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나이의 추억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0:18
조회
205
사스(sars) 때문에 해외여행은 꿈도 꾸고 있지 않은데 신문사로부터 프레스투어 제의가 왔다. 이 와중에 팸투어라니! 브루나이라는 곳도 동남아 언저리일터인데 사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 그러나 여행준비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30만이 조금 넘는 인구의 브루나이왕국은 약간의 중국계와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전 인구가 말레이계인데 사스가 문제가 되자 아예 사스 감염지역과의 교류를 전면적으로 금지해버렸다고 한다. 따라서 브루나이는 물론 말레이시아도 중국, 싱가포르 그리고 필리핀 등과의 항공운항을 중단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함으로써 단항 대상 국가들로부터는 욕을 먹었지만 그 덕에 사스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운 여행목적지로 남아있게 되었다.
토요일 오전 늦게 인천공항을 출발한 말레이시아항공 비행기는 네 시간을 넘게 밝은 햇살을 받다가 코타키나발루에 내릴 때는 구름과 빗살을 헤집고 을씨년스런 분위기의 공항에 내려앉았다. 적도의 열기와 추적추적한 열대의 끈끈함이 온몸에 감겨와 마치 우리나라 장마철 시작 전의 불쾌감이 느껴진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잠시 머문 우리 일행은 로얄부르나이 항공에 몸을 실었는데 여승무원들이 머리에 터번을 두른 채 서빙하는 모습이 이국적이긴 하지만 왠지 넉넉한 분위기를 풍겨준다. 비행기 이륙 직전 알라신에게 안전한 비행을 기원하는 기내 방송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이지만 굵은 바리톤 음색의 기도 소리는 여행자의 고단함을 편안하게 달래주는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이슬람 기도가 이토록 평화롭게 마음에 와 닿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나중에 브루나이에 체재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여행자들을 늘 편안하게 대하고 있었는데 이런 게 모두 이슬람을 신봉하기 때문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호텔 수영장과 국립공원 입장 시 현금과 신용카드 등이 들어있는 지갑을 직원에게 맡겨 보았는데, 손댄 흔적 없이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을 만큼 이 나라 사람들이 정직한 것도 남의 것을 탐낼 줄 모르는 이슬람의 영향이란다. 9・11테러 이후 뭇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문명의 충돌은 기독교문명의 오만한 편견이었단 말인가.
코타키나발루 이륙 후 채 30분도 되지 않아 비행기는 부루나이의 수도 반다르 세리 베가완공항에 내려앉았다. 브루나이 전체가 싱가포르의 열배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라서 수도라고 따로 지칭할 것도 없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는 수도 반다르 세리 베가완에는 어느새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남지나의 망망대해를 품고 있는 엠파이어 호텔은 전형적인 리조트호텔로 건설되어 있다. 적도 지방 특유의 물결 하나 없이 숨죽인 듯 잔잔한 해안을 끼고 컨트리클럽이 조성되어 있고 컨트리클럽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엠파이어호텔은 말로만 들어오던 부자나라, 브루나이 왕국의 부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칠층의 아트리움을 받치고 있는 웅장한 규모의 대리석 기둥이 압도해 오는데 대리석 기둥 중간 중간을 금으로 장식하여 호화로움의 극치를 연출하고 있다. 황금 장식 기둥 뒤로 통 유리벽을 통해 펼쳐지는 남지나해의 평화로움은 황금 장식 기둥에 이어 또 한 번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모든 객실이 해변을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호텔 인테리어 역시 유럽풍의 넓고 높은 공간과 함께 모두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어 호화로움 그 자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호텔을 실제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칠성급 호텔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는 시설이다. 심지어는 수영장 바닥과 극장입구의 카펫까지 황금과 황금분으로 장식하거나 치장하여 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시설뿐만 아니라 손님 두 명당 한 명의 서비스종사원 고용을 원칙으로 하는 호텔 서비스도 완벽하게 제공될 수 있도록 종업원들이 잘 훈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호텔의 평균 객실 점유율은 일 년 내내 20%를 넘지 않아 왕실이 이 호텔을 국부의 상징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를테면 왕실은 초호화 호텔의 운영을 통해 신민의 고용을 책임지고 있다고나 할까?
호텔의 부대시설로는 잭 니콜라우스가 설계한 18홀 규모의 해변골프코스, 영화관 세 개와 450석 규모의 극장, 테니스코트, 스쿼시, 에어컨 냉방의 배드민턴 실내코트, 볼링장 그리고 야외와 실내 풀등을 최고급 시설로 갖추고 있어 세상과 절연하고 며칠 푹 쉬어가고자 하는 여행자에게는 리조트로서의 조건을 모두 구비한 완벽한 휴양지이다. 골프코스는 나이트 라운딩을 즐길 수 있도록 야간 조명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세계 100대 명문에 드는 로얄브루나이 골프클럽 등의 최상급 골프코스가 호텔 인근에 더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골프코스에는 내장객이 드물어 속칭 대통령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골퍼들의 천국이다.
이슬람 문화는 관광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술, 도박 그리고 여자에 의한 나이트 라이프를 용납하지 않고 있어 전형적인 이슬람국가인 브루나이는 음주가무를 즐기는 우리나라 여행자들에게는 반쪽 관광만을 제공하는 문화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브루나이는 디즈니월드 수준의 제루동파크라는 어뮤즈먼트 공원을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공원 안에는 다양한 놀이시설은 물론 폴로클럽, 골프장 등을 갖추고 있어 밤늦도록 가족단위의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밤 아홉 시에 공연되는 분수 쇼는 장관을 연출한다.
적도 아래 밀림지대인 브루나이는 요즘 각광받고 있는 생태관광의 보고이다. 반다르 세리 베가완선착장에서 건기에 수위가 낮아지면 악어도 출몰한다는 황토 빛 강을 따라 40여분을 쾌속으로 질주한 후 미니버스에 옮겨 타 15분 정도를 드라이브하면 룰루 템부롱 국립공원으로 이르는 협곡에 닿는다. 열대우림(rain forest)이 발달하여 트레킹과 래프팅을 즐기기 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구명대를 착용하고 5인승 조정에 올라 한 시간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국립공원 트레킹코스와 연결된다. 이 트레킹 코스의 마지막에는 지표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1,226개의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지난 잘못들을 반성하기도 하고 새로운 선행을 계획하기도 한단다. 계단 끝에는 닫집(canopy)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고소공포가 심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높이 솟아 모험을 즐기는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룰루 템부룽국립공원의 트래킹에서 돌아오는 길에 거친 숭아이강을 따라 래프팅을 즐긴 후 강 끝에 조성되어 있는 수상촌과 야시장을 돌아보는 것도 이국적인 경험이다.
호텔 객실에 돌아와 창가에 서니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한 바다가 객실 앞에서 바로 펼쳐진다. 문명을 뒤로한 채 인적 드문 섬나라에서 수평선과 탁닛한 스님의 책 한권에 빠져드는 것은 세상의 온갖 번뇌, 질시, 투기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 영혼과 자연이 동화되는 편안함으로 이끌어 준다. 태고의 원시와 인간 본래의 모습이 이랬을 것이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은 어린 시절 장마 끝에 잔디밭에 누어 꿈을 실어 보내던 그 모습이다. 바다는 하늘하기에 따라 그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짙푸른 색의 코발트가 되었다가 에메랄드빛으로 변화하기도 하지만 남양만의 석양은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다. 평화와 환대가 모두 알라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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