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역은 문명 교류의 장인가? 중국 패권주의의 현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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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간 교류가 이루어 진 곳, 실크 로드. 종교간 교류는 물론 교역이 이루어진 통로다. 중국의 청해성은 티벳 문명과 중국 문명이 공존하는 곳이고 신장성과 감숙성은 위그루족과 중국의 한족이 더불어 살고 있다. 유목 문명과 이슬람 문명 그리고 한자 문명이 공존하면서 동서 교역의 통로 역할을 한 곳이다.
이들 서역 3개 성을 돌아보기 위해 이른 새벽 마눌의 도움을 받아 삼성동의 도심공항터미널에서 아침 5시 20분 버스를 탔다. 오전 일찍 출발한 대한항공 편으로 서안에 도착하니 이웃 같이 친근한 느낌이다. 작년에도 같은 일행과 함께 서안에 들렀었기 때문이다. 다만 입을 열면 말이 달라 중국에 왔음을 느끼게 해준다. 어쨌거나 이웃이라고 생각하니 여행을 위해 특별히 들러 볼 곳도 없다는 생각이다. 작년에 들렀던 서안성 인근 식당에 가서 점심먹고 식당 이웃의 족도에 들러 발마사지로 여로의 피로를 풀어낸다.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발마사지를 꽤 받아 본 편이지만 이 집에서는 서비스와 마사지 품질이 한결 같다. 종업원들에게 마사지를 위한 끊임없는 투자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결과일 것이다.
발마사지 후 서령 행 오후 다섯 시 반 기차 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세버스 기사가 숨 가쁘게 서안역으로 버스를 몬다. 러시아워라서 차가 많이 밀려 손님인 우리 일행이나 기사 모두 마음이 급해진다. 서울에서 서안-서령 간 열차 예약 바우처만을 출력해 가져왔기 때문에 열차 티켓과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서안서역에 겨우 도착하니 역 광장이 완전 북새통이다. 주말을 맞아 많은 여행자들이 한꺼번에 몰린 탓이다. 우리 여행 팀의 리더를 자임하는 연세대 중문과의 이 규갑 선생이 인산인해의 사람 숲을 헤집고 바우처와 열차 표를 교환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다른 때 같으면 여행가이드가 해야 할 일을 가이드가 서령에서부터만 나오기로 했기 때문에 가이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이 교수의 몸이 달았다. 작은 그룹이지만 한 그룹을 대표한다는 것이 이처럼 일이 쉬운 일만은 아니다. 황망 중에 어찌어찌하여 겨우 티켓 카운터와 연결되어 차표 교환을 시도하였는데 예약 시간에 우리 일행 명단이 들어 있지 않단다. 체면도 구기고 몸도 닳은 다혈질의 이 교수가 한국 여행사의 현지 담당 여행사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화풀이 한번 제대로 해댄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열차 스케줄이 다섯 시 반에서 여덟 시 반으로 미루어진 것을 한국의 여행사가 우리 그룹에게 미리 통보하지 않아 생긴 한바탕의 소란이었다.
바쁘게 역으로 내달은 상황과는 달리 시간이 남아도는 여건으로 반전되어 서안역의 침대차 전용 대기 라운지에서 시간을 죽여야 하는 지리한 상황으로 급반전 되었다. 우리 그룹은 여덟 명에 불과하지만 서울의 면세점에서 고급 양주를 열한 병이나 사가지고 온 자타가 공인하는 알코홀릭 집단이다. 가져온 양주 중 한 병을 개봉하여 나누다 보니 세 시간의 대기 시간이 금방 흘러간다. 중국 여행할 때마다 열차의 침대칸 승객 전용 라운지에서 느끼는 것은 중국 사회에서도 자본주의와 시장경제가 확실하게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 광장의 우글우글한 인민들과는 달리 침대 전용 라운지의 분위기는 우월적으로 쾌적하기 때문이다. 엄격히 얘기하면 시장경제나 자본주의의 작동이라기보다는 일부 부유층과 권력층을 위한 특권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중국에서의 침대차 여행은 늘 피로한 느낌이었는데 이번 열차 숙박은 의외로 숙면이었다. 이제 나름대로 침대차 장거리 여행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이튿날 아침 일찍 서령역에 도착하니 조선족 가이드 허 해웅과 활달한 성격의 현지 여자 가이드가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이들의 안내를 받아 역 주차장의 소형 버스에 몸을 싣고 잠시 이동하여 우육면으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다. 이 지방에서는 국수가 쌀밥보다 훨씬 더 선호되고 있는 분위기다. 값도 저렴해서 중국돈 7위안 즉 우리돈 1400원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 이러니 굳이 수고해가면서 아침밥을 집에서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중국의 아침 식사 문화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염호로서는 세계에서 사해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는 청해호를 향해 버스는 네 시간을 달린다,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과 맑고 투명한 하늘을 업고 유채꽃이 만발한 초원을 달리니 눈이 시리도록 부시다. 우리 이름이 하루나인 유채는 중국에서 식용유로 널리 활용되기 때문에 계절 변화에 따라 중국 대륙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된다고 한다. 유채꽃은 밝고 화사해서 그 자체로도 많은 관광객들을 많이 불러들이고 있지만 유채 꿀도 그 깔끔하고 투명한 맛 때문에 매우 인기 있는 상품이다.
버스가 청해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한 시간 이상을 달릴 정도로 호수는 큰 규모다. 해발 3200미터에 위치한 청해호는 중국 고대에는 서해로 불리다가 지금의 청해호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 호수는 중국을 대표하는 함수호라고 한다. 2천만년 전만 해도 티베트고원은 바다였는데 이후 해저가 융기되어 육지로 변한 후 오랜 세월 동안 물이 농축되어 염분 농도가 높은 함수호로 바뀐 것이다. 청해성은 바로 이 호수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호수는 그 규모와 해발 높이에서 몇 년전 돌아본 남미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의 티티카카호수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버스 차창의 왼쪽으로는 초원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는데 양, 소 그리고 말을 키우기 위한 빠우와 이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민박용 빠우들이 촘촘히 초원을 메꾸고 있다. 목동들의 여행자 대상 승마 호객도 여기저기서 시끄럽다. 하늘, 호수, 초원이 모두 푸르디 푸른 가운데 티베트불교 타르쵸의 울긋불긋한 모습이 잘 어우러진다. 중국의 경제규모가 날로 커지고 이에 따라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여가를 즐기는 인구도 매년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자가용은 물론 밝은 색갈의 스포츠웨어로 한껏 멋을 부린 자전거 동호인들도 도로에 넘쳐나는 모습이다. 우리가 20여년의 차이를 두고 일본을 따라왔듯이 중국 역시 우리 뒤를 맹 추격해 오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 일본을 보면 우리의 미래가 보였듯이 우리를 보년 중국의 미래가 보일 것 같다. 청해호를 오른쪽으로 끼고 계속 달리니 초원의 끝에 새들의 낙원이라는 조도에 이른다. 청해호의 오월과 유월은 각종 철새들의 도래지로 유명한데 당국은 청해호 끝에 있는 조도를 철새 조망지로 개발해 관광자들을 유치하고 있었다. 조도는 그 규모나 서식하고 있는 새 종류로 보면 우리 강화도의 각시바위만도 못한 섬이다. 그러나 접근성과 관광지 인프라로는 각시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조도는 기러기, 갈매기, 두루미가 주로 서식하고 있는 작은 돌섬인데 반해 우리 각시바위는 희귀종인 저어새가 주 서식종이고 두루미 등 다양하고 귀한 새들이 떼지어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해호에서는 황어 요리가 일품이라는데 그걸 못 먹어본 게 아쉽다. 청해호의 황어 포획은 불법이고 그래서 그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다고 했다.
티베트불교 거루파[格鲁派]의 6대 사원으로 손꼽힌다. 명(明)나라 때인 1560년에 축조되었으며, 4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샤오진와쓰[小金瓦寺], 다징탕[大经堂], 다추팡[大厨房], 주젠뎬[九间殿], 징탕[经堂], 포타쓰[佛塔寺]로 구성된, 티베트와 중국의 예술구조가 서로 결합한 건축군을 이루고 있다. 티베트어로 '군번셴바린[滚本贤巴林]'라고 하며, 그 뜻은 '십만 마리의 사자가 울부짖는 불상의 미륵사'이다.(이 부분 네이버 자료 전재임)
유가협으로 이동하여 황하 상류의 댐 수몰지역을 쾌속 보트를 이용하여 빗속의 황하를 거슬러 올라 10만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병령사의 장관을 감상하다.
중국 간쑤성 영정현(永靖縣) 현성 밖의 서쪽으로 17km,소적석산(少積石山)에 있는 불교석굴군. 1951~52년에 발견, 조사되었다. 황하 상류의 북안 협곡에 있으며, 북위(北魏)의 서방과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흥사암의 비위산에 2층,3충으로 불감(佛龕)∙석굴이 파여져 그 총수는 195개. 황폐가 심하며 현재 시대를 알 수 있는 것은 서진(西秦)굴 2. 북위말기굴 7,동기감(同期龕) 30,수(陽)굴 4, 동감 1, 초당굴 2, 동감 1, 성당(盛唐)굴 14, 동감 104, 중만(中晩)당굴 3,동감 10, 명굴 2, 동감 1이다. 최고(古)의 명분은 제169 굴의 ‘서진∙건흥원년’(420의 造像記)이다. 근년 이 굴의 벽화 중에 서진∙태초 13년(400) 경 이 땅을 경유해서 서역으로 향한 ’법현(法願)의 발원명(發願銘)이 발견되어,초창(草創)은 4세기 말로 하는 설이 유력해졌다. 당대의 불상조각이 많이 남아 있고,또 각 시대의 벽화도 보인다.<네이버 자료 전재>
간쑤성(甘肃省, 감숙성) 린샤후이족자치주(临夏回族自治州, 임하회족자치주) 융징현(永靖县, 영정현) 서남 약 40㎞ 지점의 지스산(积石山, 적석산) 대사구(大寺沟) 서측 암벽에 있는 석굴. 3세기 서진(西晋) 초기에 황하(黄河) 북안 대사구(大寺沟)의 암벽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서진(西秦) 건홍(建弘) 4년(420) 정식으로 건립에 착수하였다. 이 석굴은 상하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초기에는 당술굴(唐述窟)이었으며 강어(羌语)로 귀신의 굴인 귀굴(鬼窟)을 의미하였다. 당대(唐代)에 용흥사(龙兴寺), 송대(宋代) 영암사(灵岩寺)로 불리다가 명(明) 영락(永乐) 연간에 병령사(炳灵寺)로 개칭되었다. 병령(炳灵)은 장어(藏语)로 천불(千佛), 십만미륵불주(十万弥勒佛洲)라는 의미이며 석굴은 현재 34개의 굴과 신주를 모셔두는 감(龛) 149개, 석조상(石雕像) 694점, 소조상 82점이 보존되어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병령사석굴 [炳灵寺石窟] (국가급 중국문화유산총람, 2010.8.1, 도서출판 황매희) (이 부분 네이버 자료 그대로 전재) 병령사석굴 [炳靈寺石窟, Binglingsi]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
오후 늦게 란주역에서 우루무치 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일행은 가져온 양주를 세 병이나 마셨다고 했는데 술을 마시지 않는 나는 이번 여행 일정의 두 번째 열차 숙박을 편안하게 했다. 아침 일찍 깨어 보니 차창가로 끊임없는 지평선의 사막이 펼쳐진다. 이 사막은 석유와 가스의 보고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이 위그르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 서역지방을 강점해온 이유라고 한다.
오후 일찍 우루무치에 도착하니 역광장이 가족을 기다리는 간절한 모습의 주민들로 꽉 차 있다. 어릴적 보던 모습이라 향수가 밀려오면서 아련해 진다.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소위 색목인으로 불리는 위그루 족들이 많이 보인다.
호텔에 짐을 풀기 전에 길거리 노점에서 양꼬치와 양뼈국물로 허기를 채운다. 오후에 특별한 일정이 없어 남궁원장과 시내 바자에 들렀다. 실크로드의 잔영이라도 만나볼까 했지만 그냥 평범한 시장이다. 남궁원장이 여행길에 일행과 나눠먹겠다며 견과류를 종류별로 많이 산다. 날씨 탓으로 이 지역에서는 열대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고 했다.
해발 3천미터 가까이 버스를 타고 오르니 빠우와 양떼들 그리고 유목민들의 낙원인 나라티공중초원에 이른다. 서늘한 느낌의 고도이지만 아름다운 초원이 펼쳐져 있고 한켠으로는 만년설로 뒤덮인 천산산맥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그림같은 풍경이다.
최근에 UNESCO에서 자연 유산으로 지정했다는 바인부르크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아름다운 초원이다. 백조가 서식한다는 고원 저수지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모기떼들의 극성때문에 사진 작가들이나 일반 관광객 모두 안전망으로 무장하고 다닌다. 버스로 한 시간여를 달려야 마주하는 9곡 18만의 경치도 빼어나다.
신장성에서 우루무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쿠얼러는 석유와 가스 때문에 도시도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고 사람들의 모습도 부유해 보인다.
쿠얼러를 마지막 숙박지로 하여 우리 일행과의 여행은 끝이다. 돈황의 막고굴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나는 일행과 헤어져 따로 우루무치에서 1박을 홀로 지낸다. 우루무치역 인근의 2성급 호텔인데 시설은 나름 괜찮지만 리섭션 데스크에서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돈황, 투루판에서 같은 어려움을 겪을 생각을 하니 잠자리가 편치 않다.
이튿날 아침 일찍 우루무치 역에 큰 가방을 맡겨두고 배낭만 맨채 유원행 침대칸 기차에 다시 오른다. 침대칸에 들어서니 노인과 청년이 이미 들어와 있었지만 대화가 되지 않아 억지로 필담을 몇 마디 나눈 후 잠에 떨어지다.
2주일여 쌓인 피로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보니 유원역 승차권 환표하라고 승무원이 깨운다. 중국철도의 침대칸은 승차 시 기차표를 카드와 교환해 보관했다가 도착역이 가까워 오면 다시 교환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승무원이 카드를 교환해 준 후 침대 이불을 정리해버려 어디 앉아있을 곳조차 없는 곳은 짐도 그냥 두기가 불편하다. 역이 가까웠으려니 했지만 기차는 한없이 달린다. 승무원의 눈치가 보여 하는 수 없이 짐을 꺼냈더니 이내 객실을 채워버린다. 침대칸은 4인용이지만 하밀역에서 두 중국인 내리고 한 자리는 우루무치에서부터 비여있었기 때문이다. 하릴없이 복도를 왔다갔다 했더니 예의 그 승무원이 승강기 쪽에서 기다리라고 손짓을 한다. 가방을 들고 승강기 쪽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기차는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달린다. 이렇게 한동안을 서있다 보니 화가 치민다. 비싼 침대칸 요금 지불하고 입석 승객처럼 서성여야 하다니. 그 승무원이 괘씸하다. 한 참을 더 서성이다가 가방을 다시 복도로 옮겨 놓고 그 승무원에게 화풀이를 해댄다. 마치 중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차별 받고 있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승무원들이 유원역에서 임무교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승무원은 자기 임무를 마치기 전에 빈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승강 복도 쪽에 서 있을 때는 화장실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것을....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으로 나서니 택시 기사들의 호객으로 광장이 왁자지껄하다. 모두 돈황행 손님을 합승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한 택시기사에 이끌려 택시에 맨 처음으로 몸을 실으니 금방 네 명의 손님이 찬다. 택시가 이내 출발하나 싶더니 누군가가 트렁크에 실려있는 내 가방을 들고 내달린다. 기겁을 하여 택시에서 내려 쫓아보니 다른 택시 기사가 내 짐을 자기 택시 트렁크에 싣는다. 다른 손님들의 짐도 모두 옮겨 싣자 다른 손님들도 이 택시로 옮겨 탄다. 그리고 택시가 출발하더니 얼마 못가서 이번엔 소위 가와발 차에 다시 짐을 옮기더니 택시기사도 그 차로 옮겨 탄후 드디어 돈황을 향해 차를 몬다.
돈황을 향하는 길 초입은 아스팔트 공사 때문에 임시 비포장 도로를 달려 먼지 바람이 폭풍같은 길인데 택시는 쿵쾅대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달린다. 마침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석양과 함께 한 시간여의 고속화도로를 굴곡도 없이 달리다 보니 돈황이다. 실크로드 길에 있는 도시들은 모두 사막의 오아시스에 정착되어 상대적으로 쾌적함을 안겨준다. 택시기사는 돈황입구에서 우리 일행을 모두 내리게 하더니 주유를 한다. 중국 사람들은 참 편하게 사는 것 같다. 손님을 내려놓고 주유하는 택시기사나 손님 모두 천연덕스럽다.
조그만 규모의 시내에 들어서니 휘황한 조명으로 관광지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돈황 거리가 마음에 든다. 주상복합건물 2층에 있는 호텔도 2성급이지만 깔끔하고 쾌적한 내부가 마음에 든다. 이런 정도의 호텔이라면 굳이 비싼 돈 주고 좋은 호텔에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런데 호텔에 체크인 하면서 좀 문제가 생겼다. 우선 프런트 직원이 영어가 전혀 안 되는 데다 우루무치의 한국인 가이드가 조식포함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아침식사가 안된단다. 하는 수 없이 호텔예약을 대신한 돈황의 한국인 여행사 직원에게 연락했더니 금새 달려왔다. 돈황은 그만큼 작고 아담한 도시다.
어제 막고굴을 홀로 예쁜 중국 아가씨 영어가이드 받아가면서 잘 돌아봤습니다. 중간에 이탈리아 로마에서 온 부부가 합류해서 모처럼 엉성한 이탈리아어 먼지도 좀 털어냈구요. 명사산에서는 홍콩에서 온 친구와 합류하여 낙타 잘 탔습니다. 오늘 새벽에 투루판에 홀로 내려서 좀 당황했습니다. 주위에 영어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택시 호객만 난무했지요. 손발짓으로 택시기사와 요금을 네고하고 있는데 마침 영국 커플이 지나길래 도움을 청했더니 이 친구들 중국어를 아주 잘 하더군요. 한국에도 좀 머문 적도 있었다고 하고.. 나중에 알고보니 이 젊은 커플들, 옥스포드에서 중국문학으로 학위하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자유로운 영혼들이었어요. 방학을 이용해 실크로드 북부를 여행하고 있는 중이었지요.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가는 게 여행의 묘미지요
매일 색다른 경험을 하는 다이내믹한 여행이었지만 일정이 강행군인 탓에 매우 피곤하다. 피곤한 만큼 집이 그립다. 우리가 하는 여행 일정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는 영국 커플의 경우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된다. 유원역에서 밤샘기차로 와 트루판역에서 조우한 스코틀랜드 부부교사인 빌리와 조안나는 내가 1박2일에 하는 트루판 여정을 3박4일 동안 한다고 했다. 그만큼 사전 준비도 충분히 했을 것이고 교육 목적이든 개인적인 관심이든 충분한 학습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 아침 나는 그들을 뒤로 하고 트루판호텔을 나섰다. 오늘 귀국 비행기는 새벽 1시 반이기 때문에 모처럼 호텔방에서 느긋하면서도 늦도록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이메일과 뉴스들을 챙겨본 후였다. 호텔에서 10분 안 거리인 버스터미너도 어제 택시로 지나치면서 보아두었기 때문에 느긋하게 걸어간다. 터미널 가는 길에 길거리에서 복숭아도 사고 물도 샀는데 가게에 터미널 위치를 물어보니 이미 지나쳤단다. 대화는 물론 빌 리가 써준 한자 필담이다. 그나저나 살다보니 별일 다 겪으며 산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젊은 부부를 내가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니.
가던 길을 돌아서서 이번엔 길거리 사람들에게 쪽지를 계속 보여주면서 터미널 위치를 확인한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큰길 건물 뒤편으로 터미널이 숨어 있었다. 우루무치행 버스는 많이 기다리지 않고도 출발하는 표를 바로 구매할 수 있었다. 11시 50분 버스였는데 35분쯤 승강장에 가니 이미 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바로 차에 오르니 이미 좌석이 꽉차 있었다. 승차 후 5분 후인 버스가 50분이 아닌 40분에 출발한다. 이런! 시간 맞추어 타려고 했으면 버스를 놓칠 번 했는 걸! 그런데 이게 왠 일? 버스가 길거리에 서더니 한 젊은이가 화가 잔뜩난 채로 버스에 오르면 기사에게 큰 소리로 화풀이를 한다. 통로 건너 내 옆자리 한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바로 이 청년이 그 좌석의 주인공이었다. 시간 맞추어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버스가 이미 출발해 터미널 측이 마련한 차를 타고 쫒아온 것이다. 참 별일도 다 있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기 위해 뒷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더니 ‘Are you foreigner? 하고 물어온다. 얼마나 반가운 커뮤니케이션인지! 그것도 밉지 않은 중년 여자였다. 등받이는 원하는 대로 젖히란다. 이렇게 해서 뒷자리 여성과 대화가 이어졌는데 위그르 족으로 트루판 집에서 우루무치의 직장으로 출근하는 길이란다. 물론 우루무치에 가면 한 주 정도를 머물다가 돌아오는 기러기다. 우루무치의 한 TV방송사에서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한단다. 정확하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듬거리는 영어라도 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게 몹시 즐거운 모습이다. 그래서 이 여인을 통해 터미널에서 우루무치 박물관 가는 필담, 박물관에서 기차역 가는 필담 그리고 기차역에서 공항가는 필담을 모두 한자로 전해 받았다. 물론 구간 별 택시 요금도 대략 포함한 정보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날 보고 터미널에서 박물관까지 버스를 타고 가란다. 택시타면 25위안이지만 버슨 단돈 1위안이라면서. 어차피 비행기 타기까지는 시간이 충분하니 경험삼아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버스 좌석에서 잠시 잠에 떨어졌다 차창밖을 내다보니 왼쪽으로 거대한 염호가 펼쳐진다. 신장에는 여기 저기 염호가 많이 관찰된다. 차창 넘어로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숲을 이루어 돌아가고 있다. 중국의 NRJSNS 저엳능 부녀부믐 간빈지자.
버스가 우루무치 톨게이트를 통과하니 승객들이 모두 내린다. 뒷 좌석의 우루무치 여인, 하얄리아가 신분증 검사가 있으니 같이 내리잔다. 따라 내렸더니 모든 승객들이 검색기에 신분증을 대고 검색대를 지나간다. 나는 여권을 보여줬더니 책임자인 듯 한 경찰에게 인도한다. 이 경찰은 중국 비자를 확인한 후 여권을 돌려주었다. 내용을 짐작하면서도 하얄리아에게 검색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말을 더듬으면서 알지 않느냔다. 중국 정부가 위그루 족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란다.
우리 일행이 단체로 전세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도 검문이 매번 있었지만 동승한 가이드가 수속을 대신하거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통과되기도 했었다. 위그루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니 굳이 외국인인 우리를 검문할 이유도 딱히 없었을 것이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하얄리아가 친절하게 버스 정류장까지 안내해주면서 7번 버스를 타란다.
시내 버스는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았고 40분여를 가니 박물관 앞 정류장이다. 박물관에서 원정선생이 부탁한 미션을 대충 완수하고 이번엔 박물관 직원에게 물어 기차정거장행 52번 버스를 타기로 한다. 버스 타기 전에 점심도 굶고 하였으니 박물관 오른쪽 담을 끼고 있는 면집에 들러 반면 한 그릇으로 점심 겸 저녁을 때운다. 식사 후 면집 바로 옆에 있는 랑집에서 서울 집으로 가져갈 랑을 종류별로 구입했다. 신장지역의 면은 바로 쳐서 만들뿐만 아니라 재료가 신선해서 맛이 매우 좋다. 벌써 3주째 매일 면을 최소한 한 끼는 먹는 데도 물리질 않는다. 좀 짐이 되긴 하겠지만 빵쟁이인 마눌과 아이들이 가져갈 랑을 매우 좋아할 것 같다.
이번엔 박물관 직원이 가르쳐 준대로 52번 버스를 타고 돈황 갈 때 기차역에 맡겨둔 큰 짐을 찿기 위해 우루무치 역으로 향한다. 이 버스 역시 그다지 복잡하지 않아 타볼 만한 경험이다. 여행은 역시 현지의 대중들과 어울려야 제 맛이다. 역시 40분여를 버스를 타고 기차역에 내려 짐을 찾아서 두 개의 배낭으로 나누어 가지고 다니던 짐을 큰 가방으로 다시 정리했다.
큰 가방을 챙겨들고 역 광장의 택시를 잡아 타는데 택시 옆에 서성이던 기사가 어디 가느냐고 먼저 묻는다. 이럴 때를 대비해 하얄리아가 적어준 필담을 보여주니 얼른 핸들을 잡는다. 한 2-3분여 쯤 갔을까? 이 기사가 핸트폰에 120라고 적은 숫자를 보여준다. 화를 내면서 계량기를 가르치며 계량기대로 가자고 했더니 이번에 100을 보여준다. 더 화를 내며 계량기대로 가자고 했더니 어딘가 전화를 한다. 러쉬아워와 겹쳐 시내에서 차가 밀리기도 했지만 이 친구 분명 길을 돌아가는 눈치다. 길을 돌아 어느 건물 앞에 세우더니 담배 필 시간을 달란다. 화가 나서 그냥 가자고 했더니 막무가내로 그냥 서 있다. 2-3분 지났을까? 어떤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와 앞자리에 탄다. 이것들 봐라! 분을 삭이며 가고 있는데 택시가 ㄷ 자 길을 돌아 다시 원래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 택시 한참을 대로로 가다가 어느 아파트 촌에서 다시 샛길로 빠진다. 화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공안과 펄리스를 번갈아 가면서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잠시 아파트 촌에 서 있던 택시에 아파트에서 한 남자가 황급히 나타나더니 기사가 임무 교대를 한다. 내 참 기가 막혀서! 더 이상 분을 참을 수 없어 차에서 내려 택시 플레이트 넘버를 수첩에 적었다. 한 참을 우회한 듯한 택시가 이제야 전 속력으로 차를 몬다, 그러나 요금은 이미 60위안을 넘겨 표시되고 있었다. 가이드도 그랬고 하얄리아도 그랬고 공항까지 택시 요금은 많아야 60위안이고 시간도 3-40분 소요될 거라고 했었다. 시간도 이미 40분을 휠씬 지났을 것 같은데 10분 후에 공항에 도착할 거라고 필담을 건넨다. 화가 북받친 나는 우리 말로 계속 공안과 펄리스를 외쳐대다가 수첩에 적어둔 플레이트 넘버를 택시기사에게 보여준다. 이를 어쩐다!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공항에 도착하는데로 요금 지불하지 말고 공안에게 가자고 해본다? 에이 화가 나긴 하지만 택시비 좀 바가지 썼기로 서니 목숨걸 거 있어. 돈 좀 더주고 말지.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도착에 짐을 내리게 하고 택시비를 계산하려고 하니 뜻밖에 택시 기사가 요금을 안 받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건 아니지. 정당한 요금은 내야잖아.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잔돈 모두를 쥐어 주었더니 20위안 한 장만을 집어들고 그냥 꽁무니를 감추고 내달아 버린다. 허 참! 중국의 법 집행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구나! 큰소리 치며 난리친 보람이 있었네!
터미널 안의 화장실에 들러 일단 볼일 보고 손도 닦고 나오니 바로 커피숍이 보인다.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집이지만 별이 네 개나 붙어 있다. 애라! 어차피 비행기 탑승까지는 시간이 네 시간 이상이나 남아 있으니 좀 비싼 곳에서 쉬어보자. 그래서 구석자리에 자릴잡고 모처럼 커피 한잔을 시킨다. 짐을 다시 정리하기 위해 구석자릴 잡았으니 커피 기다리는 동안 짐을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커피가 나왔고 이내 다시 웨이트레스가 커피값을 선불을 요구하는 데 88위안이란다. 뭐? 88위안? 8.8위안이겠지! 그런데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보여주면서 분명히 88위안이란다. 내원참! 기가 막혀서! 내가 지금까지 먹어본 커피 중 가장 비싼 값이다! 택시 1-20원 바가지 쓰는 게 억울해서 그렇게 난리 쳐서 왔더니 거피숍에서 덤터기 다 쓰는구나! 세상이 이래서 공평한 법이지. 이제서 뭘 어쩌겠어. 값을 미리 확인하지 못한 내가 잘 못이지. 그래도 어깃장을 부려야 한다. 선불은 못하겠다. 비싼 거피 마셨으니 시간 충분히 쓰고 나갈 때 계산하겠다고 버텼더니 하는 수 없었던지 웨이트레스가 포기하고 물러선다, 그래! 생애 최고 비싼 거피 먹게 생겼으니 메뉴판 사진이나 찍어가자. 그래서 스마트 폰을 들여댔더니 예의 그 웨이트레스가 달려와 사진을 못 찍게 한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공개된 메뉴판을 추억을 위해 찍겠다는데 안된다니. 그래서 큰 소리로 와이why? 를 계속 외쳐댔더니 메뉴판을 가져가 버린다. 그래서 쫓아가 매니져 불러오라며 악을 썼다. 그랬더니 직원들 모두가 놀라는 모습이다. 아랑곳 하지 않고 한 테이블의 메뉴판을 웨이트레스 면전에 가져다 놓고 사진 촬영을 했다. 그리고는 매니저 불러 올라고 으름장 놓고 자리에 돌아와 넷북을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그랬더니 잠시 후 예의 그 웨이트레스가 와서는 빈 커피잔을 치워 가면서 커피값을 자기가 물을 테니 가방 가지고 꺼지라는 제스쳐를 한다. 이런 쌍! 누굴 뭘로 알고! 기가 막혀 분을 삭히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했나 하고 반성도 해본다. 그러나 커피값을 안내고 그냥 나설 수는 없지. 커피 그냥 얻어먹자고 난리를 피운 것은 절대로 아니니까. 아니나 다를까. 바로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타나서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물론 다 얘기듣고 온 것이겠지만 분을 못 삭이고, 그간 있었던 일을 주어 뱉는다. 그랬더니 메뉴사진도 찍어도 되고 자기들이 잘 못했다고 사과를 한다. 나는 당사자인 위이트레스가 와서 직접사과하라고 요구한다. 먼 발치에 있던 웨이트레스가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의 요구가 만만치 않은지라 마지 못해 와서 숨넘어가는 소리고 '쏘리'하고 이내 돌아선다. 이 모습에 불쾌해진 내가 절을 해야 사과로 받아들이겠다고 강경하게 나섰더니 미안하다고 하는 걸 매니저 자신이 분명하게 들었으니 사과가 아니냐고 사정을 한다. 커피 한 잔 더 줄테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잔다. 마지못해 나도 이 선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돌이켜 보니 참 많은 일을 겪은 하루였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