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24/겨 묻은 상사와 똥 묻은 상사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5 10:32
Views
110
겨 묻은 상사와 똥 묻은 상사
소년은 중학교 때 체능과 체질 등의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 결과 소년은 전 년에 비해 모든 면에서 성장하였다. 키는 약 10여 cm가 컸으며, 몸무게 또한 5kg 정도 늘었다. 신체검사와 동시에 진행된 흥미검사에, 소년의 진로는 외교관이나 소설가, 교사 그리고 연극 또는 영화배우가 좋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소년의 지능지수 역시 이때 가장 높이 측정되었다.
이때 서울의 중앙청에서는 ‘아시아 태평양지역 각료회담’이라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 회담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회담이라고 했다. 회장으로는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이 선출되었다고 했으며 이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에 유익한 일이라고 했다. 소년은 자신도 장차 해외로 진출하여 보다 많은 외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관심을 갖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소년은 외국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닐 순 없으니 대규모 행사를 벌여 이들이 우리나라로 찾아오게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 보았다.
소년은 훗날 본인 인생이 정말로 이런 방향으로 결정될 줄은 당시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관광지로서의 대한민국을 해외에 마케팅하는 정부 투자기관에 근무하면서 청년은 무난한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관운도 따라주어 기관장 비서실에서도 근무하고 또 그 인연으로 뉴욕지사에 두 번이나 근무하는 행운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평탄한 직장생활은 거기까지였다. 본부 파견 직원 두 명만 근무해야 했던 당시, 지사에서 비록 상하 간이라고는 하지만 둘이 잘 지내기는 쉽지 않은 환경과 문화였기 때문이다. 본사에서 낮에만 상대하던 상하 관계와 달리 지사에서의 직원 관계는 밤낮을 같이 하는 이를테면 가족들과 같은 벌거벗은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 간에는 웬만한 과실이 인정되고 눈 감아지는 것이지만 상하 관계에서의 벌거벗은 상태는 쉽게 그 과실이 용서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사소한 잘못들도 간과되지 않고 바로 상처가 되어버리는 관계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특히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청년의 성격으로서는 상사들이나 부하들의 실수나 과오를 덮어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뉴욕의 첫 근무는 사소한, 어쩌면 상사의 일방적 잘못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일들이 누적되면서 결국 쌍방 모두 마음의 상처만 안고 귀국해야 했다. 이 일로 당시 지사장과는 이후 매우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끝내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근무 때는 일보다는 골프를 더 좋아한 상사와 함께 했지만, 더 이상 마찰을 만들면 직장에서의 청년 입지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기에 눈 딱 감고 모든 걸 적극 지원했다. 이를 테면 겨 묻은 개에게는 화풀이하고 똥 묻은 개는 안아준 꼴이었다.
두 번의 주재 근무를 통해 청년로서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뉴욕은 가을 단풍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다. 청년이 살았던 곳은 뉴욕 북쪽의 교외였는데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연결되는 단풍은 가을이면 현란한 색조로 활활 타올라 세계적으로 그 명성이 높은 장관을 연출한다. 허드슨강 양안을 끼고 뉴욕의 부자들이 밀집해 살고있는 버겐 카운티와 웨체스터 카운티의 풍요로운 숲속에 그림 같이 정돈된 마을들도 발군의 아름다움이다.
청년은 80년대 중반 초겨울, 뉴욕에 부임하던 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선망해오던 미국 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해외 생활을 통해 무엇인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남다른 인생을 열어보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미국 생활은 도착하던 날부터 엄청난 양의 업무에 파묻혀 아침에 출근하면 캄캄한 저녁 시간의 퇴근 때나 겨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있을 만큼 바쁘기만 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전임자가 자신이 수행했어야 할 일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단 한 번만 얼굴을 보여준 후 귀국해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연말이었기 때문에 기한에 맞추어야 할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당시는 주재원이라야 위로 지사장이 있었고 직함만 차장이었지 홍보 브로슈어 발송부터 각종 활동보고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스러운 일은 오롯이 청년의 몫이었다.
이런 와중에 어쩌다 직무 관련 국제기구 월례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나름 꽤 한다고 뽐내던 영어 실력이라는 게 영어가 모국어인 현지인들을 상대로 우리 입장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특단의 노력 없이는 그토록 기대했던 해외 생활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겠다는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청년은 업무와 연결된 분야의 강좌가 설치되어있는 야간 대학원을 수소문해 등록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토플 등 입학에 필요한 절차는 이미 서울에서 준비해 왔기 때문에 입학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여름 학기에 첫 등록을 한 후 일주일에 2~3일은 저녁 여섯 시만 되면 공부하러 나가는 정신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강의는 여 나무 명의 수강생들이 교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매 시간 사례연구나 페이퍼를 요구하였다. 언어와 시간 제약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두 과목을 수강한 청년은 그해 여름 학기 학점을 모두 성공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
‘하면 되겠구나.’
청년은 자신감을 가지고 등록을 계속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학업이었지만 수강 과목을 업무와 직결된 마케팅, 광고, PR 등을 선택해 들을 수 있었고 게다가 대부분의 외래 강사들은 항공사와 호텔 간부 등 현업에서 출강했기 때문에 강의 내용 역시 업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같이 공부한 학생들 역시 항공사, 호텔, 여행 도매업체의 간부나 뉴욕에 주재하고 있던 다른 나라 관광진흥기관 간부 등 같은 분야 전문가들이어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좋았다. 그때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는 이후 친분이 계속되고 있는 걸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연이 다른 어떤 인연보다 진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 당시 청년 스스로는 물론 가족 모두의 주말을 희생시켜야 했던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생활한 시기였으며 그래서 가장 보람된 시절이기도 했다. 그 시절 이후 청년은 불만과 좌절에 빠지게 될 때마다 삶의 보람은 외부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생활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삼게 되었다.
맨해튼 사무실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임대료를 아껴 마케팅비로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청년은 사무실을 뉴저지로 옮기기로 한다. 명칭은 뉴욕사무소였지만 미국 대륙 동부를 관할하는 사무실이니 그 위치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위로 지사장이 있었지만, 사무실 이전은 청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뉴욕 소재 공관원들이나 주재원들 대부분 역시 뉴저지 쪽에 기거하고 있어 출퇴근에도 매우 편리해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었다.
사무실을 옮겨 놓자 당시 시카고지사장이 위문 겸 축하차 방문했다. 관할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니 마땅한 출장 구실이 없어 주말을 이용한 개인 차원의 방문이었다. 그런데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두 지사장과 함께 공항 송영을 나가던 청년은 식당에 들러 길가에 주차했던 차를 빼다가 그만 도로를 건너던 행인의 다리를 치었다. 물론 행인의 불법 횡단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이 경우 무조건 운전자 책임이었고 들고 있던 회사와 개인 보험 역시 무한 책임이 아니었다. 청년은 공무 여부가 모호했던 이 일로 사고 처리 과정에서 회사와 갈등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려던 두 지사장과의 관계도 나빠지게 되었다. 결국, 이 사고로 청년은 80년대 말 당시 현금 1억 원을 개인적으로 배상해야 했다. 그리고 이 돈은 당시 가치로는 서울 아파트 두어 채는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청년은 이때 출석하던 작은 한인교회에 나가 담임 목사에게 교통사고 피해자에 대한 쾌유의 기도를 부탁했었다. 그러나 담임 목사는 뜻밖에도 피해자의 쾌유를 빌기보다는 교통사고로부터 청년이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해서 크게 놀랐었다.
소년은 중학교 때 체능과 체질 등의 신체검사를 받았다. 신체검사 결과 소년은 전 년에 비해 모든 면에서 성장하였다. 키는 약 10여 cm가 컸으며, 몸무게 또한 5kg 정도 늘었다. 신체검사와 동시에 진행된 흥미검사에, 소년의 진로는 외교관이나 소설가, 교사 그리고 연극 또는 영화배우가 좋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소년의 지능지수 역시 이때 가장 높이 측정되었다.
이때 서울의 중앙청에서는 ‘아시아 태평양지역 각료회담’이라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 회담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가장 큰 회담이라고 했다. 회장으로는 우리나라 외무부 장관이 선출되었다고 했으며 이는 여러모로 우리나라에 유익한 일이라고 했다. 소년은 자신도 장차 해외로 진출하여 보다 많은 외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관심을 갖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소년은 외국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닐 순 없으니 대규모 행사를 벌여 이들이 우리나라로 찾아오게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해 보았다.
소년은 훗날 본인 인생이 정말로 이런 방향으로 결정될 줄은 당시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관광지로서의 대한민국을 해외에 마케팅하는 정부 투자기관에 근무하면서 청년은 무난한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관운도 따라주어 기관장 비서실에서도 근무하고 또 그 인연으로 뉴욕지사에 두 번이나 근무하는 행운까지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의 평탄한 직장생활은 거기까지였다. 본부 파견 직원 두 명만 근무해야 했던 당시, 지사에서 비록 상하 간이라고는 하지만 둘이 잘 지내기는 쉽지 않은 환경과 문화였기 때문이다. 본사에서 낮에만 상대하던 상하 관계와 달리 지사에서의 직원 관계는 밤낮을 같이 하는 이를테면 가족들과 같은 벌거벗은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 간에는 웬만한 과실이 인정되고 눈 감아지는 것이지만 상하 관계에서의 벌거벗은 상태는 쉽게 그 과실이 용서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사소한 잘못들도 간과되지 않고 바로 상처가 되어버리는 관계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특히 시시비비를 가리기 좋아하는 청년의 성격으로서는 상사들이나 부하들의 실수나 과오를 덮어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뉴욕의 첫 근무는 사소한, 어쩌면 상사의 일방적 잘못이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일들이 누적되면서 결국 쌍방 모두 마음의 상처만 안고 귀국해야 했다. 이 일로 당시 지사장과는 이후 매우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끝내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다.
두 번째 근무 때는 일보다는 골프를 더 좋아한 상사와 함께 했지만, 더 이상 마찰을 만들면 직장에서의 청년 입지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기에 눈 딱 감고 모든 걸 적극 지원했다. 이를 테면 겨 묻은 개에게는 화풀이하고 똥 묻은 개는 안아준 꼴이었다.
두 번의 주재 근무를 통해 청년로서는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뉴욕은 가을 단풍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다. 청년이 살았던 곳은 뉴욕 북쪽의 교외였는데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연결되는 단풍은 가을이면 현란한 색조로 활활 타올라 세계적으로 그 명성이 높은 장관을 연출한다. 허드슨강 양안을 끼고 뉴욕의 부자들이 밀집해 살고있는 버겐 카운티와 웨체스터 카운티의 풍요로운 숲속에 그림 같이 정돈된 마을들도 발군의 아름다움이다.
청년은 80년대 중반 초겨울, 뉴욕에 부임하던 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랫동안 선망해오던 미국 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해외 생활을 통해 무엇인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함으로써 남다른 인생을 열어보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미국 생활은 도착하던 날부터 엄청난 양의 업무에 파묻혀 아침에 출근하면 캄캄한 저녁 시간의 퇴근 때나 겨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있을 만큼 바쁘기만 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전임자가 자신이 수행했어야 할 일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단 한 번만 얼굴을 보여준 후 귀국해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침 연말이었기 때문에 기한에 맞추어야 할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당시는 주재원이라야 위로 지사장이 있었고 직함만 차장이었지 홍보 브로슈어 발송부터 각종 활동보고서 작성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스러운 일은 오롯이 청년의 몫이었다.
이런 와중에 어쩌다 직무 관련 국제기구 월례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나름 꽤 한다고 뽐내던 영어 실력이라는 게 영어가 모국어인 현지인들을 상대로 우리 입장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확인하는 자리일 뿐이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특단의 노력 없이는 그토록 기대했던 해외 생활에서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겠다는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청년은 업무와 연결된 분야의 강좌가 설치되어있는 야간 대학원을 수소문해 등록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토플 등 입학에 필요한 절차는 이미 서울에서 준비해 왔기 때문에 입학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여름 학기에 첫 등록을 한 후 일주일에 2~3일은 저녁 여섯 시만 되면 공부하러 나가는 정신없는 생활이 이어졌다.
강의는 여 나무 명의 수강생들이 교수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매 시간 사례연구나 페이퍼를 요구하였다. 언어와 시간 제약 등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두 과목을 수강한 청년은 그해 여름 학기 학점을 모두 성공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
‘하면 되겠구나.’
청년은 자신감을 가지고 등록을 계속하기로 했다. 쉽지 않은 학업이었지만 수강 과목을 업무와 직결된 마케팅, 광고, PR 등을 선택해 들을 수 있었고 게다가 대부분의 외래 강사들은 항공사와 호텔 간부 등 현업에서 출강했기 때문에 강의 내용 역시 업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같이 공부한 학생들 역시 항공사, 호텔, 여행 도매업체의 간부나 뉴욕에 주재하고 있던 다른 나라 관광진흥기관 간부 등 같은 분야 전문가들이어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좋았다. 그때 같이 공부한 친구들과는 이후 친분이 계속되고 있는 걸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연이 다른 어떤 인연보다 진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그 당시 청년 스스로는 물론 가족 모두의 주말을 희생시켜야 했던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생활한 시기였으며 그래서 가장 보람된 시절이기도 했다. 그 시절 이후 청년은 불만과 좌절에 빠지게 될 때마다 삶의 보람은 외부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생활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을 경험칙으로 삼게 되었다.
맨해튼 사무실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임대료를 아껴 마케팅비로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청년은 사무실을 뉴저지로 옮기기로 한다. 명칭은 뉴욕사무소였지만 미국 대륙 동부를 관할하는 사무실이니 그 위치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위로 지사장이 있었지만, 사무실 이전은 청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뉴욕 소재 공관원들이나 주재원들 대부분 역시 뉴저지 쪽에 기거하고 있어 출퇴근에도 매우 편리해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었다.
사무실을 옮겨 놓자 당시 시카고지사장이 위문 겸 축하차 방문했다. 관할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니 마땅한 출장 구실이 없어 주말을 이용한 개인 차원의 방문이었다. 그런데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두 지사장과 함께 공항 송영을 나가던 청년은 식당에 들러 길가에 주차했던 차를 빼다가 그만 도로를 건너던 행인의 다리를 치었다. 물론 행인의 불법 횡단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이 경우 무조건 운전자 책임이었고 들고 있던 회사와 개인 보험 역시 무한 책임이 아니었다. 청년은 공무 여부가 모호했던 이 일로 사고 처리 과정에서 회사와 갈등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려던 두 지사장과의 관계도 나빠지게 되었다. 결국, 이 사고로 청년은 80년대 말 당시 현금 1억 원을 개인적으로 배상해야 했다. 그리고 이 돈은 당시 가치로는 서울 아파트 두어 채는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청년은 이때 출석하던 작은 한인교회에 나가 담임 목사에게 교통사고 피해자에 대한 쾌유의 기도를 부탁했었다. 그러나 담임 목사는 뜻밖에도 피해자의 쾌유를 빌기보다는 교통사고로부터 청년이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기도해서 크게 놀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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