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17/일손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6 10:58
Views
94
일손
아침엔 담배 밭고랑을 극젱이로 갈았다. 소년, 이웃 아저씨, 동생과 셋이서 끌고 아버지가 쟁기를 잡고 밭고랑을 갈았다. 소년은 이때 비로소 소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에는 소를 뜯기러 당골로 갔다. 소년과 규연. 동균. 재봉. 종옥은 소금과 성냥을 챙겨가서 개구리와 가재를 잡아 구어 먹었다.
소년 아버지는 보리를 베고 소년은 그걸 지게로 날랐다. 보리를 나르다 싫증이 난 소년은 냇가로 멱 감으러 갔다. 멱 감고 난 소년은 더 이상 보리 나르기가 싫어져서 동생과 함께 냇가에서 놀았다. 이 일로 죄책감에 사로잡힌 소년은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소년은 이제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반공일인 토요일, 소년은 학교에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머슴과 함께 벼를 베고 있었다. 소년도 아버지 일손을 돕기 위해 낫을 들었다. 벼에다가 낫을 가져다 대본 소년은 낫질이 예상외로 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낫질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소년은 벼를 베며 생각했다.
‘나도 이제 어른이 됐나 본데? 올해는 내가 심은 모를 내가 베기까지 하다니!‘
이렇게 생각하니 소년은 한층 더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머슴은 벼를 베다가도, 허리가 아프다며 자꾸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만만했다.
’아버지가 칭찬해 주실 테지.‘
소년은 기대감에 부풀어 벼를 베었다. 그러나 소년의 생각과는 달리 벼를 한 논 다 베었을 때 소년 아버지는 소년이 베어놓은 볏단을 보고 꾸중했다. 정성을 들이지 않고 벼를 베었기 때문이란다. 소년은 꾸중 끝에 아버지가 한 말을 기억한다.
“이놈아. 농사짓는 집에서 그 고생해가며 농사지어 놨거늘. 벼 한 포기, 쌀 한 톨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 줄 헤아리며 베어야 해.”
소년은 아직까지 학교를 빠지면서까지 집안일을 도운 적은 없었지만, 토요일을 끼고 차례로 한글날과 일요일이 끼는 바람에 집에서 하루 결석할 것을 요구했고, 소년 역시 선뜻 응낙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은 소년 가정의 분위기와 소년의 학교생활 태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소년을 이처럼 일할 수 있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눈에 비치게 한 소년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도취였을 것이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든 탓으로 청년은 온종일 멍하기만 하다. 아침에 책 좀 들춰보다가 점심때가 다 되어 고구마를 찌어 먹고. 그 후론 동생과 함께 가마니를 한 장 쳤다. 저녁때가 되어 군불을 땠는데 솥 건 곳이 온전치 못해 그만 플라스틱 바가지가 타버렸다. 수제비를 뜨고 있는데 외출했던 계모가 돌아왔고.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속도 좋지 않고 해서 저녁은 굶었다. 등잔불 밝히고 오 동진에게서 온 편지에 답장을 쓰고 육 필용, 성 석재, 이 범석에게 엽서를 썼다. 엽서가 스무 장정도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만 해도 100원이나 하니.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엽서를 보내면서 봉함편지로 보내지 못해 미안해하다니. 제기랄. 난 엽서에 신세 지고 있는데, 앞으로 이 친구들에게 선수 쳐서 엽서를 보내버린다면 10원짜리 우표를 사지 않아도 될 거다.’ 엽서 살 돈조차 여의치 않았던 청년은 이렇게 구시렁거렸다.
아래, 윗방 청소하고, 안팎의 마당 쓸고, 토끼풀 베어다 준 것은 물론 내일 먹이까지 저장해 두고, 부엌에 물 긷고. 저녁나절에 청년이 한 일들이다.
요즈음 계속해서 밭을 맸다. 밭만 전적으로 맨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하루도 빠짐없이 밭을 매 왔다. 그리고 격일 아침마다 60원에서 100원 내외를 벌자고 오이 반 접 여를 가지고 조치원 장엘 다녀왔다. 또 서너 날에 한 번씩은 참외도 내다 팔았다. 이런 일을 하면서 청년은 창피함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읍내에 들어서면서 가끔은 혹 아는 녀석이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옴츠러들 때가 많았다.
오늘 아침에도 오이를 가지고 장터에 나갔었지만, 상품인 오이가 워낙 좋지 못해 몇 군데 노점을 전전하다 겨우 어느 노점에다 거저 주다시피, 한 개에 1원씩에 넘기고 돌아왔다. 이 일로 청년은 식전부터 매우 불쾌한 기분이다.
청년의 이런 짜증은 그만 집에 와서 터지고 말았다. 오이가 지저분하다는 둥, 늙었다는 둥. 엊저녁에 따놓은 탓으로 시들었다는 둥. 시장 장사치들의 얘기를 그대로 전한 청년의 이런 불평불만은 거짓은 아니었지만, 집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시장에서 주워들은 말로는 오이만 좋으면 1개 3원씩도 받을 수 있다는데.
식전에 장엘 다녀온 후론 아침 먹고 먼지 쌓인 책들을 오랜만에 들춰본다. 책 좀 본다는 것이 번듯이 누워서다. 아침에 억지로 깨워진 몸이 어련하랴.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지만 개운치 못한 머리를 들어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어 12시에 가깝다.
아뿔싸! 아침에 아버지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좀 있다가 밭에 와서 참외 좀 따다가 밭 매는 곳에 가져다 주거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청년은 여간 불안해 진 게 아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고약한 일은 오히려 청년의 심보가 악해진 것이다.
‘제기랄. 뭐, 누군 날마다 밭만 매고, 장에만 다니고. 차라리 공부 집어치우고 일이나 발 벗고 하라고 하시던가.’
늦어지긴 했지만, 땡볕 아래 계모와 이모 두 분이 밭 매느라 고생하고 있으니 참외를 안 따다 줄 수는 없는 일. 마루 위에 뒹구는 농립모를 집어쓰고 눈곱 낀 눈을 부벼 가며 원두막을 향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푸념을 생각하니 청년은 퍽 난처한 기분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시기나 하면 그냥 참아낼 것이 아니라 아주 결단을 내버려야겠다. 아주 농사나 지어 먹겠다고.’
원두막에 당도했을 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그만 청년의 불안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버지가 시원한 원두막에서 낮잠이나 즐기고 있을 거라는 청년의 기대와는 달리 땡볕 아래서 고추밭을 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노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손수 저러고 있으니 꾸중도 듣기 전에 기가 질려버렸다. 더구나 형이 어제 친구들과 어울려 어디서 한잔 한 후, 날이 훤히 밝도록 원두막에서 자다가 아침 해가 한 참 올라와서야 원두막에 나간 아버지한테 쫓겨 집에 들어왔던 일까지 겹쳤으니.
마침, 아버지가 등을 참외밭에 두고 밭을 매고 있기에 청년은 아버지 몰래 참외 몇 개 따가지고 가려던 것이 그만 덜컥 들키고 말았다.
“진작 와서 따가지고 가랬더니 그래. 겨우 이제 오면 밭 매던 사람들 점심 먹으러 오겠다. 녀석들 하는 짓 하고는. 쯧쯧.”
당연히 들어야 할 꾸중이었으나 오늘따라 그만 심사가 뒤틀린다. 이젠 악으로 대응해보리라고 청년은 결심을 단단히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청년은 꼬부랑이 참외 대여섯 갤 따가지고 밭으로 갔다. 그런데 이번엔 계모의 푸념이다.
“퍽 일찍이도 가져오시네. 인제 가져와서 뭘 해!”
이 말에 그만 청년도 진짜로 악에 받쳤다.
“그럼 도로 가져갈까요?”
“그래라!”
청년은 두 말 하지 않고 돌아서고 말았다. 한 참 오다 생각하니 아무래도 이래선 안 될 것 같아 돌아가려던 참인데
“아니, 쟤가 정말 가려나 봐.”
계모가 밭 매다 말고 일어서서 청년을 부른다. 옳다. 핑계 낌에 잘 됐다 싶어 얼른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온 청년을 보고 계모가 또 한마디 거들며 핀잔을 준다.
“두 도련님께서 아무나 하나 와서 밭일 좀 거들었으면 일찍 끝냈을 거 아냐?”
‘누굴 뭘로 알고. 날마다 밭만 매라고 그래.’
청년은 속으로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두 사람이 참외를 먹고 있는 동안 밭을 맸다.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와서도 맘이 여간 쫄린 게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청년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숟갈을 놓자마자, 무슨 말이 또 떨어질지 몰라 청년은 얼른 집을 나와 버렸다. 이웃 이장네 툇마루에 걸터앉아 꼬마들이나 희롱하며 앉아 있으려니 땀 흘리며 지게 지고 지나가는 동네 어른들 보기 민망스러워 그만 궁둥일 일으켰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모두 밭 매러 나갔는지 대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채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청년도 밭이나 매러 갈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직 보고 싶은 신문도 안 본 채였고, 학교 성적표도 배달되어 올 것이라는 예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저 집에서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우체부나 기다리기로 한다. 얼마 후 우체부가 신문은 주고 갔지만, 성적표는 배달하지 않았다. 배달된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었다. 시계를 보고 난 후로 또 불안해졌다. 저녁에 밥상머리에서 받을 아버지 핀잔을 생각하니 어쩐 일인지 악으로 해치우겠다던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혼나지도 않고 핀잔도 덜 받아 보려고 생각해 낸 일이 방을 쓸고 어쩌고 하면서 수선을 떤 일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나절에 청년이 한 일들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아부 인 거다.
지루하고 시끄럽던 방학은 멀어져갔다. 드디어 개학을 맞이했다. 공부와 학교는 역시 청년에게 가장 쉽고 편한 장소였다.
아침엔 담배 밭고랑을 극젱이로 갈았다. 소년, 이웃 아저씨, 동생과 셋이서 끌고 아버지가 쟁기를 잡고 밭고랑을 갈았다. 소년은 이때 비로소 소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에는 소를 뜯기러 당골로 갔다. 소년과 규연. 동균. 재봉. 종옥은 소금과 성냥을 챙겨가서 개구리와 가재를 잡아 구어 먹었다.
소년 아버지는 보리를 베고 소년은 그걸 지게로 날랐다. 보리를 나르다 싫증이 난 소년은 냇가로 멱 감으러 갔다. 멱 감고 난 소년은 더 이상 보리 나르기가 싫어져서 동생과 함께 냇가에서 놀았다. 이 일로 죄책감에 사로잡힌 소년은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소년은 이제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반공일인 토요일, 소년은 학교에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머슴과 함께 벼를 베고 있었다. 소년도 아버지 일손을 돕기 위해 낫을 들었다. 벼에다가 낫을 가져다 대본 소년은 낫질이 예상외로 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낫질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소년은 벼를 베며 생각했다.
‘나도 이제 어른이 됐나 본데? 올해는 내가 심은 모를 내가 베기까지 하다니!‘
이렇게 생각하니 소년은 한층 더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머슴은 벼를 베다가도, 허리가 아프다며 자꾸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만만했다.
’아버지가 칭찬해 주실 테지.‘
소년은 기대감에 부풀어 벼를 베었다. 그러나 소년의 생각과는 달리 벼를 한 논 다 베었을 때 소년 아버지는 소년이 베어놓은 볏단을 보고 꾸중했다. 정성을 들이지 않고 벼를 베었기 때문이란다. 소년은 꾸중 끝에 아버지가 한 말을 기억한다.
“이놈아. 농사짓는 집에서 그 고생해가며 농사지어 놨거늘. 벼 한 포기, 쌀 한 톨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 줄 헤아리며 베어야 해.”
소년은 아직까지 학교를 빠지면서까지 집안일을 도운 적은 없었지만, 토요일을 끼고 차례로 한글날과 일요일이 끼는 바람에 집에서 하루 결석할 것을 요구했고, 소년 역시 선뜻 응낙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은 소년 가정의 분위기와 소년의 학교생활 태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소년을 이처럼 일할 수 있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눈에 비치게 한 소년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도취였을 것이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든 탓으로 청년은 온종일 멍하기만 하다. 아침에 책 좀 들춰보다가 점심때가 다 되어 고구마를 찌어 먹고. 그 후론 동생과 함께 가마니를 한 장 쳤다. 저녁때가 되어 군불을 땠는데 솥 건 곳이 온전치 못해 그만 플라스틱 바가지가 타버렸다. 수제비를 뜨고 있는데 외출했던 계모가 돌아왔고.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속도 좋지 않고 해서 저녁은 굶었다. 등잔불 밝히고 오 동진에게서 온 편지에 답장을 쓰고 육 필용, 성 석재, 이 범석에게 엽서를 썼다. 엽서가 스무 장정도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것만 해도 100원이나 하니.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엽서를 보내면서 봉함편지로 보내지 못해 미안해하다니. 제기랄. 난 엽서에 신세 지고 있는데, 앞으로 이 친구들에게 선수 쳐서 엽서를 보내버린다면 10원짜리 우표를 사지 않아도 될 거다.’ 엽서 살 돈조차 여의치 않았던 청년은 이렇게 구시렁거렸다.
아래, 윗방 청소하고, 안팎의 마당 쓸고, 토끼풀 베어다 준 것은 물론 내일 먹이까지 저장해 두고, 부엌에 물 긷고. 저녁나절에 청년이 한 일들이다.
요즈음 계속해서 밭을 맸다. 밭만 전적으로 맨 것은 아니지만, 여하튼 하루도 빠짐없이 밭을 매 왔다. 그리고 격일 아침마다 60원에서 100원 내외를 벌자고 오이 반 접 여를 가지고 조치원 장엘 다녀왔다. 또 서너 날에 한 번씩은 참외도 내다 팔았다. 이런 일을 하면서 청년은 창피함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읍내에 들어서면서 가끔은 혹 아는 녀석이라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옴츠러들 때가 많았다.
오늘 아침에도 오이를 가지고 장터에 나갔었지만, 상품인 오이가 워낙 좋지 못해 몇 군데 노점을 전전하다 겨우 어느 노점에다 거저 주다시피, 한 개에 1원씩에 넘기고 돌아왔다. 이 일로 청년은 식전부터 매우 불쾌한 기분이다.
청년의 이런 짜증은 그만 집에 와서 터지고 말았다. 오이가 지저분하다는 둥, 늙었다는 둥. 엊저녁에 따놓은 탓으로 시들었다는 둥. 시장 장사치들의 얘기를 그대로 전한 청년의 이런 불평불만은 거짓은 아니었지만, 집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시장에서 주워들은 말로는 오이만 좋으면 1개 3원씩도 받을 수 있다는데.
식전에 장엘 다녀온 후론 아침 먹고 먼지 쌓인 책들을 오랜만에 들춰본다. 책 좀 본다는 것이 번듯이 누워서다. 아침에 억지로 깨워진 몸이 어련하랴.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지만 개운치 못한 머리를 들어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어 12시에 가깝다.
아뿔싸! 아침에 아버지가 한 얘기가 떠올랐다.
“좀 있다가 밭에 와서 참외 좀 따다가 밭 매는 곳에 가져다 주거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청년은 여간 불안해 진 게 아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고약한 일은 오히려 청년의 심보가 악해진 것이다.
‘제기랄. 뭐, 누군 날마다 밭만 매고, 장에만 다니고. 차라리 공부 집어치우고 일이나 발 벗고 하라고 하시던가.’
늦어지긴 했지만, 땡볕 아래 계모와 이모 두 분이 밭 매느라 고생하고 있으니 참외를 안 따다 줄 수는 없는 일. 마루 위에 뒹구는 농립모를 집어쓰고 눈곱 낀 눈을 부벼 가며 원두막을 향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푸념을 생각하니 청년은 퍽 난처한 기분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시기나 하면 그냥 참아낼 것이 아니라 아주 결단을 내버려야겠다. 아주 농사나 지어 먹겠다고.’
원두막에 당도했을 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그만 청년의 불안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청년은 그만 가슴이 뜨끔해졌다. 아버지가 시원한 원두막에서 낮잠이나 즐기고 있을 거라는 청년의 기대와는 달리 땡볕 아래서 고추밭을 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노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손수 저러고 있으니 꾸중도 듣기 전에 기가 질려버렸다. 더구나 형이 어제 친구들과 어울려 어디서 한잔 한 후, 날이 훤히 밝도록 원두막에서 자다가 아침 해가 한 참 올라와서야 원두막에 나간 아버지한테 쫓겨 집에 들어왔던 일까지 겹쳤으니.
마침, 아버지가 등을 참외밭에 두고 밭을 매고 있기에 청년은 아버지 몰래 참외 몇 개 따가지고 가려던 것이 그만 덜컥 들키고 말았다.
“진작 와서 따가지고 가랬더니 그래. 겨우 이제 오면 밭 매던 사람들 점심 먹으러 오겠다. 녀석들 하는 짓 하고는. 쯧쯧.”
당연히 들어야 할 꾸중이었으나 오늘따라 그만 심사가 뒤틀린다. 이젠 악으로 대응해보리라고 청년은 결심을 단단히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청년은 꼬부랑이 참외 대여섯 갤 따가지고 밭으로 갔다. 그런데 이번엔 계모의 푸념이다.
“퍽 일찍이도 가져오시네. 인제 가져와서 뭘 해!”
이 말에 그만 청년도 진짜로 악에 받쳤다.
“그럼 도로 가져갈까요?”
“그래라!”
청년은 두 말 하지 않고 돌아서고 말았다. 한 참 오다 생각하니 아무래도 이래선 안 될 것 같아 돌아가려던 참인데
“아니, 쟤가 정말 가려나 봐.”
계모가 밭 매다 말고 일어서서 청년을 부른다. 옳다. 핑계 낌에 잘 됐다 싶어 얼른 돌아섰다. 그러나 돌아온 청년을 보고 계모가 또 한마디 거들며 핀잔을 준다.
“두 도련님께서 아무나 하나 와서 밭일 좀 거들었으면 일찍 끝냈을 거 아냐?”
‘누굴 뭘로 알고. 날마다 밭만 매라고 그래.’
청년은 속으로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두 사람이 참외를 먹고 있는 동안 밭을 맸다.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와서도 맘이 여간 쫄린 게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청년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숟갈을 놓자마자, 무슨 말이 또 떨어질지 몰라 청년은 얼른 집을 나와 버렸다. 이웃 이장네 툇마루에 걸터앉아 꼬마들이나 희롱하며 앉아 있으려니 땀 흘리며 지게 지고 지나가는 동네 어른들 보기 민망스러워 그만 궁둥일 일으켰다.
집에 돌아와 보니 모두 밭 매러 나갔는지 대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채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청년도 밭이나 매러 갈까 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직 보고 싶은 신문도 안 본 채였고, 학교 성적표도 배달되어 올 것이라는 예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저 집에서 이것저것 뒤져보면서 우체부나 기다리기로 한다. 얼마 후 우체부가 신문은 주고 갔지만, 성적표는 배달하지 않았다. 배달된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었다. 시계를 보고 난 후로 또 불안해졌다. 저녁에 밥상머리에서 받을 아버지 핀잔을 생각하니 어쩐 일인지 악으로 해치우겠다던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혼나지도 않고 핀잔도 덜 받아 보려고 생각해 낸 일이 방을 쓸고 어쩌고 하면서 수선을 떤 일이다. 그래서 그날 저녁나절에 청년이 한 일들은 모두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아부 인 거다.
지루하고 시끄럽던 방학은 멀어져갔다. 드디어 개학을 맞이했다. 공부와 학교는 역시 청년에게 가장 쉽고 편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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