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13/콩가루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05
Views
120
콩가루

가정이 뭐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이고, 지친 하루를 쉴 수 있게 하는 곳이라고? 말은 좋다만, 그런 곳인데. 소년은 왜 이렇게 집이 싫은지. 소년은 학교에서 아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야 아버지의 돈 걱정. 계모와의 갈등, 동생과의 다툼. 정말로 집이란 곳이 죽고 싶도록 싫다. 휴식시켜주고 안정을 주기는커녕, 성질 돋우고. 사납게 만들고. 에이 빌어먹을! 무엇이든지 다 때려치웠으면 좋겠다. 진정 때려 부수어야 할까 보다.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소년이다. 그리고 부자 관계, 모자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싶다.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며 스스로 살아나가고 싶다. 소년은 시시콜콜 아버지 생각에 지배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늦가을, 우수수 쏟아지는 플라타나스 낙엽들이 운동장을 바람 부는 대로 헤집고 다닌다.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고 메마른 낙엽 위를 천천히 걷고 있다. 외로움이 스며온다. 소년은 뇌까렸다.

‘답답한 내 가슴 속을 깨끗이 씻어가 줄 그런 바람은 없을까?’

한 마을에서 서로 위하며 잘 지내고 있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형제다. 소년과 형 그리고 동생의 사이다. 소년은 형을 둘도 없는 마음의 기둥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주 다투긴 하지만 동생도 남으로 생각한 적은 없다. 그런데 소년이 장차 어른이 되어 결혼하면 거기는 4촌이 성립한다. 소년 형제가 그렇듯이 아버지와 큰아버지도 서로 믿고 또 한없이 정다우시다. 그러나 그들의 자식인 소년과 사촌 특히 동갑내기 사촌인 상철이 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미워한다. 상철은 늘 소년을 이상하게 보고 있다. 소년이 잘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탓인지 어쩐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런 태도의 소년 동갑내기 사촌, 상철은 이후 결국 가족묘지 문제를 주도함으로써 사촌지간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형, 동생 그리고 소년 사이에 태어나게 될 자식들도 이러려나? 그들이 자라나면 4촌 관계다. 그러면... 아! 그 때 가면 사이가 더 크게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이 그러니까.

고개 두 개를 넘고 큰 냇물을 건너 십여 리 길을 걸어야 소년은 국민학교에 닿을 수가 있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이 큰 냇물에 황토물이 꽉 차 흘렀다. 냇물 폭이 넓어 급류는 아니었지만, 물이 가슴까지 넘쳐와 아이들이 건너기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책 보따리를 머리에 얹은 아이들은 겁도 없이 이 물을 건넜다. 갈수기에 물이 잦아들어도 이 냇물의 중심은 수심이 낮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냇물을 나무로 엮은 외나무다리로 건너야만 했다.

이 시절 아이들은 책보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 이걸 메고 걷거나, 뛰면 책이 흘러내려 가끔 다시 동여매야 했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던 날 새 교과서를 받아든 소년은 운수가 없으려니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책보가 흘려내려 책이 모두 물에 빠져 버렸다, 집에 돌아온 소년은 이 일 때문에 작은 누나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며칠 동안 소년의 작은 누나 집에 머물던 동생이 돌아왔다. 가지고 갔던 가방이 불룩하다. 아버지 신으라고 신발 한 켤레(350원), 양말 세 켤레(아버지, 동생, 소년), 과일 한 봉 다리. 금액으로 따진다면 모두 해서 천여 원가량 되겠다. 그런데 계모 몫은 없었다. 소년의 작은 누나는 계모를 생각지 않은 것이다. 계모 얼굴이 흐려졌다.

계모에게 홀대받는 자식 코스프레로 똘똘 뭉쳐있던 소년의 남매들은 그러나 성장 이후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모두 안면을 몰수하는 관계로 변해갔다.

밝은 달빛 아래서 새하얀 눈이 눈부시도록 반사되어 온다. 만월이다. 이런 모습은 소년에게 낭만적인가? 천만에. 소년의 마음은 눈을 보며 낭만에 젖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아, 이 눈이 모두 쌀가루라면.’

왜 똑같은 세상에 태어나서 소년만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할까? 세상은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런 집안에 태어났을까? 우리 집보다 좋은 집, 부자집, 잘 사는 집, 웃으며 사는 집이 많지 않은가?

’비록, 똑똑한 놈은 아니지만, 차라리 바보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은가. 걱정 없이 살고, 할 일 없이 살고, 돈도 쓸 필요가 없고.‘

60년대,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 특히 농촌 사람들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공휴일이다. 심심하다. 출출하다. 답답하다. 벽시계가 오후 세 시를 알렸다. 소년은 잠옷 겸 내의를 벗어 던지고 바지로 갈아입었다. 밖은 구질구질한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을 받쳐 든 소년은 이웃 마을, 보평의 이발소를 향해 걸었다. 이발소에는 국민학교 동창생 철민이가 심부름하고 있었다.

철민이는 국민학교 때부터 노력을 많이 하는 아이였다. 집안이 어려워 비록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공부를 따로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소년은 그런 철민이를 지켜보면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서로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도 미안한데 이런 철민이한테 머리까지 깎고, 감겨야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것이다. 철민이는 소년의 머리를 깎고 감기면서 무슨 생각을 하려나? 소년은 오히려 자신이 철민이의 머리를 깎아 주고, 감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소년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철민이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쓰던 헌 교과서라도 챙겨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실상, 불평 한마디도 해서는 안 될 입장인 것이다. 누구는 수업료를 내지 못해서 학교도 못 다니고 있는데 소년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더욱이 조치원은 교통이 좋아 우수한 학생들은 모두 인근의 대전, 청주, 공주 등 더 큰 도회지로 몰려가서 그 덕에 장학금까지 받고 있지 않은가. 누구는 계모 박해 어쩌고 하지만, 소년에게는 사실상 그런 것도 없다. 다만, 친어머니가 아닌 데 대한 스스로의 불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년의 생모가 조현병을 앓고 있는 채로 지금 살아있다면 소년의 행동은 어땠을까? 어머니 대우를 안 했을지도 모른다. 누군 국졸이지만 소년은 이제 중졸 이상은 될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이 여러모로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래. 행운아야, 행운아!

밭에는 보리가 팼다. 잠자리도 나왔다. 길바닥에는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뱀의 주검들이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있다. 벌어진 상처를 향해 거머리들이 쉴 새 없이 파고들었다. 소름 끼치는 거머리들이 떼어내면 또 붙고, 떼어내면 또 붙고. 끈끈한 공기 속에 묻혀 괴롭게 신음하고 있는 소년의 모습. 악몽이었다.

녹음이 우거진 맑은 숲속에서 깨끗한 시냇물이 바위틈을 흘러내리고. 하늘은 맑게 개여 높이 보이고. 지평선에는 입안에 닿기만 하면 녹아버릴 듯한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있다. 소년은 보드라운 잔디가 주욱 깔려있는 곳에 앉아 있고. 노송 가지에서는 아름다운 새들이 노래 부르고. 햇빛도 찬란한 그곳에 소년은 어떤 여자애와 나란히 누워 있다. 그러나 이건 소년이 깨어있으며 꾼 몽상일 뿐이다. 하지만, 소년의 꿈속에서는 거머리가 여전히 자꾸자꾸 달라붙고 달라붙은 거머리들은 혈관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이 그리는 꿈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활개로 하늘을 치며 세상을 휘저어 가는 담대한 사람. 바로 소년이 꿈꾸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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