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노마드 30/끝내 고른 삼베

Author
박 의서
Date
2025-08-2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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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끝내 고른 삼베

20년 넘게 수직 사회에서 생활해오던 장년은 대학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수평 사회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대학 구성원들은 각자가 독립적이고 그래서 의사결정 역시 수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의사결정은 학과 내 교수들의 합의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교수들은 동료 교수 채용 시 동문이나 제자를 임용하고자 애쓰게 된다. 이런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면 적어도 임용 과정에서 신세 진 관계라는 것을 명확히 해두고자 한다. 직계 박사 과정 제자를 둘 수 없었던 장년은 그래서 교수 임용 시 후임자에게 최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내 영향력으로 교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적절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장년이 영향력을 행사해서 임용하게 된 후배 교수는 나름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 잘 아는 지도교수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아무리 지도교수라고 하지만 본인 제자를 천거할 때는 그 제자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매우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나머지 조건들은 여성이라는 것과 외국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해 순수한 국내파가 아니어서 영어강의 가능자 우선 임용의 재단 방침과 어느 정도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학과에 여성이 임용되면 나름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덤이었다.

그래서 장년은 이 여성의 임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지원하기로 한 이상 대학 집행부에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논문심사 내외부 교수들에게도 선처를 부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여성은 후보군에서 살짝 비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면접 대상자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대학교수로 임용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음에도 이런저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여자는 운 좋게도 마침내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신임 교수는 성격이 매우 모가 나 임용된 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임용 시 천거해온 지도교수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그야말로 지도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지도는커녕 막무가내로 이 여자 교수 편을 드는 것이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제서야 뒷조사를 해보니 이 신임교수는 지도교수의 내연녀였다. 이런 빌어먹을 놈! 내연녀를 추천하다니! 장년은 철퇴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그래도 인간성만 좋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터이지만, 성격이 원만하지 못했던 이 여자는 위아래도 없이 동료 교수는 물론 학생들과도 좌충우돌하다가 강단에서 퇴출 위기까지 몰린 끝에 결국 외톨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장년으로서는 고르다 고른 삼베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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