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 ABC 트레킹/ 이한수 한국전시산업서비스협회장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0:26
조회
194
(이 여행기는 전시학회 활동 중 가까이 지낸 지인 이 석재<전시산업서비스협회장>님의 네팔 트레킹 기록을 전재한 것입니다.)
수년 전부터 매년 여름휴가 여행을 가겠다고 한 것이.. 작년엔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못했다. 올해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사실 보름 정도의 긴 날짜를 비우는 여행이 우리에겐 그다지 쉽지 않은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가려고 했던 목적지 이란을 다시 검토했으나, 유난히 더운 올해 여름은 선뜻 길을 나서게 하지 않았다. 평균 40도를 넘는 길을 자전거로 다닌다는 게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란은 포기다. 내년엔 꼭 가고야 말리라.
누구나 인생에 있어 여행에 대한 버킷이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을 코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내 버켓 중의 하나였다. 하여, 네팔로 ABC트래킹을 가기로 정했다.
평소 등산을 그다지 즐기지 않은 나에게 있어, 4천미터가 넘는 고지를 일주일 이상 걸어야 한다는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경험 즉, 고생이 그리웠고 높이 오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숨이 턱 막히게 눈앞에 솟은 만년설의 신화 같은 산들을 실물로 보고 싶었다.
만만치 않겠단 생각을 하면서 길을 떠난다.
1일차.
네팔의 “카두만두”에서 예정에 없던 3박을 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할 고교동창을 기다리는 관계로 대책없는 먼지, 소음 그리고 매일 내리는 찐득한 비와 진흙탕길… 그 안에서 3일을 수형하듯 그렇게 보냈다.
교통이 불편하니깐 어디 딱히 가보지도 못했다. 나름 발달된 방향감각이 있는 편 인데도… 이곳은 어디가 어딘지 한번 길을 나서면 곧 길을 잃는다. 결국 호텔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길 찾기가 “카투만두” 시내여행의 전부라 할까? 매일 이런 컨티션에서 몇 일간의 “카투만두” 시내여행은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
뒷걸음 치다 쥐 잡는단 말이 있다. 아침에 호기있게 나서서 진흙탕과 매연 속을 헤매다가 호텔로 되돌아 오는 길에 들린 사원과 왕궁들이 결국은 “카투만두” 시내의 유명여행지의 모두였다.
멋진 건축물이다.
나무와 벽돌로 된 건물은 섬세한 조각과 함께 종교라는 옷을 입고 나그네의 발길을 무한히 잡는다.
낮 선 문양과 조각 그리고 도형들, 오랜 시간 일관된 메시지를 유지한 독특한 건축물들은 진흙먼지와 잘 어울리는 시간이 축적한 아름다움이 있다.
불교든 힌두교든 이들의 종교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모든 사원과 오래된 건축물엔 아주 밀착된 그들의 종교적 삶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모든 불탑과 사원들은 쉬고, 사랑을 나누고, 생업을 이어가고,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의 기능을 충실히 해 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것을 자신의 삶 속에 용해는 곳이기도 하다. 즉, 팔딱팔딱 살아있는 종교이며 현재도 진행중인 붉고 따스한 피의 토템인 것이다.
수년전 지진으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 한다. 15세기경 3개의 왕국 “카투만두, 파탄, 박타푸르” 시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균형과 안정성을 잃고 위험하게 버티고 있다.
저렇게라도 지지목으로 받쳐두지 않는다면, 또 한번의 지진으로 모두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2일차.
예정에 없던 “카투만두” 시내를 3일간 돌아다녔다.
첫날은 걸어서 다녔지만, 이내 길을 잃고, 비와 먼지에 젖어서 돌아왔고, 다음날을 스쿠터를 빌려서 좀 더 먼 곳을 다녔다. 길 찾는 app이 아니면 도저히 다닐 수 없는 것 같다. 우선은 도로의 상태가 너무 안 좋고, 다음엔 영문으로 된 안내판이 드물다. 지금 이 길이 무슨 도로인지 또는 어디 근처인지에 등에 대한 정보가 아주 불명확하고 부족하다. 특히나 좌측 통행인지라 운전도 무척 신경이 쓰인다. 한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엉망인 교통상황, 난폭한 운전, 많은 사람들 그리고 먼지와 비가 한데 잘 버무려진 상태라고 보면 적확하겠다.
참으로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 많다. 티벳계, 인도계 인종들이 저마다의 카레향을 풍기며 지나친다.
참으로 바쁘게들 다닌다. 자욱한 먼지와 매연이 가득한 위험천만한 도로를 누구 하나 주의하거나 경고하지 않는다. 서로 알아서 재주껏 각자의 일상으로 스쳐간다.
모든 노동의 현장엔 사람뿐이다. 남녀 구분없이 삽과 손으로 해낸다. 아마도 많지 않은 일당에 의지해야 한다면, 그 일도 귀한 기회일 것이다, 그래서 즐겁게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교차로마다 많은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그 많은 차와 오토바이를 통제하고, 그 바쁘고 복잡한 도로를 두어 마리의 소가 대로를 빈둥거린다.
순간 “국가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와 국가는 무엇인가? 그 실체도 없는 이념들이 이상향의 히말라야 산중턱을 이런 지옥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네팔 남부는 열대성 기후로 강수량이 풍부하고 너른 밀림이 존재한다. 중부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고도가 높아지지만, “카투만두”는 해발 500미터에 있는 분지로 년간 최저 10도에서 30도를 넘지 않는 아주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이다. 북부는 병풍처럼 높이 이어진 히말라야산맥이 날개를 펴듯 길게 늘어서 감싼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이 “일어버린 지평선”의 그곳이 아닐까?
통상의 모든 국가는 구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의 문명을 배경으로 존재한다. 네팔 역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어, 이곳에 오랜 시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부터 서쪽과 북쪽의 영향으로 여러 왕국의 흥망이 있었고, 1940년데에 들어 왕조가 사라지고 입헌공화제가 실시되는 곳이다.
네팔이란 국가가 세계 고,근대사 있어 아무런 명함 한 줄도 올리지 못했던 것은 이곳이 그만큼 외지고 척박하고 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10세기 이후 몇몇의 왕조가 인도와 티벳의 영향으로 성립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국가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여전히 1900년대 까지도 이곳은 그저 외지고 가난하고 드나들기 어려운 곳일 뿐이었다.
국가에 있어서 “자원의 저주”란 말이 있다. 국가에 속한 자원을 스스로 지키고 계발하지 못하는 자원은 수탈과 침략의 목적물일 뿐이며, 소수 권력자들의 부와 권세를 지탱하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이 경우 그 국민은 차라리 그 자원이 없는 것보다 더 혹심한 가난과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로 일부 남미 또는 아프리카 국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위정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이익의 확대를 위해 더 많은 통제와 물리력을 행사하게 되며, 국토는 균형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함으로 사회는 불안해지고 계층간의 갈등만 커진다. 결국 이를 억압하기 위해 군대, 경찰이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지며, 이러한 중간 착취계급은 더 많은 부정과 부패를 국민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확대 생산하는 것이다.
네팔은 이렇다 할 자원과 물산이 풍부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과 기후라는 선물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부족하지만 평화로운 삶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도처에 불교든 힌두교든 종교화된 일상을 사는 이 순박한 사람들에게 국가와 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나중에 산을 오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더 깊게 할 수가 있었다. 히말라야 산기슭은 척박하고 배고픈 곳임에 분명하다만, 그 깊은 계곡과 계곡을 넘나들며 하나의 문명과 언어, 종교를 이룬 이들에게 정치와 국가란 아무것도 할 것도 한 것도 없다는 생각 말이다. 그냥 두어도 불가한 그 많은 산길과 돌계단을 놓고, 아무 간섭이 없어도 그들의 필요에 의해 깊은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고 이웃을 만들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정말로 정치와 국가는 무슨 의미일까.
종일 비와 진흙탕길 복잡한 도로 그리고 매연에서 헤매고 다니다 하루가 다 갔다.
입맛도 없다.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하겠다.
3일차
“카투만두”에서 “포카라”로 왔다. 이곳은 ABC트래킹을 하기 위한 전초지 같은 곳이다.
버스와 찝차를 이용해 산밑까지 이동하며, 가이드 또는 포터를 물색하고 입산허가도 받는 곳이다.
당초 계획은 버스를 이용해 오려고 했는데, 3일을 지체하는 통에 부득이 항공을 이용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굳이 10시간 넘게 비포장 도로에서 시달리는건 앞으로 있을 트랙킹을 고려하면 피하길 잘 한 일 같다.
“폐와”호수란 곳 주변에 머물면서 잠시의 휴식과 여행의 정보를 수집하는, 아주 나름 번잡하고 서구화된 곳이다. 많은 호텔과 식당으로 보아, 이곳에 시즌이 되면 전세계의 많은 트래커들이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알겠다.
내가 트래킹을 하는 8월 초순은 몬순기간이다.
어차피 내가 시간을 낼 수 있는 계절도 제한적이라 몬순에 대한 준비와 상식없이 떠났다.
“카누만두”에서도 비에 불편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오후 4~5시면 어김없이 비가 오고 아침나절 몇 시간은 청명한 하늘이다.
오늘은 종일 비가 온다, 앞으로의 산행이 좀 번거로울 것 같다.
“페와” 호숫가는 삼삼오오 젊은이들과 많지 않는 외국인들이 산책하며 보내는 매우 한가로운 장소다. 자전거를 빌려 호수를 크게 돌아 보았다. 비에 젖은 옅은 구름이 드리운 호수는 청량하다. “카투만두”에서 먹은 모든 먼지와 매연을 다 토해놓는다.
누군가 퇴직하면 여기에 와서 살겠다고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심정을 대충은 알 것도 같다.
등산에 필요한 샌들을 하나 사려고 용품점이 들었는데, “한국인이세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올려다 보니 까마잡잡한 네팔인이 우리말로 물어본다.
한국에 4년간 취업해서 곧잘 우리말을 하는 사르만이란 친구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유모스럽고 친근한 모습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내 습성이 발동해, 금방 친하게 되었다.
내침 김에 “요즘 손님도 없는 것 같은데 가게서 빈둥대느니 나랑 같이 가서 살이나 빼는게 어때?”했더니 바로 콜한다.
하루에 천루피? 보통 1천5백에서 2천을 주어야 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는 왔는데, 노느니 염불한다고 이 친구가 천루피에 하겠다고 한다. 더는 내가 협상할 일이 없어졌다. 가이드도 구했겠다. 낼 시간 맞춰서 가게로만 나오면 되겠구나… 이런 인연으로 사르만과 긴 일정이 시작되었다.
네팔,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 남아시아의 많은 청년이 우리나라에 취업하려고 한다. 우선은 그들에게 소득을 보장할 일자리를 정부가 제공하지 못하기 떄문이며, 우리 역시 흔히 말하는 3D업종에 일한 젊은이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내가 정치적 판단을 할건 없다. 그러나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국내로 들여와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여러 가지 조건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6~70년대 그랬듯이, 서로에게 부족한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교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다만, 그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국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에게 제공하는 취업제도는 좋은 평판을 받는 것 같다. 나름 열심히 시험준비도 하고 그것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잘 활용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우리 정부의 정책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모양이다. 다행스러웠다.
이후에도 몇몇의 한국어를 꽤 잘하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들 모두가 다시 한국으로 가서 일하고자 준비하는 중이었고, 한국에, 한국인에게 많이 감사한다는 말을 해줬다. 그래! 열심히 준비해서 다시 와서 일하시구려~ “나마스떼”.
4일차
아침 일찍 일어나 약속장소로 갔으나, 결국은 2시간을 기다려서야 “입산 퍼밋”을 받았다.
내가 참으로 아침잠이 많은 사람인데… 이럴 때는 무슨 기계처럼 반응한다. 아마도 생존에 대한 본능이고 이걸 가끔씩 깨워야 하기 때문에 이런 여행을 하는가 보다.
9시~10경 자리에 눞고,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히 스트래칭하고, 아침먹고, 온갓 여유를 다 부려도 8시가 안 된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결코 아닌데, 스스로도 신기할 뿐이다.
약속장소로 가는데, 이미 시내는 하루가 벌써 시작되었듯이 많은 사람과 차량이 분주하다.
그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좋지… 우리가 너무 비정상적인 생활에 익숙한 것이지..
도시는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소음, 옆집 문 여닫는 소리, 골목에서 나는 잡음들..
새벽 2~3시는 되어야 도시는 선잠이 든다. 이런 생활에 익숙하니, 밤이 이렇게 길고 아침이 또 이렇게 빨리 시작하는 줄 잘 모르고 사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이런 시간을 지킬 수 있을까? 아마 단 하루도 불가능 할 것이다.
11시경에 버스를 타고 산 아래 입산 시작점인 “나야풀”로 간다.
2시간 넘게 가는 버스에서 보이는 주변은 오밀조밀하고 위험한 비포장 도로다. 그 길과 바로 이웃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위태위태한 좁은 공간을 서로 잘도 공유하고 산다. 사람은 사람대로 차는 차대로 오감을 다 열어 단 1미리의 유격만 있으면 과감하게 곁을 지나쳐 버리는 난폭한(?)버스, 오토바이들..
그러한 길을 달리는 과정에 보이는 계곡과 구름, 폭포수 들은 정말 아름답다. 불완전한 자세로 쓰러지고 허물어지고 터져버린 산악로는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힘껏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야플”에 도착했다. 입산허가서를 제출하고, “울레리”까지 가는 찝차를 흥정한다.
적당한 가격인 것 같은데.. “울레리”까진 못간다고 한다.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야 한단다. 즉, 이번 여름 장마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기존의 도로가 끊겼다는 것이다. 중간에 내려 약 3시간 정도 걸어서 “울레리”로 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 가자구.! 뭐~ 어차피 걷자고 온 것!”
도로가 끊어진 곳까지 왔는데, 아이런~ 머 이런걸 가지고..
장정들 3~4명이 삽으로 한 시간만 퍼내면 치울 수 있는 량의 흙이 도로로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1미터 가량은 온전하니 나머지 1미터 정도만 치우면 차가 지나가겠든데, 이걸 그냥 들여다 보고 못 간다고 하니…
가이드가 무색한지, 지가 나보다 먼저 더 툴툴댄다.. 네팔인은 이래서 안 된다는 둥 ㅎㅎㅎ
3시간 동안 계단을 오른다.
종당엔 비가오니 판초우의를 입었다. 땀이 판초우의 속으로 비오 듯 흐른다.
다리가 아픈 것 보다는 덥고 땀나는 게 더 힘들다.
이제 시작이라 기운도 나겠다 좀 무리해서 올라갔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엔 물도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계곡과 숲, 크고 작은 폭포가 지천으로 가득히 따라온다.
잠시 쉬는데, 저 아래서 한무리의 여학생들이 올라온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모두 머리는 양쪽으로 따았다. 까마잡잡한 피부에 연신 깔깔대며 올라오는 여학생들에게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재들은 학교가 어디지?” 내가 “사르만”에게 물었다.
2시간 정도 거리의 반대편 산자락에 학교 건물이 보이는데, 거기가 학교라고 가르쳐 준다.
양지바른 산중턱에 깔끔하게 들어앉은 건물이 학교인가 보다.
매일 이곳을 2시간 내려가고 2시간 올라오고, 그렇게 애들은 산골에서 공부를 한다.
“이 길을 매일?”
“저도 그렇게 공부했어요. 괜찮아요”
그러면서 자신이 성장한 마을을 손끝으로 가리킨다.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 같다. 손 뻣으면 닿을만한 가시감이지만, 하룻길 이상의 반대편 산자락 오밀조밀한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 우린들 뭐 달랐었는가?
난 약수동의 매봉산 중턱에 살았다. 학교까진 걸어서 최소한 한시간 이상 걸린 것 같다. 당시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얼마나 먼 거린지는 가늠이 안 된다. 단지 시간이 퍽 흘러 30년, 40년이 지나 그 길을 차로 지나가면서, 아~ 이렇게 멀고, 좁고, 험한 길이었구나 하는 감회에 젖은 적이 있다.
어디 나뿐이랴.
형제, 자매들은 물론이요, 부모님들 세대에 학교 다닌 얘길 들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들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겠는가?
논 밭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허리춤 보따리에 책 몇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무들과 멱감고 고무신 떠내려 가고, 그래서 혼나고, 뭐 그런 이야기가 지금 내 눈 앞에서 재생되는 것 아닌가?
한참을 더 올라가는데, 이번엔 산 위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내려온다. 이들은 좀 더 고학생들 같다. 건장하고 씩씩하고 더러는 코밑에 수염이 나 있다.
아마도 더 먼 길을 걸어야 하리라.
3~4시간을 올라오니 “울레리”란 산장이다.
해는 뉘엇뉘엇 지고. 짐을 풀고, 샤워하고, 저녁을 먹고, 가볍게 전통소주를 한잔하고.. 함께 묵는 일행이 있어 이런저런 얘길 좀 하고, 마을을 한바퀴 돌고, 그래도 7시30분.
모두 보이질 않는다. 나름의 이유로 잠자리에 들었다.
추녀로 연신 빗물이 떨어진다. 먼산의 윤곽이 산과 하늘을 구분한다.
계곡에 흐르는 세찬 물줄기가 밤새 잠도 못 들게 할 모양 같다.
따스한 물 한잔에 600원이다. 비싼 전기란다. 아껴 써야지..
5일차
“울레리”에서 “고라파니” 까지의 길은 어제와 다름이 없다.
그저 끝까지 계단으로 이뤄진 길을 한없이 오른다.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무릅과 허벅지엔 약간의 통증도 느낀다.
또 어제의 그 노랫소리와 더불어 깔깔대는 소녀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번엔 산 위에서 아래로 학교를 가는 모양이다. 어제 그 인원 그대로 그 옷 그대로, 산토끼 마냥 폴삭대며 산을 내려온다.
아~ 경외스런 모습이로다.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작한 히말라야 산자락에 꼭 맞는 웃음이자 노래요 아이들이다….
한참을 그들이 내려간 돌계단을 바라본다.
나는 여행을 갈 때 기념품을 20여개 가지고 간다, 약 천원 정도하는 민속품으로 주로 열쇠고리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준다.
역시 몇 개를 꺼내 아이들에게 주었다. 주는 이가 더 행복한 선물이 이런 것 이리라.
비수기인지 영업중인 산장이 몇 안된다.
해가지면서 산장엔 하나, 둘 손님이 계속 들어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울레리”는 “푼힐”이라는 전망대를 가기 위해 선택하는 코스인 것이었다.
“푼힐”이란 곳은 히말라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의 전망대로 해발 약 3천미터에 위치한다. 우리가 보아온 모든 히말라야산맥 또는 “안나푸르나”산의 사진은 이곳에서 찍은 전경이다.
6일차
아쉽다. 간밤의 비가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밤새 많은 비가 줄기차게도 내렸다. 안개로 가득한 롯지는 건너편 집도 잘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푼힐”은 갈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려니 그제서야 하늘이 열리고 햇볕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동반한 친구는 여기서 하산하고 난 “사르만”과 남은 길을 나섰다.
ABC코스는 “푼힐”을 가기위한 “나야풀 - 고레파니 – 촘롱” 코스가 있고, “푼힐”을 들리지 않는다면 “나아플 – 촘롱” 코스가 있겠다.
난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푼힐”코스를 택한 꼴이 되었다. ABC트랙킹에 어느 코스도 무방하지만, “푼힐”을 안 들린다면 굳이 “고레파니”에 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르만과 남은 일정을 짯다.
카투만두 2일, 베트남 호치민에서 1일을 지체하면서 일정에 압박이 생겼다. 결국 우리는 좀 무리하지만 단기간에 다녀오는 코스를 짰다. 보통의 트랙킹 보다 한 두개의 롯지를 더 건너뛰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걷는 시간에 8~9시간 정도가 된다.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에 “타다파니”에 도착했다. 2850미터에서 출발해 2300으로 내려가고 다시 2350으로 올라가는 길은 끝없는 계단과 자갈길의 연속이다.
점심을 마치고 아침에 함께 출발한 전주시청소속 젊은이와 작별하곤 우리는 다시 “촘롱”을 향해 걷는다. 2150으로 내려가고 1900으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가고 그리고 깊은 계곡과 흔들 다리를 두 세개 건너 2040의 “촘롱”에 도착했다.
아! 이건 좀 무리다 싶었다.
이런 일정을 아직 5일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가 팍 죽는다. 오전에 친구 따라서 못이기는 척 하면서 하산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타다파니 – 촘롱” 구간은 그 경사와 오르고 내리는 길을 반복함에 많은 사람이 진이 빠지는 구간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계단에 나는 똑바로 서서 걸을 수가 없었다. 뒤로 걸어 내려가야 무릅에 통증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젠 그리도 비가 오드니만, 오늘은 햇볓이 세고 덥다.
이렇게 해서 해질무렵 “촘롱”에 도착했고 작은 계단도 맘껏 내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따스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어기적 거리며 2층의 숙소로 올라간다.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이 많은 계단과 돌길을 닦은이는 누구인가? 언제부터 있어왔던 길인가?
내 비록 “울레리 - 고레파니 – 촘롱” 구간을 걸어왔지만, 히말라야 산 구석구석을 거미출 처럼 이어주는 이런 돌길을 어떻게 필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겠는가?
흔하디 흔한게 돌이라 하지만, 그것을 옮기고, 이렇듯 정교하고 우아하게 깍고, 자르고, 쌓고, 맞추고 하는 일이 어찌 필요에 의해서만 가능할까?
이 길을 내는 사람에게 이 길은 목적이 아닐 것이다.
내가 너와 소통하고 만나야 하고, 비탈밭이나마 그것으로 가족을 돌보고 가축과 더불어 사는 산사산사람으로서 운명과 환경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들의 일상의 축적이었을 것이다.
결코 내가 무엇이 필요하거나 내가 너와 어떤 소통을 위해 이 길을 닦을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 길이 너무도 길고 험하고 고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 노동을 감내할 만한 의미가 의도된 인간사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말할 수 있다.
샤워와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앉아 어두어가는 하늘과 맞닿은 산자락을 바라본다. 3천미터 산중에 폭포라니… 그 위로 또 그만큼의 산이 더 있어 가능한 얘기이다.
영화 “아바타”의 떠다니는 산이 생각났다. 꼭 그런 곳이다.
어스름한 일몰의 시간, 저 아래 계단에서 2명의 남자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다. 이내 좌측으로 돌아 내려간다. 이들은 하산하는 중이다. 비를 흠뻑 맞으며, 근처 숙소를 찾는 모양이다. 아무도 말을 않는다. 그저 터덜터덜 어스름한 길 속으로 긴 그림자를 끌고 사라져 버린다.
7일차
오늘은 “촘롱”에서 “데우랄리”까지 이동했다.
못걸을 것 같던 다리가 몇 걸음을 걸으니 작동을 한다.
역시나 2000에서 시작된 산행은 2300, 2100, 2270, 2800, 3200미터에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수없이 많은 계단과 돌길, 그리고 몇일 사이 비로 흘러내린 불안정한 산길과 끊어진 다리를 임시로 이어놓은 위태위태한 나무다리로 간신히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언제 저 길이 복구될지 가늠이 안 된다.
여기까지는 매우 습한 지역같다. 주변의 식물군도 그러하다, 열대림에 속하는 다양한 식물군이 자란다. “밤부”란 롯지는 말 그대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득한 곳이다.
여름철 산행을 괴롭히는 것으로 거머리가 있는데, 참 기괴하게 생긴 것이다. 풀숲, 돌계단 또는 진흙탕에서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온혈동물의 몸으로 순식간에 옮겨 붙는다. 길게 촉수 같은 머리부분을 늘이곤 열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움츠린 몸과 늘어난 몸의 길이가 대략 5배 차이는 족히 나는 것 같다. 거머리란 것은, 배불리 피를 빨면 제 스스로가 떨어지는 것들이다. 딱히 괴롭히거나 해롭지 않은 종류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생김새와 거머리가 붙은 자리에 출혈이 생기는데.. 영 성가신게 아니다.
수십건의 보시(?) 끝에 “데우랄리”에 도착했으니 많이 피곤하다. 함께하는 사루만도 눈자위가 퀭-하다. 내일 오후엔 ABC에 도착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한다.
오늘 산행은 이 거대한 산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한번은 생각해 보게 하는 하루였다.
어쩌면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판게아(Pangaea)란 약 3억년전의 모든 대륙이 하나로 뭉쳐저 있는 거대한 대륙을 말한다. 물론 실
실존했을 것이다. 그후 지각의 변동으로 인해 여러 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지고 다시 그것들이 몽치고 더러는 더 멀어지고 하여 현재 대륙의 모양을 이루었다.
이곳 히말라야는 수억년전 분명히 바다 또는 물가에 가까운 땅이었다. 아시아 대륙으로 인도 대륙이 올라 붙으면서 현재의 8천미터 고산맥이 형성되었다. 젊고 패기 높은 산맥과 하천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이곳은 암반이 적고 모든 산은 퇴적층과 잡다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산은 많은 비를 머금으면 스스로 흘러내려 무수히 많은 산사태를 유발한다. 매년 많은 도로가 끊기기 때문에 다시 정비한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저 이것이 이들 터전의 원형으로 인식한다면 마음이 편안하리라.
이렇게 형성된 지형은 깊은 골짜기와 급류를 계곡마다 품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허물어지는 계곡으로 인해 지금 저 산이 후대에도 저 자리에 서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엄한 산과 계곡 전부는 유구하다 만은 또한 변화무쌍하다.
모름지기 그 수많은 계곡과 이름없는 산봉우리들도 언젠가 모두 계곡으로 함몰되고 하얗게 백골만 남은 산들이 이 땅을 지키리라. 그 유구함도 불가한 일은 아닐 것이다.
4천미터 산중에 동글동글하고 매끄러운 자갈이 산중턱이 무수히 박혀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힘이란게 존재함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부터 겸손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집에 까만 돌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래전 만물상점에서 구입한 돌인데, 절반을 쪼개면 그 안에 화석화된 주먹만한 조개(암모나이트)의 형태가 생생하게 각인돼 있는 돌이다.
당시에도 “네팔, 히말라야”하는 소릴 들었는데, 그것이 이곳에서 채집되는 아주 귀한 화석이었다.
히말라야 산중턱서 중생대 바다의 소리를 듣고, 역시 지금 대양 깊은 곳에 잠들었을 어떤 육지생물의 숨소리와 치환이 가능하니, 신비롭고 위대하다.
따뜻한 물 한잔을 800원 주고 마신다.
산의 높이에 따라 모든 이용료가 달라진다. 당연히 낮은 곳은 싸고 상대적으로 높은 곳은 비싸다. 모든 물품을 포터들이 운반하기 때문이다. 더 위로가면 더 비쌀 것이다. 미리 많이 마셔두라고 사르만이 농을 한다.
오늘 “촘롱”을 좀 지나서 합류한 미국인 여자가 “데우랄리”까지 동반하게 되었다. 커다란 덩치에 제법 묵직한 걸음으로도 잘도 올라간다. 사르만은 날 버리고 그 여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즐겁게 올라간다.
“샤르만! 짜샤~ 여자 참 좋아 하는구나… 둘이 있을 땐 힘들다고 툴툴 거리드니만 지금은 기운이 펄펄 나냐?”
“아니 사장이 그게 아니고…”
“시끄러 먼져 가버려!”
덕분에 난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 갈 수 있었다.
샤르만도 이번이 두번째 ABC트래킹 이라고 한다. 네팔인이라 할지라도 전문적으로 가이드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한번도 안 가본 사람도 무척 많다고 한다.
지나 나나 어차피 초행, 초보이긴 마찬가지. 정말 부담없이 즐기며 동행할 수 있었다.
롯지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좀 무리해서 구간을 늘리는 통에 늦게 롯지에 도착했더니 빈 방이 몇 개 안 남았단다.
주인왈 나와 그 미국인 여성과 한방을 사용하라고 하는데…. 이거야.
“너 나랑 같은 방을 쓰라고 하는데 상관없겠냐?”
“오브코스” 한마디로 잘라서 말한다.
사실은 내가 문제다.
누가 있다는 것 조차 불편한 성격과 나름 험하다고 생각되는 잠버릇.
누가 사용했는지 모를 이부자리에 대한 상상 때문에 항상 파자마를 가지고 다니는 나름의 결벽증(?)이 있어 편안한 잠을 자긴 글렀다.
더욱이 지척에 한 덩어리의 여성이 뒹궁거릴 텐데… 숨소리 하나, 뒤척대는 소리 하나에 온 말초신경이 다 기립할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사르만은 침을 살짝 흘리면서.. “사장님 잘 해보세요 ㅋㅋ”한다.
“야! 니 나랑 바꾸자”
산장의 룰이 있는데, 가이드들은 따로 자는 곳이 있단다. 실실거리며 사라진다.
에고~ 에고~ 내가 먼져 잠드는게 상책이지..
검은 암모나이드의 선명한 주름이 눈에 선하다. 돌아가면 꼭 다시 귀 대어 보리라.
8일차
어젯밤 3~4번을 깻고, 그 여자가 밤새 뭘 하는지 다 알고 나서야 아침이 밝았다.
뭐~ 별 일은 없었지만, 검정색 브래지어가 엄청 컷다는 것과 엉덩이가 흥건히 젖은 빨간색 옷을 내 머리맡에 걸어두었다는 것과 새벽 4시부터는 유트브를 1시간 봤다는 것.
5시에 일어나 나갔다.
사르만을 깨워 6시경 아침을 먹고 일찍 산을 올랐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그녀가 멀리서 따라오는게 아닌가?
“이런 젠장!”
“굿 모닝”
여전히 “사르만”은 아가씨와 걷는 게 즐거운 모양이다.
여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다 하는 모양이다. 누구와도 간단한 영어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관광지의 특성이겠지만, 생활화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3500를 오를 즈음. 주변은 확연히 달라진다.
열대성 수목은 순간 자취를 감추고 낮은 키의 관목과 풀들이 너른 초원을 이룬다.
2500까지는 열대성 수목이 자라는데 아마도 이곳이 따스하고 강우량이 많아, 다른 곳 보다 5백미터 정도 수목한계선이 높은 것 같다.
키작은 고산식물은 저마다의 영롱하고 아름다운 꽃을 한마당 가득히 피웠다. 상쾌한 바람과 공기, 적당한 습기속에 피어난 수많은 야생화의 축제속으로 천천히 걷는다.
3500미터 부터는 완만한 길이어서 힘들이지 않고도 ABC가지 갈 수가 있다.
충분히 그리고 넉넉히 나의 기억속에 이 아름다운 광경을 차곡차곡 담는다.
MBC(마차푸레 베이스 캠프)를 도착해서 갈증을 달래고, 압도적인 자세로 서있는 산을 바라다 본다. 그래 이런 포스가 사진엔 없지…. 암 없지… 그래서 여길 오는 것 아니겠어?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다시 그만큼 위로 솥은 거래한 산은 아마도 개미보다도 작은 날 내려다 보며,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들 했다”고 하겠지…
잠시 휴식을 마치고 다시 ABC(안나프르나 베이스 캠프)로 향한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수십, 수백만년의 비와 바람이 깍고 다듬은 계곡을 올라간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우린 “ABC”에 도착했다.
깊게 파인 “안나프르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낙석소리는 마치 이 거대한 산을 지키는 호랑이의 포호와 같다. 계곡의 바위밑으로 세차게 흐르는 강물의 부딛침이 우렁차게 들린다.
그 소리와 진동으로 순간 내 몸은 긴장감이 흘러 몸을 뒤로 젖힌다. 한발만 헛 딛으면 저 아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질것 같다.
경이롭구나. 이것은 사진이 아니구나. 살아서 움직이는 바위와 산이다. 거친 호흡과 왕성한 생명력으로 거대하게 기립한 생명체이구나!
박영석 대장과 옥지현씨의 추모탑을 들리고 ABC 롯지로 내려왔다.
잠시의 휴식과 늦은 점심을 먹고는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고생해서 올라온 것에 비해서 ABC의 만남은 단촐하다.
어차피 1박을 할 생각이 아니면, 더는 있을 이유도 없다.
모든 기억은 처음의 것이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것이다. 더 오래 감상을 추가해봐야 처음 압도당한 그 무엇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자!. 더는 덤일 뿐이다.
롯지엔 어제 한방을 사용한 그 아가씨가 보인다.
“사르만!. 쟤 따라 붙기 전에 뜨자!”
내려가는 길, 아니 돌아가는 것이지 내려가는 건 아니다. 왜냐면 또 수많은 계곡과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히말라야 롯지”까지 왔다.
오늘 여기까지 와서 1박을 해야 내일과 모래 하산에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방문객이 드문 롯지인지라, 훨씬 쾌적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음식과 잠자리도 좋다.
올라오면서 지나친 롯지 “히말라야”는 이름 만큼이나 몽환적이고 산뜻한 곳이다.
9일차
“히말라야 롯지”에서 “촘롱”을 지나 “지누”까지 이동했다. 역시 “밤부 – 촘롱” 구간은 돌계단이 사람을 잡는다.
앞서 말했지만, 돌계단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도 이것을 피할 수 없고, 건너뛸 수 없기에 순응한 결과이리라.
그러나 전체 구간중 이 구간이 가장 아름다운 경치을 제공한다.
안개와 옅은 이슬비 속에 드러나는 숲과 오붓한 오솔길이 있고 또, 거친 계곡의 폭포와 아슬아슬한 다리들, 군데군데 흘러내린 산비탈과 끊어진 길을 간신히 이어가는 샛길, 습한 기운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거머리들. 하나의 산을 오르면 탁 트인 전경 저 멀리 다랭이밭과 오밀조밀한 몇 채의 남루한 마을을 보여주는 지극히 히말라야적인 풍경을 압축해 보여주는 상징적인 구간이다.
더불어, 그곳의 언저리는 “도꼬(대나무 바구니)”를 머리에 걸고 돌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인다.
올라갈 때는 잘 몰랐는데, 하산 길에는 많은 수의 포터들과 오가는 길을 주고 받았다.
노인, 청년, 여인네 등.
한번은 50대 중반의 사람이 쉬어가기 위해 내려놓은 “도꼬”를 슬쩍 들어보았다.
허걱! 꼼짝도 않는다.
“사르만! 이거 몇 킬로나 나가는 거야?”
“음.. 한 40킬로 정도요?”
“아니 이걸 메고 어떻게 이 험한 산길을 다니지? 난 죽어도 못할 것 같다”
“ㅎㅎ 사장님도 여기 두달만 살면 다 해요”
“음… 그럴까?”
통상 포터들은 25킬로에서 4~50킬로의 짐을 진다고 한다.
평지도 아닌 이런 험한 산길의 돌계단과 계곡, 허물어진 길을 아슬아슬 걷는 건.. 정말 고된 노동임에 분명하다. 아무리 어린 나이부터 이골나게 한다고 해도.. 이건 내가 아는 가장 힘든 노동일 것이다.
일전에 티브이 다큐로 “히말라야의 시지포스”란 프로를 본 적이 있다.
히말라야를 터전으로 일생을 포터로 살아가는 네팔인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다규이다.
그리스신화에 대해 좀 안다면, 굳이 이들을 “시지포스”와 비유하는 것은 적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시지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교활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한 “코린토스”의 왕이다.
그는 형벌로 거대한 돌을 산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데, 그 돌은 아침이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 굴러 내려온다. 그러면 다시 그 돌을 밀어 올려야 하고,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형벌의 주인공이다.
“시지포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 의미없이 무한 반복하는 부조리한 상황의 설명에 인용되는데, 나는 이 신화가 히말라야 포터들의 삶이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매일 “도꼬”를 메고 히말라야를 오르고 내리는 것이 어떤 원시의 형별과 연관이 있는지 이런 선택에 동의할 무엇이 있는지 가늠키 어렵다.
모든 생필품이 이들의 “도꼬”로 운반되기에 산이 높으면 그만큼 더 비쌀 수 밖에 없겠다.
한잔의 물 한톨의 밥, 남기지도 흘리지도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들 히말라야 포터들의 삶은 형벌도 굴레도 아니다.
그런 복잡한 계산을 하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무겁지만 머리에 멜만한 짐을 지고 한발 한발을 옮겨 움직여 지면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쉬는 삶의 연속적인 동영상이다.
내가 이렇게 피상적으로 이들의 삶을 객관화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정말 고된 노동이며 이 노동의 이유와 목적을 계량한다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도착한 “지누”는 해발도 낮고 손님도 적다.
따스한 물을 마시고, 샤워하고, 갈증을 풀기 위해 맥주도 마셨다.
가이드 사르만이 대단한 청년인 것은, 지도 그 힘든 몸(?)을 끌고 날 ABC에 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며, 어차피 피차에 초보 트래킹이지만 길도 잘 찾고, 무엇보다도 일정관리를 잘했단 것이다. 그의 유모어와 한국에서 배운 “사장님” 접대요령은 나를 오랜 시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감사하고 복 받은 만남이다.
오늘 아침엔 이런 일이 있어서 머리를 싸매고 웃은 적이 있다.
피로회복을 위해 간장약을 가지고 갔다. 매일 아침 끼니때 마다 혼자만 복용하기 좀 뭣해서 그와 한 알씩 나누어 복용했다.
“이거 뭐예요?”
“아 그냥 먹어둬”
여느날도 한 알을 건냈는데 왜 어젠 안주냐고 한다.
“뭐? 어제 줬잖아?”
“아니예요 사장님 안줬어요”. 안 받았다고 버틴다. bb
“너 혹시 오줌이 노랗게 나오지 않드냐?”
“네~ 그러잖아도 오줌이 노래서 걱정이예요. 나 많이 아픈 것 같아요.”
“ㅎㅎ 거봐라 그거 먹으면 오줌이 노랗단 말이야. 그니깐 어제 한알 먹은거 맞잖아!!”
“아니예요. 안 주셨다니까요”. 끝까지 안받았다고 버틴다.
“알았다. 미안혀 내가 깜빡한 모양이다. 미안하다. 그만하자. 근데 샤르만! 난 그런것도 챙겨주고 하는데 넌 뭘하냐? 산속서 맨날 카레만 먹으니 비타민 생각이 난다. 너 그런거 안 가지고 다니니? 눈칫것 좀 살아라! 짜샤!”
비실비실 웃으며 “샤르만”이 주머니에서 뭘 뒤적뒤적 꺼낸다. 순간 난 이 친구가 비타민을 혹시나 가지고 있을까 했는데…
담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사장님 여기 비타민!”
와하하. 난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웃었다. 그래 그래 흡연자들에게 담배가 비타민이지 뭐 별 것 있겠니? 둘이는 정답게 한대씩 불을 붙쳐 하얀연기를 허공에 날렸다.
사루만의 내공에 하루의 모든 피로와 아픈 무릅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하루였다.
10일차
어제 도착한 “지누”는 다른 롯지에 비교하면 가히 낙원이다.
뽀송뽀송한 이부자리는 물론, 다양한 메뉴의 식단. 앞마당에 가득한 꽃과 열대식물들… 주인은 꽤나 지체가 높은 사람인가 보다. 별을 두개나 달은 장성의 사진이 벽에 엄중히 걸려있다. 한눈에도 사치스럽게 보이는 안주인의 선글래스와 배경에서 그것이 네팔이 아님은 한번에 알아보겠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난 분명한 자를 대고 칼로 긋는 위력자들의 삶과 어제 보았던 포터들의 삶이 극한의 경계로 서로 베어져 나가는 것에 놀라는 것 뿐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하산을 한다.
사르만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길이 끊겨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 돌아야 얼마나 돌아가겠는가. 지속적인 내리막 중간중간 약간의 오르막은 아픈 무릅이 잠시 쉴 수 있어 오히려 편안했다.
멀리서 반대편 산자락이 흘러내린 것을 본다. 그 주위도 조만간 모두 저 거친 강물에 다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또 길을 내고 산을 오르내릴 것이고, 다음해 비는 또 그 길을 지울 것이다. 이것은 이 산하가 닳아서 얇아지고 낮아질 때까지 유구할 것이고, 그 산에 곁들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한 그것도 유구할 것이다.
마지막 롯지에 들러 오이를 사 먹었다. 산행중 모든 곳에서 오이를 구할 순 없지만, 우리네 호박만한 것이 달고 연하다.
산이 험해도 이곳의 토양은 기름진 모양이다. 키가 훌쩍 넘는 옥수수와 쟁반만한 오잇닢, 호박만한 오이. 이 땅이 척박하다면 이렇게 탐스럽게 자랄 수 있을까?
잠시의 휴식을 뒤로하고 길을 걷는데, 허름한 민가가 있다. 할머니(노파?) 며느리쯤 보이는 여인 그리고 올망졸망 아이 셋이 있다.
순간 아직 몇 개 남아있는 초촐릿과 과자가 생각났다. 잠시 가방을 풀고 아이들에게 초콜릿과 과자 그리고 열쇠홀더를 주었다.
한눈에 보아도 곳간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퉷마루에서 털고 있는 많지 않은 옥수수가 이들의 식량쯤 될 것 같다.
드디어 큰길로 나왔다.
조금 내려가면 찝차가 다닌다. 그리고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갈 수가 있고, 다시 택시를 타면 “포카라”의 호텔로 가는 것이다. 나의 ABC 여정이 이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큰길에 나와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래 고생했다 사루만, 너 아니었으면 아마도 못 했을 거야.. 고맙다. 오늘 저녁 근사하게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자!”
“네 사장님. 좋잖아요. 이렇게 내려오니깐 ㅎㅎ”
우린 씩씩하게 신작로를 따라 찝차가 대기한 곳으로 와서 짐을 풀었다.
“휴~ 다왔다”
호사다마라 할까?
“카투만두”에서 구입해 산행 내내 메고 다니던 가방이 안 보인다.
이게 어디간 거지?
수년 전부터 매년 여름휴가 여행을 가겠다고 한 것이.. 작년엔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못했다. 올해도 그냥 지나칠 뻔했다. 사실 보름 정도의 긴 날짜를 비우는 여행이 우리에겐 그다지 쉽지 않은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년에 가려고 했던 목적지 이란을 다시 검토했으나, 유난히 더운 올해 여름은 선뜻 길을 나서게 하지 않았다. 평균 40도를 넘는 길을 자전거로 다닌다는 게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란은 포기다. 내년엔 꼭 가고야 말리라.
누구나 인생에 있어 여행에 대한 버킷이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을 코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내 버켓 중의 하나였다. 하여, 네팔로 ABC트래킹을 가기로 정했다.
평소 등산을 그다지 즐기지 않은 나에게 있어, 4천미터가 넘는 고지를 일주일 이상 걸어야 한다는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경험 즉, 고생이 그리웠고 높이 오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숨이 턱 막히게 눈앞에 솟은 만년설의 신화 같은 산들을 실물로 보고 싶었다.
만만치 않겠단 생각을 하면서 길을 떠난다.
1일차.
네팔의 “카두만두”에서 예정에 없던 3박을 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할 고교동창을 기다리는 관계로 대책없는 먼지, 소음 그리고 매일 내리는 찐득한 비와 진흙탕길… 그 안에서 3일을 수형하듯 그렇게 보냈다.
교통이 불편하니깐 어디 딱히 가보지도 못했다. 나름 발달된 방향감각이 있는 편 인데도… 이곳은 어디가 어딘지 한번 길을 나서면 곧 길을 잃는다. 결국 호텔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길 찾기가 “카투만두” 시내여행의 전부라 할까? 매일 이런 컨티션에서 몇 일간의 “카투만두” 시내여행은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
뒷걸음 치다 쥐 잡는단 말이 있다. 아침에 호기있게 나서서 진흙탕과 매연 속을 헤매다가 호텔로 되돌아 오는 길에 들린 사원과 왕궁들이 결국은 “카투만두” 시내의 유명여행지의 모두였다.
멋진 건축물이다.
나무와 벽돌로 된 건물은 섬세한 조각과 함께 종교라는 옷을 입고 나그네의 발길을 무한히 잡는다.
낮 선 문양과 조각 그리고 도형들, 오랜 시간 일관된 메시지를 유지한 독특한 건축물들은 진흙먼지와 잘 어울리는 시간이 축적한 아름다움이 있다.
불교든 힌두교든 이들의 종교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모든 사원과 오래된 건축물엔 아주 밀착된 그들의 종교적 삶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모든 불탑과 사원들은 쉬고, 사랑을 나누고, 생업을 이어가고, 소식을 전하는 곳으로의 기능을 충실히 해 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것을 자신의 삶 속에 용해는 곳이기도 하다. 즉, 팔딱팔딱 살아있는 종교이며 현재도 진행중인 붉고 따스한 피의 토템인 것이다.
수년전 지진으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 한다. 15세기경 3개의 왕국 “카투만두, 파탄, 박타푸르” 시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균형과 안정성을 잃고 위험하게 버티고 있다.
저렇게라도 지지목으로 받쳐두지 않는다면, 또 한번의 지진으로 모두 무너질 수도 있겠구나…
2일차.
예정에 없던 “카투만두” 시내를 3일간 돌아다녔다.
첫날은 걸어서 다녔지만, 이내 길을 잃고, 비와 먼지에 젖어서 돌아왔고, 다음날을 스쿠터를 빌려서 좀 더 먼 곳을 다녔다. 길 찾는 app이 아니면 도저히 다닐 수 없는 것 같다. 우선은 도로의 상태가 너무 안 좋고, 다음엔 영문으로 된 안내판이 드물다. 지금 이 길이 무슨 도로인지 또는 어디 근처인지에 등에 대한 정보가 아주 불명확하고 부족하다. 특히나 좌측 통행인지라 운전도 무척 신경이 쓰인다. 한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엉망인 교통상황, 난폭한 운전, 많은 사람들 그리고 먼지와 비가 한데 잘 버무려진 상태라고 보면 적확하겠다.
참으로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 많다. 티벳계, 인도계 인종들이 저마다의 카레향을 풍기며 지나친다.
참으로 바쁘게들 다닌다. 자욱한 먼지와 매연이 가득한 위험천만한 도로를 누구 하나 주의하거나 경고하지 않는다. 서로 알아서 재주껏 각자의 일상으로 스쳐간다.
모든 노동의 현장엔 사람뿐이다. 남녀 구분없이 삽과 손으로 해낸다. 아마도 많지 않은 일당에 의지해야 한다면, 그 일도 귀한 기회일 것이다, 그래서 즐겁게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교차로마다 많은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그 많은 차와 오토바이를 통제하고, 그 바쁘고 복잡한 도로를 두어 마리의 소가 대로를 빈둥거린다.
순간 “국가란 무엇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와 국가는 무엇인가? 그 실체도 없는 이념들이 이상향의 히말라야 산중턱을 이런 지옥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네팔 남부는 열대성 기후로 강수량이 풍부하고 너른 밀림이 존재한다. 중부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고도가 높아지지만, “카투만두”는 해발 500미터에 있는 분지로 년간 최저 10도에서 30도를 넘지 않는 아주 쾌적하고 살기 좋은 곳이다. 북부는 병풍처럼 높이 이어진 히말라야산맥이 날개를 펴듯 길게 늘어서 감싼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이 “일어버린 지평선”의 그곳이 아닐까?
통상의 모든 국가는 구석기 또는 신석기 시대의 문명을 배경으로 존재한다. 네팔 역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있어, 이곳에 오랜 시간 전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부터 서쪽과 북쪽의 영향으로 여러 왕국의 흥망이 있었고, 1940년데에 들어 왕조가 사라지고 입헌공화제가 실시되는 곳이다.
네팔이란 국가가 세계 고,근대사 있어 아무런 명함 한 줄도 올리지 못했던 것은 이곳이 그만큼 외지고 척박하고 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리라.
10세기 이후 몇몇의 왕조가 인도와 티벳의 영향으로 성립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국가의 형태를 유지했지만, 여전히 1900년대 까지도 이곳은 그저 외지고 가난하고 드나들기 어려운 곳일 뿐이었다.
국가에 있어서 “자원의 저주”란 말이 있다. 국가에 속한 자원을 스스로 지키고 계발하지 못하는 자원은 수탈과 침략의 목적물일 뿐이며, 소수 권력자들의 부와 권세를 지탱하는 수단일 뿐인 것이다. 이 경우 그 국민은 차라리 그 자원이 없는 것보다 더 혹심한 가난과 고통을 받는다는 얘기로 일부 남미 또는 아프리카 국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위정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이익의 확대를 위해 더 많은 통제와 물리력을 행사하게 되며, 국토는 균형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함으로 사회는 불안해지고 계층간의 갈등만 커진다. 결국 이를 억압하기 위해 군대, 경찰이 필요 이상으로 비대해지며, 이러한 중간 착취계급은 더 많은 부정과 부패를 국민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확대 생산하는 것이다.
네팔은 이렇다 할 자원과 물산이 풍부한 곳은 아니다. 그러나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과 기후라는 선물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부족하지만 평화로운 삶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도처에 불교든 힌두교든 종교화된 일상을 사는 이 순박한 사람들에게 국가와 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나중에 산을 오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더 깊게 할 수가 있었다. 히말라야 산기슭은 척박하고 배고픈 곳임에 분명하다만, 그 깊은 계곡과 계곡을 넘나들며 하나의 문명과 언어, 종교를 이룬 이들에게 정치와 국가란 아무것도 할 것도 한 것도 없다는 생각 말이다. 그냥 두어도 불가한 그 많은 산길과 돌계단을 놓고, 아무 간섭이 없어도 그들의 필요에 의해 깊은 계곡과 계곡을 연결하고 이웃을 만들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정말로 정치와 국가는 무슨 의미일까.
종일 비와 진흙탕길 복잡한 도로 그리고 매연에서 헤매고 다니다 하루가 다 갔다.
입맛도 없다.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하겠다.
3일차
“카투만두”에서 “포카라”로 왔다. 이곳은 ABC트래킹을 하기 위한 전초지 같은 곳이다.
버스와 찝차를 이용해 산밑까지 이동하며, 가이드 또는 포터를 물색하고 입산허가도 받는 곳이다.
당초 계획은 버스를 이용해 오려고 했는데, 3일을 지체하는 통에 부득이 항공을 이용했다.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굳이 10시간 넘게 비포장 도로에서 시달리는건 앞으로 있을 트랙킹을 고려하면 피하길 잘 한 일 같다.
“폐와”호수란 곳 주변에 머물면서 잠시의 휴식과 여행의 정보를 수집하는, 아주 나름 번잡하고 서구화된 곳이다. 많은 호텔과 식당으로 보아, 이곳에 시즌이 되면 전세계의 많은 트래커들이 히말라야를 오르기 위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알겠다.
내가 트래킹을 하는 8월 초순은 몬순기간이다.
어차피 내가 시간을 낼 수 있는 계절도 제한적이라 몬순에 대한 준비와 상식없이 떠났다.
“카누만두”에서도 비에 불편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다. 오후 4~5시면 어김없이 비가 오고 아침나절 몇 시간은 청명한 하늘이다.
오늘은 종일 비가 온다, 앞으로의 산행이 좀 번거로울 것 같다.
“페와” 호숫가는 삼삼오오 젊은이들과 많지 않는 외국인들이 산책하며 보내는 매우 한가로운 장소다. 자전거를 빌려 호수를 크게 돌아 보았다. 비에 젖은 옅은 구름이 드리운 호수는 청량하다. “카투만두”에서 먹은 모든 먼지와 매연을 다 토해놓는다.
누군가 퇴직하면 여기에 와서 살겠다고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심정을 대충은 알 것도 같다.
등산에 필요한 샌들을 하나 사려고 용품점이 들었는데, “한국인이세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올려다 보니 까마잡잡한 네팔인이 우리말로 물어본다.
한국에 4년간 취업해서 곧잘 우리말을 하는 사르만이란 친구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유모스럽고 친근한 모습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내 습성이 발동해, 금방 친하게 되었다.
내침 김에 “요즘 손님도 없는 것 같은데 가게서 빈둥대느니 나랑 같이 가서 살이나 빼는게 어때?”했더니 바로 콜한다.
하루에 천루피? 보통 1천5백에서 2천을 주어야 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는 왔는데, 노느니 염불한다고 이 친구가 천루피에 하겠다고 한다. 더는 내가 협상할 일이 없어졌다. 가이드도 구했겠다. 낼 시간 맞춰서 가게로만 나오면 되겠구나… 이런 인연으로 사르만과 긴 일정이 시작되었다.
네팔, 방글라데시, 미얀마 등 남아시아의 많은 청년이 우리나라에 취업하려고 한다. 우선은 그들에게 소득을 보장할 일자리를 정부가 제공하지 못하기 떄문이며, 우리 역시 흔히 말하는 3D업종에 일한 젊은이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내가 정치적 판단을 할건 없다. 그러나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국내로 들여와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한다. 여러 가지 조건이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6~70년대 그랬듯이, 서로에게 부족한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교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이다만, 그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도 국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비교적,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에게 제공하는 취업제도는 좋은 평판을 받는 것 같다. 나름 열심히 시험준비도 하고 그것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잘 활용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우리 정부의 정책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모양이다. 다행스러웠다.
이후에도 몇몇의 한국어를 꽤 잘하는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들 모두가 다시 한국으로 가서 일하고자 준비하는 중이었고, 한국에, 한국인에게 많이 감사한다는 말을 해줬다. 그래! 열심히 준비해서 다시 와서 일하시구려~ “나마스떼”.
4일차
아침 일찍 일어나 약속장소로 갔으나, 결국은 2시간을 기다려서야 “입산 퍼밋”을 받았다.
내가 참으로 아침잠이 많은 사람인데… 이럴 때는 무슨 기계처럼 반응한다. 아마도 생존에 대한 본능이고 이걸 가끔씩 깨워야 하기 때문에 이런 여행을 하는가 보다.
9시~10경 자리에 눞고,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히 스트래칭하고, 아침먹고, 온갓 여유를 다 부려도 8시가 안 된다.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결코 아닌데, 스스로도 신기할 뿐이다.
약속장소로 가는데, 이미 시내는 하루가 벌써 시작되었듯이 많은 사람과 차량이 분주하다.
그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좋지… 우리가 너무 비정상적인 생활에 익숙한 것이지..
도시는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고, 지속적인 소음, 옆집 문 여닫는 소리, 골목에서 나는 잡음들..
새벽 2~3시는 되어야 도시는 선잠이 든다. 이런 생활에 익숙하니, 밤이 이렇게 길고 아침이 또 이렇게 빨리 시작하는 줄 잘 모르고 사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이런 시간을 지킬 수 있을까? 아마 단 하루도 불가능 할 것이다.
11시경에 버스를 타고 산 아래 입산 시작점인 “나야풀”로 간다.
2시간 넘게 가는 버스에서 보이는 주변은 오밀조밀하고 위험한 비포장 도로다. 그 길과 바로 이웃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위태위태한 좁은 공간을 서로 잘도 공유하고 산다. 사람은 사람대로 차는 차대로 오감을 다 열어 단 1미리의 유격만 있으면 과감하게 곁을 지나쳐 버리는 난폭한(?)버스, 오토바이들..
그러한 길을 달리는 과정에 보이는 계곡과 구름, 폭포수 들은 정말 아름답다. 불완전한 자세로 쓰러지고 허물어지고 터져버린 산악로는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힘껏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야플”에 도착했다. 입산허가서를 제출하고, “울레리”까지 가는 찝차를 흥정한다.
적당한 가격인 것 같은데.. “울레리”까진 못간다고 한다.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야 한단다. 즉, 이번 여름 장마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기존의 도로가 끊겼다는 것이다. 중간에 내려 약 3시간 정도 걸어서 “울레리”로 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 가자구.! 뭐~ 어차피 걷자고 온 것!”
도로가 끊어진 곳까지 왔는데, 아이런~ 머 이런걸 가지고..
장정들 3~4명이 삽으로 한 시간만 퍼내면 치울 수 있는 량의 흙이 도로로 쏟아져 내린 것이었다. 1미터 가량은 온전하니 나머지 1미터 정도만 치우면 차가 지나가겠든데, 이걸 그냥 들여다 보고 못 간다고 하니…
가이드가 무색한지, 지가 나보다 먼저 더 툴툴댄다.. 네팔인은 이래서 안 된다는 둥 ㅎㅎㅎ
3시간 동안 계단을 오른다.
종당엔 비가오니 판초우의를 입었다. 땀이 판초우의 속으로 비오 듯 흐른다.
다리가 아픈 것 보다는 덥고 땀나는 게 더 힘들다.
이제 시작이라 기운도 나겠다 좀 무리해서 올라갔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엔 물도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계곡과 숲, 크고 작은 폭포가 지천으로 가득히 따라온다.
잠시 쉬는데, 저 아래서 한무리의 여학생들이 올라온다. 교복을 단정히 입고, 모두 머리는 양쪽으로 따았다. 까마잡잡한 피부에 연신 깔깔대며 올라오는 여학생들에게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재들은 학교가 어디지?” 내가 “사르만”에게 물었다.
2시간 정도 거리의 반대편 산자락에 학교 건물이 보이는데, 거기가 학교라고 가르쳐 준다.
양지바른 산중턱에 깔끔하게 들어앉은 건물이 학교인가 보다.
매일 이곳을 2시간 내려가고 2시간 올라오고, 그렇게 애들은 산골에서 공부를 한다.
“이 길을 매일?”
“저도 그렇게 공부했어요. 괜찮아요”
그러면서 자신이 성장한 마을을 손끝으로 가리킨다.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 같다. 손 뻣으면 닿을만한 가시감이지만, 하룻길 이상의 반대편 산자락 오밀조밀한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 우린들 뭐 달랐었는가?
난 약수동의 매봉산 중턱에 살았다. 학교까진 걸어서 최소한 한시간 이상 걸린 것 같다. 당시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얼마나 먼 거린지는 가늠이 안 된다. 단지 시간이 퍽 흘러 30년, 40년이 지나 그 길을 차로 지나가면서, 아~ 이렇게 멀고, 좁고, 험한 길이었구나 하는 감회에 젖은 적이 있다.
어디 나뿐이랴.
형제, 자매들은 물론이요, 부모님들 세대에 학교 다닌 얘길 들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들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겠는가?
논 밭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허리춤 보따리에 책 몇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무들과 멱감고 고무신 떠내려 가고, 그래서 혼나고, 뭐 그런 이야기가 지금 내 눈 앞에서 재생되는 것 아닌가?
한참을 더 올라가는데, 이번엔 산 위에서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내려온다. 이들은 좀 더 고학생들 같다. 건장하고 씩씩하고 더러는 코밑에 수염이 나 있다.
아마도 더 먼 길을 걸어야 하리라.
3~4시간을 올라오니 “울레리”란 산장이다.
해는 뉘엇뉘엇 지고. 짐을 풀고, 샤워하고, 저녁을 먹고, 가볍게 전통소주를 한잔하고.. 함께 묵는 일행이 있어 이런저런 얘길 좀 하고, 마을을 한바퀴 돌고, 그래도 7시30분.
모두 보이질 않는다. 나름의 이유로 잠자리에 들었다.
추녀로 연신 빗물이 떨어진다. 먼산의 윤곽이 산과 하늘을 구분한다.
계곡에 흐르는 세찬 물줄기가 밤새 잠도 못 들게 할 모양 같다.
따스한 물 한잔에 600원이다. 비싼 전기란다. 아껴 써야지..
5일차
“울레리”에서 “고라파니” 까지의 길은 어제와 다름이 없다.
그저 끝까지 계단으로 이뤄진 길을 한없이 오른다.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무릅과 허벅지엔 약간의 통증도 느낀다.
또 어제의 그 노랫소리와 더불어 깔깔대는 소녀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번엔 산 위에서 아래로 학교를 가는 모양이다. 어제 그 인원 그대로 그 옷 그대로, 산토끼 마냥 폴삭대며 산을 내려온다.
아~ 경외스런 모습이로다.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작한 히말라야 산자락에 꼭 맞는 웃음이자 노래요 아이들이다….
한참을 그들이 내려간 돌계단을 바라본다.
나는 여행을 갈 때 기념품을 20여개 가지고 간다, 약 천원 정도하는 민속품으로 주로 열쇠고리 같은 것들이다. 이것을 길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준다.
역시 몇 개를 꺼내 아이들에게 주었다. 주는 이가 더 행복한 선물이 이런 것 이리라.
비수기인지 영업중인 산장이 몇 안된다.
해가지면서 산장엔 하나, 둘 손님이 계속 들어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울레리”는 “푼힐”이라는 전망대를 가기 위해 선택하는 코스인 것이었다.
“푼힐”이란 곳은 히말라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의 전망대로 해발 약 3천미터에 위치한다. 우리가 보아온 모든 히말라야산맥 또는 “안나푸르나”산의 사진은 이곳에서 찍은 전경이다.
6일차
아쉽다. 간밤의 비가 아침까지 그치질 않았다. 밤새 많은 비가 줄기차게도 내렸다. 안개로 가득한 롯지는 건너편 집도 잘 보이지 않는다. 덕분에 “푼힐”은 갈 수가 없었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려니 그제서야 하늘이 열리고 햇볕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동반한 친구는 여기서 하산하고 난 “사르만”과 남은 길을 나섰다.
ABC코스는 “푼힐”을 가기위한 “나야풀 - 고레파니 – 촘롱” 코스가 있고, “푼힐”을 들리지 않는다면 “나아플 – 촘롱” 코스가 있겠다.
난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푼힐”코스를 택한 꼴이 되었다. ABC트랙킹에 어느 코스도 무방하지만, “푼힐”을 안 들린다면 굳이 “고레파니”에 올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사르만과 남은 일정을 짯다.
카투만두 2일, 베트남 호치민에서 1일을 지체하면서 일정에 압박이 생겼다. 결국 우리는 좀 무리하지만 단기간에 다녀오는 코스를 짰다. 보통의 트랙킹 보다 한 두개의 롯지를 더 건너뛰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걷는 시간에 8~9시간 정도가 된다.
아침에 출발해서 점심에 “타다파니”에 도착했다. 2850미터에서 출발해 2300으로 내려가고 다시 2350으로 올라가는 길은 끝없는 계단과 자갈길의 연속이다.
점심을 마치고 아침에 함께 출발한 전주시청소속 젊은이와 작별하곤 우리는 다시 “촘롱”을 향해 걷는다. 2150으로 내려가고 1900으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가고 그리고 깊은 계곡과 흔들 다리를 두 세개 건너 2040의 “촘롱”에 도착했다.
아! 이건 좀 무리다 싶었다.
이런 일정을 아직 5일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기가 팍 죽는다. 오전에 친구 따라서 못이기는 척 하면서 하산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타다파니 – 촘롱” 구간은 그 경사와 오르고 내리는 길을 반복함에 많은 사람이 진이 빠지는 구간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과 계단에 나는 똑바로 서서 걸을 수가 없었다. 뒤로 걸어 내려가야 무릅에 통증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젠 그리도 비가 오드니만, 오늘은 햇볓이 세고 덥다.
이렇게 해서 해질무렵 “촘롱”에 도착했고 작은 계단도 맘껏 내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따스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어기적 거리며 2층의 숙소로 올라간다.
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이 많은 계단과 돌길을 닦은이는 누구인가? 언제부터 있어왔던 길인가?
내 비록 “울레리 - 고레파니 – 촘롱” 구간을 걸어왔지만, 히말라야 산 구석구석을 거미출 처럼 이어주는 이런 돌길을 어떻게 필요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하겠는가?
흔하디 흔한게 돌이라 하지만, 그것을 옮기고, 이렇듯 정교하고 우아하게 깍고, 자르고, 쌓고, 맞추고 하는 일이 어찌 필요에 의해서만 가능할까?
이 길을 내는 사람에게 이 길은 목적이 아닐 것이다.
내가 너와 소통하고 만나야 하고, 비탈밭이나마 그것으로 가족을 돌보고 가축과 더불어 사는 산사산사람으로서 운명과 환경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들의 일상의 축적이었을 것이다.
결코 내가 무엇이 필요하거나 내가 너와 어떤 소통을 위해 이 길을 닦을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 길이 너무도 길고 험하고 고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 노동을 감내할 만한 의미가 의도된 인간사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말할 수 있다.
샤워와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 앉아 어두어가는 하늘과 맞닿은 산자락을 바라본다. 3천미터 산중에 폭포라니… 그 위로 또 그만큼의 산이 더 있어 가능한 얘기이다.
영화 “아바타”의 떠다니는 산이 생각났다. 꼭 그런 곳이다.
어스름한 일몰의 시간, 저 아래 계단에서 2명의 남자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고 있다. 이내 좌측으로 돌아 내려간다. 이들은 하산하는 중이다. 비를 흠뻑 맞으며, 근처 숙소를 찾는 모양이다. 아무도 말을 않는다. 그저 터덜터덜 어스름한 길 속으로 긴 그림자를 끌고 사라져 버린다.
7일차
오늘은 “촘롱”에서 “데우랄리”까지 이동했다.
못걸을 것 같던 다리가 몇 걸음을 걸으니 작동을 한다.
역시나 2000에서 시작된 산행은 2300, 2100, 2270, 2800, 3200미터에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
수없이 많은 계단과 돌길, 그리고 몇일 사이 비로 흘러내린 불안정한 산길과 끊어진 다리를 임시로 이어놓은 위태위태한 나무다리로 간신히 길을 만들어 놓았다. 언제 저 길이 복구될지 가늠이 안 된다.
여기까지는 매우 습한 지역같다. 주변의 식물군도 그러하다, 열대림에 속하는 다양한 식물군이 자란다. “밤부”란 롯지는 말 그대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가득한 곳이다.
여름철 산행을 괴롭히는 것으로 거머리가 있는데, 참 기괴하게 생긴 것이다. 풀숲, 돌계단 또는 진흙탕에서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온혈동물의 몸으로 순식간에 옮겨 붙는다. 길게 촉수 같은 머리부분을 늘이곤 열을 감지하는 모양이다. 움츠린 몸과 늘어난 몸의 길이가 대략 5배 차이는 족히 나는 것 같다. 거머리란 것은, 배불리 피를 빨면 제 스스로가 떨어지는 것들이다. 딱히 괴롭히거나 해롭지 않은 종류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생김새와 거머리가 붙은 자리에 출혈이 생기는데.. 영 성가신게 아니다.
수십건의 보시(?) 끝에 “데우랄리”에 도착했으니 많이 피곤하다. 함께하는 사루만도 눈자위가 퀭-하다. 내일 오후엔 ABC에 도착하니,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한다.
오늘 산행은 이 거대한 산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한번은 생각해 보게 하는 하루였다.
어쩌면 소설이겠지만 말이다.
판게아(Pangaea)란 약 3억년전의 모든 대륙이 하나로 뭉쳐저 있는 거대한 대륙을 말한다. 물론 실
실존했을 것이다. 그후 지각의 변동으로 인해 여러 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지고 다시 그것들이 몽치고 더러는 더 멀어지고 하여 현재 대륙의 모양을 이루었다.
이곳 히말라야는 수억년전 분명히 바다 또는 물가에 가까운 땅이었다. 아시아 대륙으로 인도 대륙이 올라 붙으면서 현재의 8천미터 고산맥이 형성되었다. 젊고 패기 높은 산맥과 하천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여 이곳은 암반이 적고 모든 산은 퇴적층과 잡다한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산은 많은 비를 머금으면 스스로 흘러내려 무수히 많은 산사태를 유발한다. 매년 많은 도로가 끊기기 때문에 다시 정비한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저 이것이 이들 터전의 원형으로 인식한다면 마음이 편안하리라.
이렇게 형성된 지형은 깊은 골짜기와 급류를 계곡마다 품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허물어지는 계곡으로 인해 지금 저 산이 후대에도 저 자리에 서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엄한 산과 계곡 전부는 유구하다 만은 또한 변화무쌍하다.
모름지기 그 수많은 계곡과 이름없는 산봉우리들도 언젠가 모두 계곡으로 함몰되고 하얗게 백골만 남은 산들이 이 땅을 지키리라. 그 유구함도 불가한 일은 아닐 것이다.
4천미터 산중에 동글동글하고 매끄러운 자갈이 산중턱이 무수히 박혀있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힘이란게 존재함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부터 겸손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집에 까만 돌이 하나 있다.
아주 오래전 만물상점에서 구입한 돌인데, 절반을 쪼개면 그 안에 화석화된 주먹만한 조개(암모나이트)의 형태가 생생하게 각인돼 있는 돌이다.
당시에도 “네팔, 히말라야”하는 소릴 들었는데, 그것이 이곳에서 채집되는 아주 귀한 화석이었다.
히말라야 산중턱서 중생대 바다의 소리를 듣고, 역시 지금 대양 깊은 곳에 잠들었을 어떤 육지생물의 숨소리와 치환이 가능하니, 신비롭고 위대하다.
따뜻한 물 한잔을 800원 주고 마신다.
산의 높이에 따라 모든 이용료가 달라진다. 당연히 낮은 곳은 싸고 상대적으로 높은 곳은 비싸다. 모든 물품을 포터들이 운반하기 때문이다. 더 위로가면 더 비쌀 것이다. 미리 많이 마셔두라고 사르만이 농을 한다.
오늘 “촘롱”을 좀 지나서 합류한 미국인 여자가 “데우랄리”까지 동반하게 되었다. 커다란 덩치에 제법 묵직한 걸음으로도 잘도 올라간다. 사르만은 날 버리고 그 여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즐겁게 올라간다.
“샤르만! 짜샤~ 여자 참 좋아 하는구나… 둘이 있을 땐 힘들다고 툴툴 거리드니만 지금은 기운이 펄펄 나냐?”
“아니 사장이 그게 아니고…”
“시끄러 먼져 가버려!”
덕분에 난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그들을 따라 갈 수 있었다.
샤르만도 이번이 두번째 ABC트래킹 이라고 한다. 네팔인이라 할지라도 전문적으로 가이드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한번도 안 가본 사람도 무척 많다고 한다.
지나 나나 어차피 초행, 초보이긴 마찬가지. 정말 부담없이 즐기며 동행할 수 있었다.
롯지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좀 무리해서 구간을 늘리는 통에 늦게 롯지에 도착했더니 빈 방이 몇 개 안 남았단다.
주인왈 나와 그 미국인 여성과 한방을 사용하라고 하는데…. 이거야.
“너 나랑 같은 방을 쓰라고 하는데 상관없겠냐?”
“오브코스” 한마디로 잘라서 말한다.
사실은 내가 문제다.
누가 있다는 것 조차 불편한 성격과 나름 험하다고 생각되는 잠버릇.
누가 사용했는지 모를 이부자리에 대한 상상 때문에 항상 파자마를 가지고 다니는 나름의 결벽증(?)이 있어 편안한 잠을 자긴 글렀다.
더욱이 지척에 한 덩어리의 여성이 뒹궁거릴 텐데… 숨소리 하나, 뒤척대는 소리 하나에 온 말초신경이 다 기립할걸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사르만은 침을 살짝 흘리면서.. “사장님 잘 해보세요 ㅋㅋ”한다.
“야! 니 나랑 바꾸자”
산장의 룰이 있는데, 가이드들은 따로 자는 곳이 있단다. 실실거리며 사라진다.
에고~ 에고~ 내가 먼져 잠드는게 상책이지..
검은 암모나이드의 선명한 주름이 눈에 선하다. 돌아가면 꼭 다시 귀 대어 보리라.
8일차
어젯밤 3~4번을 깻고, 그 여자가 밤새 뭘 하는지 다 알고 나서야 아침이 밝았다.
뭐~ 별 일은 없었지만, 검정색 브래지어가 엄청 컷다는 것과 엉덩이가 흥건히 젖은 빨간색 옷을 내 머리맡에 걸어두었다는 것과 새벽 4시부터는 유트브를 1시간 봤다는 것.
5시에 일어나 나갔다.
사르만을 깨워 6시경 아침을 먹고 일찍 산을 올랐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그녀가 멀리서 따라오는게 아닌가?
“이런 젠장!”
“굿 모닝”
여전히 “사르만”은 아가씨와 걷는 게 즐거운 모양이다.
여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다 하는 모양이다. 누구와도 간단한 영어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관광지의 특성이겠지만, 생활화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3500를 오를 즈음. 주변은 확연히 달라진다.
열대성 수목은 순간 자취를 감추고 낮은 키의 관목과 풀들이 너른 초원을 이룬다.
2500까지는 열대성 수목이 자라는데 아마도 이곳이 따스하고 강우량이 많아, 다른 곳 보다 5백미터 정도 수목한계선이 높은 것 같다.
키작은 고산식물은 저마다의 영롱하고 아름다운 꽃을 한마당 가득히 피웠다. 상쾌한 바람과 공기, 적당한 습기속에 피어난 수많은 야생화의 축제속으로 천천히 걷는다.
3500미터 부터는 완만한 길이어서 힘들이지 않고도 ABC가지 갈 수가 있다.
충분히 그리고 넉넉히 나의 기억속에 이 아름다운 광경을 차곡차곡 담는다.
MBC(마차푸레 베이스 캠프)를 도착해서 갈증을 달래고, 압도적인 자세로 서있는 산을 바라다 본다. 그래 이런 포스가 사진엔 없지…. 암 없지… 그래서 여길 오는 것 아니겠어?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에서 다시 그만큼 위로 솥은 거래한 산은 아마도 개미보다도 작은 날 내려다 보며,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들 했다”고 하겠지…
잠시 휴식을 마치고 다시 ABC(안나프르나 베이스 캠프)로 향한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수십, 수백만년의 비와 바람이 깍고 다듬은 계곡을 올라간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우린 “ABC”에 도착했다.
깊게 파인 “안나프르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낙석소리는 마치 이 거대한 산을 지키는 호랑이의 포호와 같다. 계곡의 바위밑으로 세차게 흐르는 강물의 부딛침이 우렁차게 들린다.
그 소리와 진동으로 순간 내 몸은 긴장감이 흘러 몸을 뒤로 젖힌다. 한발만 헛 딛으면 저 아래 계곡으로 굴러 떨어질것 같다.
경이롭구나. 이것은 사진이 아니구나. 살아서 움직이는 바위와 산이다. 거친 호흡과 왕성한 생명력으로 거대하게 기립한 생명체이구나!
박영석 대장과 옥지현씨의 추모탑을 들리고 ABC 롯지로 내려왔다.
잠시의 휴식과 늦은 점심을 먹고는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고생해서 올라온 것에 비해서 ABC의 만남은 단촐하다.
어차피 1박을 할 생각이 아니면, 더는 있을 이유도 없다.
모든 기억은 처음의 것이 가장 정확하고 진실한 것이다. 더 오래 감상을 추가해봐야 처음 압도당한 그 무엇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자!. 더는 덤일 뿐이다.
롯지엔 어제 한방을 사용한 그 아가씨가 보인다.
“사르만!. 쟤 따라 붙기 전에 뜨자!”
내려가는 길, 아니 돌아가는 것이지 내려가는 건 아니다. 왜냐면 또 수많은 계곡과 산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걸어서 “히말라야 롯지”까지 왔다.
오늘 여기까지 와서 1박을 해야 내일과 모래 하산에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방문객이 드문 롯지인지라, 훨씬 쾌적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음식과 잠자리도 좋다.
올라오면서 지나친 롯지 “히말라야”는 이름 만큼이나 몽환적이고 산뜻한 곳이다.
9일차
“히말라야 롯지”에서 “촘롱”을 지나 “지누”까지 이동했다. 역시 “밤부 – 촘롱” 구간은 돌계단이 사람을 잡는다.
앞서 말했지만, 돌계단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것도 이것을 피할 수 없고, 건너뛸 수 없기에 순응한 결과이리라.
그러나 전체 구간중 이 구간이 가장 아름다운 경치을 제공한다.
안개와 옅은 이슬비 속에 드러나는 숲과 오붓한 오솔길이 있고 또, 거친 계곡의 폭포와 아슬아슬한 다리들, 군데군데 흘러내린 산비탈과 끊어진 길을 간신히 이어가는 샛길, 습한 기운속에 존재하는 무수한 거머리들. 하나의 산을 오르면 탁 트인 전경 저 멀리 다랭이밭과 오밀조밀한 몇 채의 남루한 마을을 보여주는 지극히 히말라야적인 풍경을 압축해 보여주는 상징적인 구간이다.
더불어, 그곳의 언저리는 “도꼬(대나무 바구니)”를 머리에 걸고 돌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점점이 보인다.
올라갈 때는 잘 몰랐는데, 하산 길에는 많은 수의 포터들과 오가는 길을 주고 받았다.
노인, 청년, 여인네 등.
한번은 50대 중반의 사람이 쉬어가기 위해 내려놓은 “도꼬”를 슬쩍 들어보았다.
허걱! 꼼짝도 않는다.
“사르만! 이거 몇 킬로나 나가는 거야?”
“음.. 한 40킬로 정도요?”
“아니 이걸 메고 어떻게 이 험한 산길을 다니지? 난 죽어도 못할 것 같다”
“ㅎㅎ 사장님도 여기 두달만 살면 다 해요”
“음… 그럴까?”
통상 포터들은 25킬로에서 4~50킬로의 짐을 진다고 한다.
평지도 아닌 이런 험한 산길의 돌계단과 계곡, 허물어진 길을 아슬아슬 걷는 건.. 정말 고된 노동임에 분명하다. 아무리 어린 나이부터 이골나게 한다고 해도.. 이건 내가 아는 가장 힘든 노동일 것이다.
일전에 티브이 다큐로 “히말라야의 시지포스”란 프로를 본 적이 있다.
히말라야를 터전으로 일생을 포터로 살아가는 네팔인들의 삶과 애환을 다룬 다규이다.
그리스신화에 대해 좀 안다면, 굳이 이들을 “시지포스”와 비유하는 것은 적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시지포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교활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한 “코린토스”의 왕이다.
그는 형벌로 거대한 돌을 산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데, 그 돌은 아침이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 굴러 내려온다. 그러면 다시 그 돌을 밀어 올려야 하고,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는 형벌의 주인공이다.
“시지포스”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 의미없이 무한 반복하는 부조리한 상황의 설명에 인용되는데, 나는 이 신화가 히말라야 포터들의 삶이 적당한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매일 “도꼬”를 메고 히말라야를 오르고 내리는 것이 어떤 원시의 형별과 연관이 있는지 이런 선택에 동의할 무엇이 있는지 가늠키 어렵다.
모든 생필품이 이들의 “도꼬”로 운반되기에 산이 높으면 그만큼 더 비쌀 수 밖에 없겠다.
한잔의 물 한톨의 밥, 남기지도 흘리지도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들 히말라야 포터들의 삶은 형벌도 굴레도 아니다.
그런 복잡한 계산을 하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무겁지만 머리에 멜만한 짐을 지고 한발 한발을 옮겨 움직여 지면 오르고 그렇지 않으면 쉬는 삶의 연속적인 동영상이다.
내가 이렇게 피상적으로 이들의 삶을 객관화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정말 고된 노동이며 이 노동의 이유와 목적을 계량한다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도착한 “지누”는 해발도 낮고 손님도 적다.
따스한 물을 마시고, 샤워하고, 갈증을 풀기 위해 맥주도 마셨다.
가이드 사르만이 대단한 청년인 것은, 지도 그 힘든 몸(?)을 끌고 날 ABC에 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며, 어차피 피차에 초보 트래킹이지만 길도 잘 찾고, 무엇보다도 일정관리를 잘했단 것이다. 그의 유모어와 한국에서 배운 “사장님” 접대요령은 나를 오랜 시간 즐겁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감사하고 복 받은 만남이다.
오늘 아침엔 이런 일이 있어서 머리를 싸매고 웃은 적이 있다.
피로회복을 위해 간장약을 가지고 갔다. 매일 아침 끼니때 마다 혼자만 복용하기 좀 뭣해서 그와 한 알씩 나누어 복용했다.
“이거 뭐예요?”
“아 그냥 먹어둬”
여느날도 한 알을 건냈는데 왜 어젠 안주냐고 한다.
“뭐? 어제 줬잖아?”
“아니예요 사장님 안줬어요”. 안 받았다고 버틴다. bb
“너 혹시 오줌이 노랗게 나오지 않드냐?”
“네~ 그러잖아도 오줌이 노래서 걱정이예요. 나 많이 아픈 것 같아요.”
“ㅎㅎ 거봐라 그거 먹으면 오줌이 노랗단 말이야. 그니깐 어제 한알 먹은거 맞잖아!!”
“아니예요. 안 주셨다니까요”. 끝까지 안받았다고 버틴다.
“알았다. 미안혀 내가 깜빡한 모양이다. 미안하다. 그만하자. 근데 샤르만! 난 그런것도 챙겨주고 하는데 넌 뭘하냐? 산속서 맨날 카레만 먹으니 비타민 생각이 난다. 너 그런거 안 가지고 다니니? 눈칫것 좀 살아라! 짜샤!”
비실비실 웃으며 “샤르만”이 주머니에서 뭘 뒤적뒤적 꺼낸다. 순간 난 이 친구가 비타민을 혹시나 가지고 있을까 했는데…
담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사장님 여기 비타민!”
와하하. 난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웃었다. 그래 그래 흡연자들에게 담배가 비타민이지 뭐 별 것 있겠니? 둘이는 정답게 한대씩 불을 붙쳐 하얀연기를 허공에 날렸다.
사루만의 내공에 하루의 모든 피로와 아픈 무릅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하루였다.
10일차
어제 도착한 “지누”는 다른 롯지에 비교하면 가히 낙원이다.
뽀송뽀송한 이부자리는 물론, 다양한 메뉴의 식단. 앞마당에 가득한 꽃과 열대식물들… 주인은 꽤나 지체가 높은 사람인가 보다. 별을 두개나 달은 장성의 사진이 벽에 엄중히 걸려있다. 한눈에도 사치스럽게 보이는 안주인의 선글래스와 배경에서 그것이 네팔이 아님은 한번에 알아보겠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난 분명한 자를 대고 칼로 긋는 위력자들의 삶과 어제 보았던 포터들의 삶이 극한의 경계로 서로 베어져 나가는 것에 놀라는 것 뿐이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하산을 한다.
사르만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길이 끊겨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 돌아야 얼마나 돌아가겠는가. 지속적인 내리막 중간중간 약간의 오르막은 아픈 무릅이 잠시 쉴 수 있어 오히려 편안했다.
멀리서 반대편 산자락이 흘러내린 것을 본다. 그 주위도 조만간 모두 저 거친 강물에 다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또 길을 내고 산을 오르내릴 것이고, 다음해 비는 또 그 길을 지울 것이다. 이것은 이 산하가 닳아서 얇아지고 낮아질 때까지 유구할 것이고, 그 산에 곁들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한 그것도 유구할 것이다.
마지막 롯지에 들러 오이를 사 먹었다. 산행중 모든 곳에서 오이를 구할 순 없지만, 우리네 호박만한 것이 달고 연하다.
산이 험해도 이곳의 토양은 기름진 모양이다. 키가 훌쩍 넘는 옥수수와 쟁반만한 오잇닢, 호박만한 오이. 이 땅이 척박하다면 이렇게 탐스럽게 자랄 수 있을까?
잠시의 휴식을 뒤로하고 길을 걷는데, 허름한 민가가 있다. 할머니(노파?) 며느리쯤 보이는 여인 그리고 올망졸망 아이 셋이 있다.
순간 아직 몇 개 남아있는 초촐릿과 과자가 생각났다. 잠시 가방을 풀고 아이들에게 초콜릿과 과자 그리고 열쇠홀더를 주었다.
한눈에 보아도 곳간엔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퉷마루에서 털고 있는 많지 않은 옥수수가 이들의 식량쯤 될 것 같다.
드디어 큰길로 나왔다.
조금 내려가면 찝차가 다닌다. 그리고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갈 수가 있고, 다시 택시를 타면 “포카라”의 호텔로 가는 것이다. 나의 ABC 여정이 이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큰길에 나와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래 고생했다 사루만, 너 아니었으면 아마도 못 했을 거야.. 고맙다. 오늘 저녁 근사하게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자!”
“네 사장님. 좋잖아요. 이렇게 내려오니깐 ㅎㅎ”
우린 씩씩하게 신작로를 따라 찝차가 대기한 곳으로 와서 짐을 풀었다.
“휴~ 다왔다”
호사다마라 할까?
“카투만두”에서 구입해 산행 내내 메고 다니던 가방이 안 보인다.
이게 어디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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