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간과 한 시간

작성자
박 의서
작성일
2023-02-18 20:18
조회
210
세계적으로 여행을 가장 많이 하고 또 즐기는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이다. 독일 사람들은 여행인구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여행 기간도 가장 길게 쓴다. 그들은 시간만 주어지면 여행을 떠난다. 이런 독일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은 가까운 이웃 이탈리아다. 독일인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는 보통 이탈리아를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지방 등의 북부 이탈리아, 로마와 토스카나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이탈리아 그리고 나폴리와 시칠리아 섬 등을 아우르는 남부 이탈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를 삼등분하여 여행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중 한 지역을 여행하는데 대략 두 주 정도를 할애한다. 그러니 독일인들이 이탈리아 여행을 모두 끝내려면 한 달반이 걸리는 셈이고 세 번의 휴가를 활용해야 하는 셈이다. 독일인들의 이러한 여행 패턴은 이탈리아반도 전체가 볼 것이 도처에 널려 있는 관광자원의 보고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독일 사람들의 철저한 여행관과 느긋함을 반영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등의 유럽 주요 지역을 관광하는데 일주일에서 이주일 사이의 상품들이 주로 팔리고 있다. 그러니 이런 상품을 이용해 유럽 여행을 하려면 대부분의 시간을 관광버스 또는 열차에서 보내야 하고 그 와중에 비행기 갈아타고 쇼핑까지 해야 하니 여행 일정의 대부분은 런던, 파리, 로마 등의 주요 관광 매력물 앞에서 증명사진 찍는 것으로 채워 질 수밖에 없다. 일부 여행자들은 이런 형편을 모르고 패키지여행에 참가하였다가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주마간산 식 여행문화에 익숙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주어지는 여행 일정 중의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해 졸갑증을 낸다.

우리나라 여행자들이 매년 십만 명 이상 찾고 있는 중국 광서성의 구이린(桂林)은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명승지다. 구이린 사람들은 예부터 구이린의 절경을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로 중국 내외에 자랑하여 왔다. 구이린의 이런 명성은 1972년 미국 닉슨대통령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 일정에 구이린 관광이 포함된 것을 비롯하여 최근의 클린턴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외국 정상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구이린 관광의 백미는 수천의 산봉우리가 연출하는 천하 절경의 허리를 감싸고도는 이강유람이다. 중국인과 외국인 여행자가 각각 따로 이용해야 하는 이강유람은 그러나 한 번 돌아보는데 네 시간이 소요된다. 이 이강 유람의 묘미는 물살이 빠르지 않은 강물에 몸을 맡기고 세상의 모든 잡념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이탈에 있다. 그러나 절경 구경이 전부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똑같은 산봉우리들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강유람을 견디지 못해 유람선위에서 고스톱 판을 벌리거나 소주 판을 벌리기 일쑤다. 이런 한국인 여행자들을 배려하여 이강 유람선 운영 당국은 한 시간짜리 특별 코스를 편법으로 운영해오다 이제는 아예 한 시간 코스를 한국인 관광객만을 위해 따로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다.

중국에는 또 양자강 삼협에서 출발하여 중국인들이 평생에 한 번은 꼭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소주와 항주를 거쳐 상해를 연결하는 열흘 남짓의 크루즈가 서양 사람들과 일본인들에게 인기 상품으로 팔리고 있다. 이 유람선에 한국 사람들을 승선시켰더니 이틀도 안되어 도중에 모두 내려 더 이상 판매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숨고를 틈도 없이 바쁘게 뛰어왔다. 그래서 그나마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의 여행이나마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어쩌다 주어지는 여행까지 종종걸음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간에 쫓겨 여행을 할 바에야 굳이 여행을 위해 돈을 써야할 이유를 모르겠다. 여행사로서는 여행자들의 기호에 맞추어 상품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지만 이제 여행사들 역시 우리 여행문화를 선도해 나갈 책임이 있다. 여행자들이 여행의 묘미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상품개발을 유도해 나가야 한다. 여행이 더 이상 일의 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여행은 여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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