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14/아로새긴 화석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1:04
Views
126
아로새긴 화석
50여 일간 소년의 방학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라면 오후에 소 뜯기는 두어 시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두어 시간만은 소년에게 주어진 온전한 자유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은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집에 있는 시간은 항상 구속받는 거냐? 그렇지. 구속받는 것이지. 언제 어떻게 어떤 수행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나 소 뜯기는 시간만은 예외다. 모든 행동은 소년 마음대로다. 소만 잘 뜯어 먹는다면. 그러니 소가 소년을 구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년 자유시간만의 책임감일 뿐이다. 어쨌든 그 시간만큼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시간이다. 학생 애창곡집을 들고 못난 소리지만 목청껏 노래도 불러보고,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고, 조용하고 한적하고 시원한 곳에서 몽상에 잠길 수도 있다. 또한, 땡벌이나 말벌들과의 일대 전투는 드릴 만점이다. 마치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가 연상되기도 하는 이런 기회가 앞으로 또 찾아와 줄까나?
소년은 나름의 오랜 고민 끝에 가슴에 묻어두고만 있던 소녀에게 편지를 썼다.
오직, 선영의 오랜 친구로부터 방학 중에 배달된 글이라고 생각하고,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좋겠어. 사실 이렇게 선영에게 펜을 들기까지는 오랫동안 망설임이 있었지.
‘선영에게 내 존재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내가 이런 일을 한다면 나 자신이나 선영에게 어떠한 반향과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
이런 의문과 두려움이 망설임의 이유들이지. 그리고 나의 조그마한 자존심도 포함되어 있고.
‘나는 필요에 따라서, 많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남학생들로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이 건 바로 이 모든 망설임을 뿌리치고 선영에게 펜을 들게 한 생각이지.
선영에게 이렇게 편지하는 이유는 호기심과 그리고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따금 느껴지는 고독감과 외로움 때문이야. 또 하나. 친구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나에게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자긍심 때문이기도 하지. 왜, 그 여자 친구가 하필 선영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선영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몰라.
오늘 선영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성 관계의 결핍과 그에 따른 대인관계의 우, 열감에 관해서야. 청순하고 순결한 이성 교제는 많은 꿈과 희망이 담겨 있고, 낭만이 함께 한다고 생각해. 사춘기를 지나서면서 소년 소녀들은 모두 이것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말하려 하지는 않지. 사실은 말하고 싶지만, 대개, 그들 환경과 그런 것이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라는 게 더 옳을 것 같기도 해.
그동안, 이런 생각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야. 그것은 친구들 간의 대화 속에서, 독서를 통해서, 우리보다 전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알아낼 수 있었지. 무엇인가가 우리들을 적절하게 이어만 준다면 우리는 가슴이 후련하도록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선영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지. 불행히도 만일 선영이가 내 생각에 동조할 수 없다면 나에게 순 서울 산의 펜 프렌드를 소개해주면 좋겠어. 그러나 난 이 편지를 소중한 사금석으로 생각하겠어. 희망과 실망, 용기와 패배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나에게 주어질는지?
소년은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밖에서 우체부의 거만한 - 꼭 학교에서 선생이 출석을 부르는 듯한 -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상은!”
그건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멈춤과 동시였다. 소년은 우체부의 그런 목소리가 거슬리진 않았다. 우체부가 소년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사실은 그런 모든 것 위에 편지 발송인의 이름 때문이리라. 일반용 흰 봉투의 뒷면 왼쪽 밑에 ‘선영’이라고 쓰여 진 글씨가 확 클로즈업되어온 것이다. 우체부가 떠나가자마자 소년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
상은아, 그동안 잘 지냈어? 답장이 늦어 화 많이 났지? 이렇게 답장이 늦은 점,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어. 상은의 편지를 받고 어제 밤에 무슨 꿈을 꾸었더라고 생각하리만치 기뻤어.
오랫동안 함께 공부해서 다정한 벗인 우리가 갑자기 편지를 교환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해. 상은이 모습을 좀 더 확실히 생각하려 해도 그렇지가 못해 속상하기도 하고.
그리고 저번에 친구들 만나러 소골에 갔을 때 상은일 먼발치서 바라보았어. 쫓아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 우리 서로 내외하는 사이인가?
유머와 익살을 간직한 듯한 상은이 인상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순진함이 난 좋아. 앞으로 길에서라도 서로 만난다면 맑게 웃고, 또 구김살 없는 사이가 되도록 노력하면 좋겠어.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 큼직큼직하고, 전엔 하지 않던 새로운 대화를 나누게 되니 모두가 컸구나. 또 모두 변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웃음 짓게 되는 것 같아. 앞으로는 좀 더 밝은 희망을 바라보며 곱게 커갔으면 좋겠어. 아쉬운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네. 다시 한 번 회답이 늦은 점 사과하면서 이만 줄일 게. 안녕.
그건 참말로 긴 세월이다. 소년이 살아온 생애와 비교해 본다면. 쌓이고 쌓이는 중에 선영은 지워 버릴 수 없는 화석이 되어버리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 애를 단념해야 한다고 다짐해 온 지도 햇수로 수년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애는 소년의 마음속에 또렷이 각인되어왔다.
선영이 또 편지를 보내왔다. 같이 기숙하고 있는 여학생이라면서 어느 여학생을 소개했다. 편지해보라고.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소년은 두 여학생에게 동시에 편지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든. 선영의 마음 상태는 지금 어떤 것일까? 선영을 포기하고(그러나 절대로 그러고 싶진 않다.) 채 순옥이라는 여학생과 펜팔 좀 한다? 선영과는 왠지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모르는 소녀가 편지 대상으로서는 오히려 적격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생각했다. 만일 선영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채 순옥과의 편지가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날이 지나갔다. 오늘은 음력 정월 초사흘이다. 그렇지만 소년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어머니 묘소에 가 성묘했다. 웬일인지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시선을 굴절시켰기 때문에 소년은 떨리는 세상을 보았을 뿐이다. 한없이 눈물을 쏟은 소년은 이내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아, 왜 이리 가슴이 쓰라린지.
‘누군가 나를 좀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수만 있다면.’
얼마를 울었는지 모르지만, 소년의 가슴이 후련해졌다. 이마를 묘지에 박고 있던 소년 손에는 성근 흙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50여 일간 소년의 방학 생활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라면 오후에 소 뜯기는 두어 시간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두어 시간만은 소년에게 주어진 온전한 자유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은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집에 있는 시간은 항상 구속받는 거냐? 그렇지. 구속받는 것이지. 언제 어떻게 어떤 수행 명령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그러나 소 뜯기는 시간만은 예외다. 모든 행동은 소년 마음대로다. 소만 잘 뜯어 먹는다면. 그러니 소가 소년을 구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년 자유시간만의 책임감일 뿐이다. 어쨌든 그 시간만큼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시간이다. 학생 애창곡집을 들고 못난 소리지만 목청껏 노래도 불러보고, 틈틈이 공부도 할 수 있고, 조용하고 한적하고 시원한 곳에서 몽상에 잠길 수도 있다. 또한, 땡벌이나 말벌들과의 일대 전투는 드릴 만점이다. 마치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가 연상되기도 하는 이런 기회가 앞으로 또 찾아와 줄까나?
소년은 나름의 오랜 고민 끝에 가슴에 묻어두고만 있던 소녀에게 편지를 썼다.
오직, 선영의 오랜 친구로부터 방학 중에 배달된 글이라고 생각하고,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좋겠어. 사실 이렇게 선영에게 펜을 들기까지는 오랫동안 망설임이 있었지.
‘선영에게 내 존재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내가 이런 일을 한다면 나 자신이나 선영에게 어떠한 반향과 결과가 일어날 것인가.’
이런 의문과 두려움이 망설임의 이유들이지. 그리고 나의 조그마한 자존심도 포함되어 있고.
‘나는 필요에 따라서, 많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물론 그들은 모두 남학생들로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이 건 바로 이 모든 망설임을 뿌리치고 선영에게 펜을 들게 한 생각이지.
선영에게 이렇게 편지하는 이유는 호기심과 그리고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따금 느껴지는 고독감과 외로움 때문이야. 또 하나. 친구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나에게도 여자 친구가 있다는 자긍심 때문이기도 하지. 왜, 그 여자 친구가 하필 선영이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선영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몰라.
오늘 선영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성 관계의 결핍과 그에 따른 대인관계의 우, 열감에 관해서야. 청순하고 순결한 이성 교제는 많은 꿈과 희망이 담겨 있고, 낭만이 함께 한다고 생각해. 사춘기를 지나서면서 소년 소녀들은 모두 이것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말하려 하지는 않지. 사실은 말하고 싶지만, 대개, 그들 환경과 그런 것이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 그리고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할 뿐이라는 게 더 옳을 것 같기도 해.
그동안, 이런 생각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야. 그것은 친구들 간의 대화 속에서, 독서를 통해서, 우리보다 전 세대에 살았던 사람들로부터 알아낼 수 있었지. 무엇인가가 우리들을 적절하게 이어만 준다면 우리는 가슴이 후련하도록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선영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지. 불행히도 만일 선영이가 내 생각에 동조할 수 없다면 나에게 순 서울 산의 펜 프렌드를 소개해주면 좋겠어. 그러나 난 이 편지를 소중한 사금석으로 생각하겠어. 희망과 실망, 용기와 패배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나에게 주어질는지?
소년은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중이었다. 밖에서 우체부의 거만한 - 꼭 학교에서 선생이 출석을 부르는 듯한 -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 상은!”
그건 자전거 브레이크 소리가 멈춤과 동시였다. 소년은 우체부의 그런 목소리가 거슬리진 않았다. 우체부가 소년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을 테니까. 사실은 그런 모든 것 위에 편지 발송인의 이름 때문이리라. 일반용 흰 봉투의 뒷면 왼쪽 밑에 ‘선영’이라고 쓰여 진 글씨가 확 클로즈업되어온 것이다. 우체부가 떠나가자마자 소년은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었다.
상은아, 그동안 잘 지냈어? 답장이 늦어 화 많이 났지? 이렇게 답장이 늦은 점,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어. 상은의 편지를 받고 어제 밤에 무슨 꿈을 꾸었더라고 생각하리만치 기뻤어.
오랫동안 함께 공부해서 다정한 벗인 우리가 갑자기 편지를 교환하는 사이라고 생각하니 당황스러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기도 해. 상은이 모습을 좀 더 확실히 생각하려 해도 그렇지가 못해 속상하기도 하고.
그리고 저번에 친구들 만나러 소골에 갔을 때 상은일 먼발치서 바라보았어. 쫓아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 우리 서로 내외하는 사이인가?
유머와 익살을 간직한 듯한 상은이 인상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순진함이 난 좋아. 앞으로 길에서라도 서로 만난다면 맑게 웃고, 또 구김살 없는 사이가 되도록 노력하면 좋겠어.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 큼직큼직하고, 전엔 하지 않던 새로운 대화를 나누게 되니 모두가 컸구나. 또 모두 변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웃음 짓게 되는 것 같아. 앞으로는 좀 더 밝은 희망을 바라보며 곱게 커갔으면 좋겠어. 아쉬운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네. 다시 한 번 회답이 늦은 점 사과하면서 이만 줄일 게. 안녕.
그건 참말로 긴 세월이다. 소년이 살아온 생애와 비교해 본다면. 쌓이고 쌓이는 중에 선영은 지워 버릴 수 없는 화석이 되어버리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그 애를 단념해야 한다고 다짐해 온 지도 햇수로 수년이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그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애는 소년의 마음속에 또렷이 각인되어왔다.
선영이 또 편지를 보내왔다. 같이 기숙하고 있는 여학생이라면서 어느 여학생을 소개했다. 편지해보라고.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소년은 두 여학생에게 동시에 편지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든. 선영의 마음 상태는 지금 어떤 것일까? 선영을 포기하고(그러나 절대로 그러고 싶진 않다.) 채 순옥이라는 여학생과 펜팔 좀 한다? 선영과는 왠지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모르는 소녀가 편지 대상으로서는 오히려 적격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생각했다. 만일 선영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채 순옥과의 편지가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설날이 지나갔다. 오늘은 음력 정월 초사흘이다. 그렇지만 소년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어머니 묘소에 가 성묘했다. 웬일인지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 눈물이 시선을 굴절시켰기 때문에 소년은 떨리는 세상을 보았을 뿐이다. 한없이 눈물을 쏟은 소년은 이내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아, 왜 이리 가슴이 쓰라린지.
‘누군가 나를 좀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수만 있다면.’
얼마를 울었는지 모르지만, 소년의 가슴이 후련해졌다. 이마를 묘지에 박고 있던 소년 손에는 성근 흙이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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