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참회록]꿈꾸는 노마드 21/도망자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5 10:37
Views
134
도망자

대전에서 5년 동안 토목을 공부한 청년은 중앙 정부에서 시행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서울로 올라왔다. 광화문의 정부종합청사의 건설부로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말단 공무원 청년의 윗자리엔 오랜 관록의 공무원들이나 신 참 고시 출신 사무관들이 포진하고 있어 위압감을 주고 있었다. 소속된 국局 내 어디를 둘러봐도 청년을 상대해 줄 또래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대각선으로 맞은편 자리엔 챠트사라고 불리는 임시직과 고용직인 타자수가 있을 뿐이었다. 타자수는 소위 올드미스여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풋내기 공무원을 내려보듯 근엄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또 하나 있던 임시직 노처녀는 화장을 짙게 한데다가 큰 입을 쩍 벌리고 웃어 혐오감을 주는 여자였는데 토지이용계획도 제작을 전담하고 있는 전문직이었다. 이 여자의 꽃망울 무늬 원피스 차림은 그 당시 청년이 수용하기에는 파격적일 만큼 거북스러운 모습이었다.

사무실의 이런 모습과는 달리 국장실에는 앳되고 예쁜 비서가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앳되고 예쁜 모습과는 달리 이 비서 아가씨는 국내 직원들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다. 본인이 모시고 있는 국장에게는 헌신적이었지만, 직원들과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심하게 다투었기 때문이다. 국장 뒷배를 믿고 설친다는 생각으로 대부분 직원들은 이 젊은 여비서를 싫어했다.

그러나 마땅히 어울릴 사람이 없던 젊은 청년에게 어느 날, 문득 이 여인이 다가왔다. 나이 들은 공무원들이 전부인 사무실에서 군대도 안 갔다 온 청년은 이 젊은 여인에게도 신선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퇴근 후면 거의 매일 데이트를 했다. 화려하게 화장하고 옷도 화사하게 입고 다니는 이 젊은 여인은 그러나 성격은 직선적이었다. 특별히 감추는 것도 없었고 직원들에게 툭하면 화를 내던 것과는 달리 매우 상냥하고 깔끔한 성격의 여자였다. 적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젊은 여인은 빚이 좀 있다고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씀씀이가 헤픈 탓이었다.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집안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광화문 정부청사에서 걸어갈 수 있는 충정로의 낡은 한옥에서 연로한 부모의 막내딸로 살고 있었다.

청년으로서는 이 여인이 첫사랑이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7년여를 사귀었고, 그 사이 청년은 군 생활도 마쳤다. 여인은 청년을 결혼 상대로 사귀었지만, 청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자의 씀씀이가 너무 헤프다는 것과 여자가 저지른 한 사건 때문이었다.

청년이 근무하던 중앙부처에는 청년과 같이 발령받은 동문 친구가 있었고 청년은 어느 날 명동의 한 다방에서 이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 둘은 나타나지 않았다. 몹시 실망한 청년은 결국 쓸쓸히 돌아서야만 했다.

이튿날 여자를 만난 청년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여자와 그 친구가 여관에서 하룻밤을 같이 묵었다는 것이다. 청년은 기가 막혔다. 더욱이 같은 학교에 다닐 때부터 그 친구는 여러 여자애를 농락한 바람둥이였기 때문에 청년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여자는 이 친구에게 자신을 허락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청년은 한 마디로 그 분노를 표현했다.

“화냥년!”

그러나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던 청년은 이 여인을 즉시 저버리지 못하고 몇 년을 더 붙잡고 있다가 직장을 옮기면서 마침내 이 여인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청년은 스스로에게 뇌까렸다.

‘치사한 놈!’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이 여인과 결혼하는 꿈을 꾼 늙은이는 꿈을 깬 후 안도의 숨을 몰아쉬곤 했다. 그리고 이 여인과 하룻밤을 같이 했던 바람둥이 친구는 훗날 새벽 조깅에 나섰다가 교통사고로 무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Total Reply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