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Author
박 의서
Date
2023-02-1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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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13일은 금요일이었다.

이상하게도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히며 천둥 번개가 치던 그날 오후에 우리 이웃의 건장한 남자 한 분이 40대의 한창 나이에 심장판막증 수술을 받으러 갔다가 그만 유명을 달리 하였다.

서울 교외에서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던 그분은 우람한 체구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손이 커서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기를 좋아했으며 그의 아내를 끔찍히도 아껴주던 애처가로 성당의 구역장과 봉사 단체인 레지오단의 단장 책임을 맡아 헌신적으로 봉사했는가 하면 엄청난 호주가여서 소주를 마시면 세 병은 병채로 마신 후 잔술을 시작하는 요즈음 보기 드문 그야말로 ‘사나이’였다.

13일의 금요일을 택하여 웃는 모습으로 병원문을 들어선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젊은 부인과 아이들만을 남기고 허망한 죽음에 이르자 우리동네 사람들은 모두 망연자실하였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 허망하게 다가오기도 하였지만 평소 그의 사람됨과 신실함을 잘 알고 있던 우리 이웃들은 하늘도 무심하다는 표정으로 허탈해 하였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아파트를 수리하던 우리 집에 와서 덕담을 해주고 또 그의 강권으로 성당의 봉사활동에도 몇 번같이 나갔던 내게도 그분의 죽음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와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통감하게 하였다.

우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이처럼 허탈하게 다가올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어느 날 선량하게 살아가던 일상 중 다른 사람으로부터 까닭을 모른 채로 고통을 당하는 쓰라림을 경험할 수도 있으며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서 어떤 경우에 자제심을 발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노여움을 한 번 터뜨리면 주워담기란 영영 불가능해지고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은 육체에 가해지는 폭력만큼이나 상대를 불구자로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의 도움으로 이러한 노여움과 폭력의 상처들을 치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처들이 오랫동안 치유되지 않고 있거나 심은대로 거두지 못하는 일이 있을 때 생활이 그대를 속인다고 속단할 수도 있겠지만 나도 선량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도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입혔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기억이 없다면 이생이 아닌 전생의 인연으로 인할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이 그대를 속인다고 생각하기 전에 내가 생활을 속인 적은 없는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속고 또 속이며 생활하던 인생의 무대에서 어느 날 갑자기 역할이 끝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역할이 남아 있을지라도 우리 이웃의 그분과 같이 억울해하거나 안달하지 말고 언제라도 순순히 무대를 내려설 수 있도록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보 ‘관광공사’ 1993. 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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