무사히 마치고 다른 보직으로 옮겨와 있었지만, 장년은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직 처분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검찰에 구속된 전임자에 비하면, 수사 한 번 받지 않은 징계였지만 이 일은 장년이 팔자를 바꾸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 결백하게 업자를 대했어야 하는 건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일을 지켜보면서 같은 직장의 한 동료가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이 건 피할 수가 없는 자네의 운명일세그려.’
그러나 인생은 어차피 작은 죽음들의 연속이고 또 이런 작은 죽음들을 잘 넘겨야만 마침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게 장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년은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도 있는 이 일을 담담히 받아넘겼다.
아버지는 소년에게 단 10원의 용돈도 줘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이 용돈 없이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소년 아버지는 아들이 당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소년에게 용돈이 따로 주어지지 않다 보니 다른 돈에서 용돈을 이리저리 충당해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편히 앉아 밥 먹기는 틀린 놈이다.”
소년 아버지가 저녁 밥상을 앞에 놓고 한 말이다. 소년은 고개에 뼈가 없어졌다고 느꼈다. 얼굴을 들 수도 없었고 그 색깔은 홍당무가 되었다. 눈에는 안개가 끼었다.
“봐라. 당장 땔 나무가 없으니 쇠죽 쑤어 주는 일도 얼마나 어려우냐? 한 푼 쓰고, 한 끼 먹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더냐?”
소년 아버지가 왕겨로 쇠죽을 쓰고 방으로 들어오면서 한 말이다. 소년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돈을 버는 대신 쓰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아버지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이런 말을 들으며 소년은 형을 문뜩 떠올렸다.
‘형은 아버지를 편하게 모실 수 있으려나?’
형이나 소년이나 돈만 쓰면서 아버지에게 걱정만 끼쳤지, 뭐 한 가지 이롭게 해 준 일이 없었다. 적어도 아버지 잣대로는 그렇다. 아쉬운 대로 집안에서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서 사소한 일이라도 아버지를 도와야 할 테지만, 소년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녁 먹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던 소년은 갑갑했다. 바깥 날씨가 추웠지만, 소년은 점퍼를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다.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산들은 벗었던 눈을 다시 뒤집어쓰고 있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밖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는다. 마당 끝 우물가로 간 소년은 안산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신나게 불어 제꼈다.
“진지 드셨어유?”
이웃에 사는 아저씨가 다가오자 소년은 건성으로 인사했다. 소년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한 아저씨는 소년 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 역시 또래들이 나오지 않자 집으로 들어섰다. 점퍼를 벗어놓고 아버지와 아저씨가 마주하고 있는 안방으로 건너간 소년은 방 안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소년 아버지는 역시 돈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돈 얘기만 하면 진저리가 났다.
“내가 애들 학비만 아녀도 쌀 한 열 가마 빚지고 땅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소년 아버지의 투정이다. 그러나 소년은 같은 말을 늘 들어온 터라 귓가로 흘리고 있었다.
“작년에도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땅을 팔기는커녕 오히려 샀을 거다.”
이웃집 아저씨를 앞에 두고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소년은 이런 상황을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소년은 더 이상 아버지 얘기나 집안일 그리고 돈에 관해서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돈을 두려워했고 또 그만큼 아버지도 두려웠다.
“또 무엇에 쓸려고 그러니?”
소년이 돈을 달랄 때마다 소년 아버지가 으레 하는 대꾸다. 원 참. 기가 막혀서. 소년은 돈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 가서 창피당하기 또한 싫었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이 싫었다.
그런데 저녁에 아버지가 소년을 불러 돈과 그 용처에 관해 이것저것 묻기에 엉거주춤하며 대답을 미뤘더니 종아리를 때렸다. 맞은 자리는 쑤시고 따가웠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계모는 자식이 종아리를 사정없이 맞고 있는데도 보고만 있었다. 말려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말리기는커녕 더 때려 주었으면 하는 태도다. 이러니까 소년 형제와 남매들이 계모에게 어머니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흥! 나한테 어머니 대우받기는 틀렸다구!’
소년은 다시는 아버지한테 돈을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돈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봄, 가을 소풍 때는 약간의 용돈을 주긴 했다. 그러나 소년은 소풍에서 돌아오면서 이 용돈으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진로 소주 한 병을 사 가지고 귀가하곤 했다.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가난만을 저주하던 소년은 앞으로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마누라를 여럿 두고 그 식솔들을 모두 먹여 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처구니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이뿐이 아니었다. 허구한 날 고장이 잦은 호미와 낫 등의 농기구에 왜 상표를 붙여 파는지 소년은 의아했다. 상표를 붙이지 않고 팔아야 고장이 나도 뒤탈이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자라난 소년이니 남의 물건 하나쯤 슬쩍 하는 것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소년이 자라던 시절은 궁색하기도 했거니와 시골이라 모든 것이 궁핍했다. 그러니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도 예사롭던 시절이다.
소년은 휴일인 식목일 저녁때 동무들과 어울려 놀다가 밥을 훔쳐 먹기로 했다. 당시는 이 역시 사랑방에 모여 놀며 즐기든 놀이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런 놀이는 다음 날 아침이면 훔친 아이들의 이름까지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소년 일행이 밥을 훔친 집은 모두 네 집으로 ’명옥‘이네의 생채, ’동예‘네 부엌에서는 아무것도 훔치지 못해 빈손으로 나오고, ’순자‘집에서 쌀밥 한 그릇, ’상욱이네에서도 쌀밥 한 그릇을 훔친 후 ‘상범’네 사랑방에서 비벼 먹었다.
하루는 양은그릇을 리어카에 싣고 동네방네 찾아다니며 판매하는 이동 장수가 마을에 왔다. 이 양은그릇 장수는 리어카 한구석에 엿판도 가지고 다녔는데 엿을 살짝 훔쳐 먹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물론 소년 혼자서 저지른 일은 아니었다. 이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소년이지만 생각과 행동은 따로 놀고 있었다.
소년과 같은 또래의 동무 네 명은 아랫마을로 마실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야. 우리, 가게에서 사탕 훔쳐 먹자.”
“그러자. 가게 주인도 아랫마을 이발소에 있더라.”
“아. 그럼 노인 아니면 그 부인이 가게를 지키고 있겠군.”
소년 일행이 아랫마을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주고받은 대화였다.
“그럼 누가 단 일원 어치라도 과자를 사.”
“내가 사지.”
일행 중, 순용이가 나섰다. 소년 일행은 가게로 들어섰다. 순용이가 주인 노인과 교섭하는 동안 병태는 과자를 훔쳐서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은 또 세 개들이 과자 한 줄을 받아 와서 일행과 나눠 먹었다. 이 건 장난을 가장한 남의 재산 도둑인 것이다. 지금 같으면 소년원행 감이었을 것이다.
소년은 하교 길에서 소년이 지금까지 주은 돈 중 가장 많은 금액인 40원을 습득했다. 그리고는 이 돈 중 빵, 펜촉, 복숭아 등을 구입하며 15원을 썼다.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소년은 나머지 돈도 다 써버릴 심산이다. 나쁘다는 건 알지만 할 수 없다. 소년은 돈이 넉넉했다면 40원 같은 건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해 경찰서에 맡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밀라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장년에게는 전혀 뜻밖의 보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재직 회사의 사장이 바뀌면서 인사가 단행되었는데 장년을 뉴욕지사장으로 발령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냥 발령을 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국영 방송 사장 출신의 신임 사장은 장년을 사장실로 불러 뉴욕지사장으로 발령 내겠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미리 귀뜸 해 주었다.
장년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이런 인사를 하면 회사가 소란스러워질 것이라며 고사한 후 사장실을 나왔다. 밀라노지사에서 귀임한 후 아직 이삿짐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해외지사장으로 발령받는 일은 그간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 후 장년을 다시 부른 사장은
‘자네 말이 맞더군.’
하며 뉴욕지사장 발령을 철회하겠다고 했다. 임원들과 상의해 본 결과라고 했다. 임원들이 이 인사를 말렸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대안으로 제시한 보직이었다. 회사 수익원으로 운영하고 있는 전국의 공항과 해항 면세점 운영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장년은 적극적으로 고사했다. 회사 최대 이권 부서라서 위험 부담이 매우 큰 보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변명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고사는 받아줄 수 없다며 사장이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한때 계약 담당 과장으로 이 분야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장년은 정말 몸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보직에 임했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친한 후배가 업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인사를 왔다. 당시 회사를 그만둔 후 자기 사업을 하고 있던 후배였다. 그 후배는 장년이 계약 담당 과장일 때 계약을 담당하던 실무자였고 대동한 업자는 그때 납품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었다. 공항 면세점에 칠기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이때는 억대의 월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후배는 장년이 어려운 보직을 맡았으니 필요한 때 이 사람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계약 담당 과장 때까지만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던 말이었다.
그러나 황금을 돌같이 보면서 보직 수행을 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조직 내 최대 이권 부서의 책임자로 발령받으면서 문제가 되지 않는 돈은 받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보직 관리를 위한 필요악이기도 했다. 이 업자는 추석과 설 명절에 떡값이라며 돈 봉투를 가져왔다. 영업이 잘되어 매입 단가를 내려준 경우라서 대가성 없이 받은 그야말로 떡값이었다. 하지만 자수정을 납품하던 다른 업자와 전임 보직자 사이에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른 업자가 장년의 전임자를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일로 검찰은 민원 관련 업체 외에 유사업체 두 곳까지 수사하게 되면서 그 불똥이 후임자인 장년에게까지 튀게 되었다. 이때는 위험한 보직을 무사히 마치고 다른 보직으로 옮겨와 있었지만, 장년은 결국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정직 처분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퇴사를 결심하게 된다. 검찰에 구속된 전임자에 비하면, 수사 한 번 받지 않은 징계였지만 이 일은 장년이 팔자를 바꾸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 결백하게 업자를 대했어야 하는 건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 일을 지켜보면서 같은 직장의 한 동료가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이 건 피할 수가 없는 자네의 운명일세그려.’
그러나 인생은 어차피 작은 죽음들의 연속이고 또 이런 작은 죽음들을 잘 넘겨야만 마침내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게 장년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년은 충격이라면 충격일 수도 있는 이 일을 담담히 받아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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